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49화 (249/400)

249화.  < 역전. (1) >

1.

그 날은 비가 내렸다.

-하. 대체 탑 안에서 뭔 원리로 비가 내리는 거야?

독사는 투덜거리며 어두컴컴한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이 몇 개 세워졌으나 듬성듬성. 꼭 초등학생이 콩나물을 몇 줄기 심다가 내팽개친 것 같았다. 심지어 몇 개는 파괴되었다.

-씨버얼.

알 깨진 가로등을 힐끗 보며 독사는 외눈을 찡그렸다.

-탑 꼬라지 자알 돌아간다.

탑의 초창기.

아직 인프라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

건물들은 심심하면 정전을 맞이했고, 신호등도 건널목도 없는 거리에선 온갖 범죄가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에 질려버린 검성(劍星)이 [자경단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글쎄, 과연 잘 될 것인가? 독사로선 회의적이었다.

여긴 쓰레기와 미치광이들의 집합소니까.

-아! 천무문주!

그리고 미치광이들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무진장 돌아보기 싫었으나, 저 미치광이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자면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왜?

-아. 역시 천무문주(天武門主) 아닙니까!

금싸라기가 화악 날리는 듯한 미소.

뒤를 돌아보면, 쓰레기통 같은 길거리 한가운데에 요정처럼 생긴 꼬마가 한 명 서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궂은 일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아이는 하얀 미소를 지었다. 막 샤워한 듯 싱그러운 금발이 아이의 웃음에 입체적인 향을 더하고 있었다.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독사는 그 아슬아슬한 존재의 이름을 알았다.

-비도 내리는데 뭔 일로 사람을 부르냐?

-아하핫, 딱딱하군요! 흑룡주의 조언을 받아왔습니다. 사람들 보이는 곳에서 당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라더군요!

독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가령? 이렇게 너랑 빗소리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떠들고, 이걸 주위 사람들에게 엿보임으로써 [천무문과 만신전의 관계는 양호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라고?

-호오, 과연!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모르면서 온 거냐? 잘도 따랐구만.

-아직 배우는 중이니까요. 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흐음, 그런 목적에 충실하자면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는 카페에 가서 함께 비를 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군요!

독사는 코끝이 꿈틀거렸다.

‘역시 안 맞아.’

무엇인가, 본능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저것과 자신 사이에 있다.

이야기를 주고 받고, 그 결과 상대가 한 단계 나아간 결론을 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사는 결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정반대. 마치 서로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외계어들만 따로 골라서 주고받은 기분이었다.

-음. 카페라.

-예, 좋은 카페입니다!

또다.

그저 [카페]라고 말했을 뿐인데도 이질감이 느껴진다.

과연 저것은 나와 똑같은 의미로 카페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가? 이해하고 있는가? 모든 대화의 패턴을 암기한 앵무새가 인간과 문답을 주고받는다 하여, 그것을 과연 의사소통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

독사는 하나 남은 눈으로 이단심문관의 눈동자를 힐끗거렸다.

이단심문관의 눈동자에는 그가 전혀 비치지 않았따.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오직 하늘을 비치기 위해 만들어진 파랑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한테 말하는 것]이든 [하늘에 대고 말하는 것]이든 별로 차이가 없겠지. 어느 쪽이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똑같을 테니까.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신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열망이 종교를 만들어냈다면, 이 녀석이 종교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일 것이다.

-어이. 종교쟁이.

-예, 칼쟁이!

-만신전주.

-예, 천무문주!

- 이단심문관.

-예, 독사!

-그래.

독사는 빗물이 흐르는 하늘에 대고 말했다.

-그래. 카페나 가자.

그 날은 비가 내렸다.

2.

비가 내렸다.

"사왕-----!"

빗물에 젖은 포효가 울려퍼졌다. 천무문주. 독사의 이명을 가진 헌터는, 뿔이 꺾어진 귀인족 전사의 몸을 빌린 채,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붉은 것은 비단 그의 눈만이 아니었다. 산발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외뿔. 가슴의 근육과 늘어진 손톱. 그를 구성하는 모든 부위에 붉은 빗물이 흘렀다. 붉은색이 몸을 염(染)할수록, 독사의 빙의체들은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었다.

“크아아아아악!”

그것은 에스델과 내가 펼쳐낸 마천진법의 오러였다.

비천비우(悲天斐雨).

