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48화 (248/400)

248화.  < 천무문주. (3) >

5.

가문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가문이란, 아직 가족이 아닌 것.

그러기에 가족으로 향하는 도정에 놓인 것이다.

아직 가족이 아닌 자들이 모여서, 어떻게든 인연을 맺어서, 어떻게든 맺어진 인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발악하여서,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아직 자신이 [시종장]인 이상에는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아직 자신이 [가영]으로서 임무를 다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아직, 아직, 아직…….

그 절박함이 우리를 이끈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아비가 되고 언젠가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될 때까지, 우리는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어서, 지금 이 자리에 섰다.

“우부르카.”

모든 아이들의 노력을 봐주는 존재로서 나는 가주라 불린다.

“우고르.”

평야를 향해 한바탕 사자후를 터트린 우부르카는, 어느 정도 만족한 얼굴이 되어서 나를 돌아보았다. 뜨거운 입김이 우부르카의 송곳니 틈새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적은 탑에서 최상위를 달리는 전사다. 사기급 아이템까지 가지고 있지. 따라서,”

“내가 봐줄 필요조차 없는 적이라 이거로군.”

“그렇다. 마음껏, 마음대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싸우고 와라.”

우부르카가 씩 웃었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명령이었다! 가주! 내가 사랑하는 애비여!”

쿠웅!

우부르카는 천지가 흔들리는 발소리를 남겨두면서, 쿠웅, 쿠웅, 적군을 향해 쇄도했다. 귀인족들이 타고난 몸 자체가 철마이고 기창이었다면, 우부르카는 몸 자체가 전차이고 전함이었다.

귀인족들이 9천의 군세로 해내었던 돌진을, 우부르카는 홀몸으로 해냈다.

“나 우부르카와 맞서 싸울 전사는 있는가아아아!!”

우부르카가 일갈했다. 살아남은 귀인족들은 헉, 창대를 놓치고 미끄러졌다.

“없는 것인가! 귀인족 중에는, 전사가! 아아! 없을 만도 하지! 잘난 거라곤 머리통에 박힌 뿔밖에 없는 새끼들이니 말이다! 크하하하하!”

웃어 젖히는 우부르카는 신화속 거인처럼 거대했으며, 귀인족은 오늘 신화를 마주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귀인족을 향한 도정에 놓인 자가 우부르카를 마주보았다.

“귀인 12익장! 결집!”

12명의 용사, 독사의 빙의체들이 쌍검을 휘두르며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염상유택에 의해 한 차례 죽어 나갔던 터라 그들의 몸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처마다 피가 아닌 살기를 터뜨렸다.

“우리들이 네놈을 막는다! 거인!”

“네놈을 죽인다!”

“귀인족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승리로 향하는 도정에서 조금 좇같은 위기가 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쫑알쫑알거리는 귀인 12익장의 음색을 들으며, 우부르카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우부르카가 내쉰 코웃음에는 오러가 지독히 섞여 있었다. 그 오러만으로도 능히 이곳을 메울 만했다.

“-----약한 것들이------."

우부르카가 히죽 송곳니를 드러냈다.

거인이 된 형세에서 그가 웃자, 송곳니는 너무도 거대하여서, 정말 신화 속 악마가 미소를 짓는 것만 같은 광경이 되었다. 지정족 병사들조차 어깨를 떨 정도였다.

“나는 사왕가의 무사장이다!”

우부르카가 웃었다.

“사왕가란, 눈앞에 놓인 죽음을 수거하는 가문! 절망이 없는 죽음이 그 어디 있겠으며, 한이 없는 죽음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가문은 그 모든 절망과 한을 짊어지니, 비로소 사왕가(死王家)라! 그리하여 오직 나의 가주님만이 이 가문을 이끌 자격을 가지신 것이다.”

우부르카는 천천히 도끼를 치켜들었다.

“우리의 절망보다 못한 이는, 막지 말고 도망쳐라. 우리의 한보다 못함에도 불구하고 막아 세우려는 자, 각오하라. 나는 사왕가의 아들이자 무사장인 우부르카.”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너희의 절망이 되어줄 도끼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귀인 12익장이 버티고 서 있던 부분을, 거대한 도끼가 후려쳤다. 우지끈! 땅에 파고든 도끼날이 땅에 균열을 일으켰다. 흔들었다. 무너뜨렸다.

쩌저적, 쩌저저적! 쩌저저저저저저적!!

마치 강력한 일격을 받은 전사가 비틀거리듯, 망자들의 부대가 이루고 있던 병진이 단박에 날아갔다.

콰과라라라라…!

귀인 12익장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던 그곳은, 지면이 함몰하여, 지진이 일어나, 마른 쿠키처럼 부서져 버렸다. 우부르카의 도끼질 한 방에 벌어진 괴업(怪業)이었다.

귀인 12익장은 회피하기 위해 발돋움을 쳤으나, 우부르카의 오른손바닥에 가로 막혀, 오히려 풀스윙으로 맞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도피를 시도한 자는 땅에 추락한 뒤 움찔, 움찔, 팔다리를 움직이다가 이내 툭 멈췄다. 죽은 것이다.

“우고르.”

원샷. 원킬.

독사라는 걸물이 꼼수까지 동원하여 만들어낸 방진을, 우부르카는, 마치 어린애들 장난감 다루듯이 가볍게 깔아뭉갠 것이다.

하지만, 독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여!”

독사는 지금 염상유택에 휘말려 죽어버린 수천명의 귀인족 병사들에게 빙의해 있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병력을 이루어 좋은 것은, 흐트러진 방진을 단숨에 고쳐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들어!”

독사 일동은 검을 들었다.

“쳐!”

수천의 독사 일동이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우부르카는 코웃음을 치고서 다시금 커다란 도끼를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메뚜기 무리와 코뿔소 한 마리가 모여 날뛰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후후.”

에스델이 웃었다.

우리는 먼 발치에서 우부르카의 종횡무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독사 일동이 바닥을 찰 때마다 파팍, 파팍, 우박이 쏟아져 지면을 깎아 내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우부르카가 움직일 때마다 쿵, 쿠웅, 초여름의 꽃잎들이 흔들려서 평원을 향해 흘러들었다.

“이대로는 무사장이 공훈을 독차지하겠군요.”

“질투나 나?”

“아니요. 가주님께서 제게 누님의 역할에 충실해보라고 조언하지 않으셨아니까.”

에스델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더니, [문명 상점]을 불러틀였다.

+

[강신]

랭크: A

효과: 플레이어 본인이 직접 육신을 얻어 강림합니다.

비용: 10,000 종족 포인트

※단, 효과는 5분밖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

“저도 최소한 누님으로서의 체면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사려하옵니다."

"......."

과연. 빙의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강림할 생각인가.

내가 ‘종족 포인트를 모조리 사용해도 좋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가성비가 극악이라 옛적의 유수하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아이템을 단박에 짚어 오다니.

약간 감탄하면서 나는 말했다.

“정말 너는 내 생각을 읽고 있구나.”

에스델은 다시금 웃었다.

“가주의 속을 읽지 못하는 자문사가 무슨 소용일까요.”

나도 웃었다.

“좋다. 딸아이와 아들내미가 서로 누가 잘났는지 싸우고 싶다는데 내가 이걸 거절할 명분이 하나 없구나. 오케이. 윤허하마. 어디 마음에 찰 때까지 즐기고 오도록 해라.”

“감사하나이다. 가주님!”

에스델은 내 오른팔을 와락 끌어안았고, 그러고는 그것이 못내 부끄러웠는지 경공술까지 써가며 멀어졌다.

“후후.”

장녀과 차남이 장난질치는 모습이 귀여워서 좀 웃었다.

“좀 웃겨요?”

뒤쪽에서 시종일관 시립해 있던 실비아 에바나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나참. 반칙과 반칙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앉았네요. 하긴 아까 자문사가 반칙이니 뭐니 길길이 뛸 때 좀 웃기기는 했어요. 룰의 헛점이란 헛점은 다 찔러대는 원조 반칙왕은 댁이잖아요?”

“반박할 수 없는 말이구나.”

“축하드립니다 아주. 화려한 데뷔네요. 사왕가는 이제 명실상부 탑 최강의 길드로 인정받겠지요. 사왕은 이 탑을 사실상 지배하는 왕이 될 거고요. 하지만……."

“하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

“그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잖아. 실비아 에바나일.”

나는 양팔로 실비아 에바나일을 휘감았다. 영애의 몸은 작아서 한 팔에 다 들어왔다.

평소라면 [뭐하는 짓입니까!] [라비엘 부인한테 고자질하겠습니다!] 하고 시끄러웠을 실비아도,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주는.”

내 품에 안겨 실비아 에바나일은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전쟁에서 뭘 바라시는 겁니까아……?”

“내가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밖에 없어.”

나는 칼을 챙겼다.

“이 세상에는 더 높은 곳이 있다는 것.”

"......."

“실비아, 강신을 써라.”

“네?”

“쓰라고.”

실비아가 쭈뼛쭈뼛, 그 말에 따랐다.

1만이나 되는 종족 포인트가 줄어들고, 실비아는 육신을 얻어 강림했다.

앞으로 5분.

“꽉 잡아라.”

“엣? 에에. 자, 잠깐. 김공자 씨. 아니 가주님. 저 지금 되게 불안해지는데요. 지금 너무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하려는 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데요, 가령, 여긴 산봉우리가 뽑힌 산꼭대기이고, 그래서, 만일 여기서 어떤 미친놈이 낙하를 시도해버리면 그야말로 하늘에서 땅까지 머리를 꼬라박기 위한 찬란한 자살행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가주님 김공자님 가주님 그건 아니지요? 아니라고 말해, 이 씨발------.”

나는.

망토로 실비아 에바나일 시종장을 꽉 잡고.

그대로 탓, 발돋움질을 하여----날았다.

날았다.

산봉우리가 찢어져 나가 단지 절벽이 되어버린 그곳을 향해, 거대한 날개를 단 새처럼, 비상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망토에 휘감긴 실비아 에바나일이 난리를 쳤다. 맹렬히 꾸물꾸물거리면서 반항했지만, 안타까워라.

“넌 여기서 도망쳐도 하늘이야.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거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얌전히 하라는 대로 해. 기왕 강신했는데 추락하면 1만 포인트 날아가 버리잖냐.”

“악마!! 가주는 무슨, 내가 악신을 모셨지! 아이고, 내 인생아! 아이고, 실비아 인생아! 사탄을 모셔도 차라리 이것보단 낫겠네!"

“오러에 능숙하겠지. 시종장.”

“예에에에? 이 판에 무슨 오러입니까! 뭐, 당연히 익숙합니다만!”

“오러를 풀어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 상대로, 날아가면서, 바람의 감각을 느끼면서 네 오러를 흩뿌려라.”

"무슨......."

기—[...•

“어서. 나머지는 모두 내가 알아서 해줄게.”

"......."

내 망토 안쪽에서 자그마한 머리가 꾸벅, 움직였다.

망토에 휘감기어 잘 보이진 않았으나 그건 틀림없이 실비아 에바나일이 머리를 꾸벅거린 감촉이었다.

"음."

그리고 내게는 그 정도 동의로도 충분했다.

“실비아 시종장.”

“...예, 가주.”

“어린 시절에 처음 본 무도회의 장면, 기억하지?”

“어떻게 잊어먹겠습니까아. 그 빌어먹을 곳을.”

“그럼, 떠올려라.”

나는 오러를 준비했다.

“떠올리면서, 사방으로---- 그저 사방으로, 오러를 흩날리는 거다."

그 순간.

“아......."

두꺼운 망토에 먹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금사매의 오러는 황금색이었다.

찬란하고 찬란한, 유년시절의 어떤 영광을 약속한 것 같은 색깔. 반강제로 하늘을 유영하면서 실비아 에바나일이 오러를 개방하자, 그것은 곧, 수천만 수억만의 금빛 꽃잎이 되어 평원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황금빛 단풍잎이 평원에 미끄러져 내렸다. 툭, 황금빛 은행잎이 나뒹굴었다. 황금빛 수국과 꽃봉오리, 라일락, 호접난, 장미, 백합, 모란, 영애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꽃잎들이, 환히 빛나면서, 지상에 흘러내렸다.

마천진법魔天陳法.

번외법番外法.

난금화원亂金花院.

"......."

그것이 실비아 에바나일이 어린 시절 품었던 동경이었다.

자신의 오러가 삽시간에 만들어버린 화원(花院)에 실비아 에바나일은 멍하게 내려보았다. 자신이 아직 공중에서 느릿느릿 비행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저, 자신의 삶이 형성화된 풍경을 내려보았다.

“가주, 당신……."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해.”

내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실패를 할 수 있어. 저질러선 안 된 실수를 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되돌아와서 돌이켜 바라보면, 너의 원점(原占)은 저리도 아름다웠다.”

“봐라.”

나는 아래를 가리켰다.

염상유택에서 살아 도망쳤던, 독사가 아닌 귀인족 전사 중 누군가가 실비아의 금꽃을 조심스레 땄다. 전사는 그걸 무엇보다 귀한 보물 처럼 모시며, 서둘러, 누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렇게 달아나는 자가 많지는 않아도 더러 있었다. 이 전투의 의미. 이 전쟁에 담긴 역사. 되살아난 시체들과 강림한 신화. 그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보다도, 눈앞에 기적처럼 찾아든 아름다움에 홀려, 자신이 여태까지 가진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친 채 그저 도망가기로 한 인생들이--- 틀림없이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야. 실비아 에바나일.”

"......."

"너는 나의 시종장이다.”

툭.

오래 이어진 비행이 끝나고 우리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우부르카가 찢어다가 전쟁터 한복판에 박아버리고, 독사와 귀인족의 군세가 쪼개고 지나갔던 그 산봉우리였다.

두 갈래로 예쁘게 쪼개진 산봉우리의 정점에 각각 발을 딛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뭘 바라느냐 물었지. 시종장.”

“……예.”

“사람이, 단지 사람으로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구나.”

평야는 오러로 조각된 꽃잎이 무수히 펼쳐진 황금이었다.

그곳에서 독사가 빙의한 귀인족들은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우부르카의 도끼에 결딴이 났고, 에스델의 칼질 몇 방에 팔다리가 잘렸다.

이미 죽었던 병졸이 다시 한 번 죽음을 맞이할 적에 그 상처에는 피가 튀었고, 후두두두두둑, 사랑스러운 황금빛 장미에 튀었다.

“여긴.”

김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별세계로군.”

그렇다.

마천진법의 목적은 결코 적군을 궤멸시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목적 중에서도 제일 하찮은 목적이어서, 차마 언급하기에도 민망하리라.

“이것이 가주가 바라는 풍경인가.”

“그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다른 풍경을, 다른 광경을, 그리하여 다른 꿈을 보여준다.

“지정족과 귀인족의 패권싸움. 종족의 자존심. 상처. 너무도 중요하여 심장의 무게 대부분을 점하고 있을 그것. 그 원망. 그 한을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나는 황금색 장미를 품에 안고 멀리 도망치는 귀인족 전사를 쳐다보았다.

“나는 저 귀인족 전사를 모르지만, 그럼에도 어떤 삶을 상상해본다.”

지금 여기, 다만 그러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군인이 된 누군가가 있다.

누구도 반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누구도 반문을 준비해주지 않아서, 그 누군가는 대하의 물에 섞여 흐르는 물고기처럼 그것을 자신의 도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느 찬란한 날에, 이 세상 것이 아닌 걸로 보이는 황금빛 장미가 천천히, 느릿느릿, 그 누군가의 발앞에 살며시 떨어진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 불과할 것이지만, 꽃잎을 들고 도망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는, 이미 운명이다. 이제 저 아이는 군인이 아니야. 거듭되는 패배에 심장을 검게 물들인 귀인족조차도 아니지. 그는 그저 황금 장미에 홀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각칼이나 붓을 들게 될 예술가야. 저 녀석은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찾은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실비아 에바나일은 어딘지 취한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금빛 평원을, 또 금빛 평원에서 도망치는 탈영병의 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김율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어.”

"......."

“아주 약간의 우연, 아주 잠깐의 기적만 있으면,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한 유혹이 만들어져. 우리는 인생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 살고 싶어지는게 아니아, 인생이 무언가를 유혹한다고 느낄 때 비로소 살고 싶어져. 알겠나, 가영? 우리는 탑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유혹을 던져줄 거야.”

“……그래.”

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말엔 어떠한 위선도 거짓도 없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김율을 향해 손을 뻗었고, 김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이미 가주는 나로 하여금 조금 더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김율이 강신했다.

가영의 손과 내 손에서 오러가 뒤섞여서, 흘러나왔다.

마천진법魔天陳法.

번외법番外法.

옥하가막屋下假漢

바람이 불었다.

김율의 오러는 바람이었다. 학교의 옥상에 스치는 바람이었고, 운동장의 모래알에 스치는 바람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볼 적에, 평원의 수풀은 이미 오래된 모래알들로 변해 있었다. 바람은, 모래가 죽어가는 냄새를 간직한 채 다만 쓸쓸히 불었다.

“그래.”

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옥상에 올라서서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았을 때처럼--- 그때와 똑같이, 김율은 찢어짖 산봉우리 위에 서서, 모래평원을 내려보았다.

“저 가짜 사막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

"......."

“옥상에서 올려볼 적에는 발 아래의 모든 것이 사막처럼 보이더군. 아마 어디엔가 사람의 갈마른 목을 축여줄 샘물이 있겠지. 오아시스가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얼마 없는 샘물은 곧 증발해버릴 게 뻔했고, 몇 방울 남지 않은 물을 뺏기 위해 수백만의 아귀들이 들러붙어 싸우는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김율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버렸다.”

"......."

“하지만, 썩은 사막이라도 굴러가는 꽃잎이 있다면 아름다울 수 있구나.”

나와 김율이 펼쳐낸 마천의 풍경에는, 아직 실비아 에바나일의 황금꽃들이 바람에 실려 굴러가고 있었다.

그건 너무나 신비로워서 잠시 숨이 막히는 절경이었다.

모래사막에 끝없이 바람이 불었고, 금빛의 장미가, 금빛 백합이, 금빛 수국과 금빛 국화와 금빛 틀림이, 그저 바람에 실려 천 갈래의 방향으로 데구르르르 굴러가거나, 바람에 실려 천천히 날아갔다.

"......."

김율은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내 생이 하나의 가짜 사막처럼 건조했다면, 그저 내 사막에 들어와줄 몇 송이 꽃잎을 기다리면 될 뿐이었는가. 어린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다. 광활한 사막이 한 송이의 꽃을 유혹할 수 있으며, 한 송이의 꽃이 광활한 사막을 유혹할 수 있음을, 그 시절엔 알지 못했다.”

김율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고맙다. 가주여.”

"......."

“이미 내 사막에는 그대의 꽃말과 반장의 꽃잎이 들어와, 아름다워서 행복하구나.”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우부르카와 에스델이 싸우는 곳. 금사매의 황금 꽃잎을 뒤집어쓰고 김율의 황야에 뒤덮인 곳.

전장에서, 독사의 빙의체들이 하나 둘 형형한 오러를 흩뿌렸다.

“왜……."

그 중에서 유독 형형한 오러를 흩뿌리는 자가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다. 뿔은 도중에 꺾여, 그가 이미 한 번 패배한 귀인족 전사임을 증명했다. 몸집은 왜소했으며 피골이 깡말라, 오직 독기와 근성으로만 이 전쟁터에 종군한 전사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 전사의 뒤에는 독사가 배후령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분노하면서.

“왜, 내가 돌보는 아이들은…!”

독사의 빙의체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찼다. 콰아아앙! 두 번 죽어 더 이상 빙의할 수조차 없는 시체들이 날아갔다.

“지금도, 그 때도! 사왕……! 왜! 어째서 내가 보살피는 아이들은, 네가 돌보는 녀석들처럼….”

독사의 눈이 불타올랐다. 독기를 뛰어넘은 원독(怨毒). 오러가 흉흉한 형체를 갖추어서, 짙은 보라색의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설원에서, 나는 그 광경을 봤던 적이 있었다.

‘주화입마다.’

스승님께서, 아직 내 스승님이 아니었을 적에 보였던 모습과 똑같았다.

그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중 빙의]라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심력을 갉아먹는 방법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수백 수천으로 쪼개어 빙의체에 삽입하고, 그리하여 조종하다니. 맨정신으로 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만일 독사 정도의 무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미쳐버렸겠지.

“그때도! 그때도 그랬다, 사왕! 그때도……!”

독사가 말하는 그때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일까.

묻고 싶었지만, 이미 제정신으로 대답을 돌려받을 기회는 진즉 사라진 것 같았다. 오러가폭주하여 독사 일동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문득,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다.

“모두 괜찮아질 것이옵니다.”

에스델이었다.

언제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일까.

에스델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하는 둣, 내 손을 꾹 쥐었다.

“가주님과 함께하시는 동료 분 아니옵니까.”

"......."

“한 대 때려서, 어서 돌아오라 말씀하소서. 가주님. 언제나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래.

“그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델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맞닿아진 부분에서, 오러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에스델은 내가 마천신공을 익히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제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아이였다. 마천신공의 이해도로 따지면 가신단 중에서 에스델을 따라올 사람은 얼마 없을 터.

그 때문일까.

뚝,

투두둑, 툭…… 뚝…

투둑, 투두두둑, 뚜욱, 투두두두두두......

비가.

전쟁터에, 비가. 평원에, 비가. 흩날리는 황금색의 장미 꽃잎에, 비가. 모래를 굴리는 바람에, 비가. 수천수만의 꽃송이가 흐르는 가짜 사막에, 붉은 비가.

가을의 비가.

마천진법魔天陳法.

번외법番外法.

비천비우悲天斐雨.

비가 내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