에스델이 마왕이었을 때 세상에 흩뿌린 가을비. 에스델의 원한과 적의가 빗물이 되어 무수히 흘렀다. 여러 빙의체를 빌려 다수로 싸우던 독사는, 일시에 붉은 소나기를 맞아 타격을 입었다.

“후, 후우우…… 흐흐… 아하하하하!”

빙의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고, 외뿔이 꺾어진 전사는 웃었다. 귀인족의 시체더미에서 그 전사는 일어섰다. 동족의 시체를 흘리며, 밟고, 걷어차서, 자신이 운신할 길을 만들었다.

그 귀인족의 형상이야말로 독을 품은 뱀.

전사, 아니, 독사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빗물보다 더 붉은 안광이 그의 눈에 서렸다. 명백한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표식이었다. 독사는 온몸을 피칠갑으로 두르고서, 자신의 입가에 흐르는 빗물을 마치 시원한 생수인 향 핥짝였다.

“우리를! 나를 막을 생각이냐, 사왕!”

“예."

나는 대답했다.

“당신을 막아 세울 작정입니다. 천무문주.”

“왜냐!"

“제가 돌보는 애들 중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나는 지정족의 의장이 있는 곳을 흘끗했다.

“우부르카가 당신들을 날려버린다고 하면, 그것이 우부르카의 승리이지 자신들의 승리겠냐고요.”

"오호.”

"같은 이치로, 당신이 이 상황에 떼를 써서 이긴다고 한들 그게 당신의 승리이지, 당신 종족의 승리겠습니까."

"우하하핫,”

주화입마에 빠져든 무인은 빗속에서 소리 높여 우짖었다.

"과연 니가 거느리는 종족이구만. 올바르고 곧은 정론에 할 말이 없다 야.”

"......."

"아아, 열 받는구만… 그래 . 그렇지 . 나란 놈 하는 게 그 따위지 씨발.”

"천무문주,”

"어쩜 그렇게 애새끼들을 잘나고 바르게 키우셨을까, 씨발!”

파지지직-

독사의 발밑에서 전류가 튀었다. 그에 호응하듯이, 비 내리는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대지가 오러의 격동에 요동쳤다. 땅에 고인 빗방울들이 튀었고, 하늘을 수놓던 빗물은 벼락에 휘말려 증발해버렸다.

"빌어먹을!”

바닥에 펼쳐진 물웅덩이에서 전류가 차르륵, 차르륵, 흘렀다. 감전된 빗방울들이 사방에서 몸을 비틀었다. 독사는 전류가 요동치는 웅덩이 한복판에, 툭, 양발로 우뚝 섰다.

"내 새끼들은!”

신비하게도 그 전류와 벼락의 색깔은 보라색 빛깔이었다.

"왜 나 같은 새끼를 위에 둬서 고생이라냐!”

"......."

"응? 사왕!!”

독사가, 하늘의 벼락을 끌어내리면서 소리쳤다.

3.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죽일 필요는 없었잖냐.

후미진 골목의 갓 식어가는 시체 앞에서, 독사는 중얼거렸다.

-왜 죽이는 거냐. 그럴 필요가 있는 거냐. 이단심문관. 넌 진짜 대단한 새끼잖냐. 그런데 어째서 너는 항상 그렇게….

-음, 그야.

양 손을 피로 물들인 채 이단심문관은 고개를 기울였다.

비를 쏟아 붓는 하늘이 대답한 것인지, 이단심문관이 대답한 것인지 독사는 알 수가 없었다.

-그 편이 효율적이니까요!

-.......

-시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약속을 깨지도 장차의 위협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적의를 드러내는 자는 죽일 수 있을 때 죽여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들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시간은 곱절로 흘러갔다.

이제는 제법 가로등의 숫자가 늘어난 거리에서, 몇 번이고 사람을 거리의 일부로 만들던 망가진 신의 아이가, 이윽고 질렸는지 턱을 괸 채 말했다.

-천무문주.

-.......

-당신이 저를 ‘고치려’ 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은 방긋 웃었다.

-그런 당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 두 사람도 이제는 두 길드의 친분을 과시하는 목적 외에도 커피 주문 정도는 대신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요.

-.......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단심문관은 독사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는 그가 방금 만들어낸 시체는 물론이요, 마주하는 독사 또한 비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저를 이용할 수 있을 뿐. 제 행동원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낡은 차량들이 길을 달렸다.

이미 골동품 가게에 들어가야 할 자동차였지만, 바빌론에는 그런 고물 자동차들이 현역으로 굴러다녔다. 빠앙! 빠앙! 힘 빠진 허파에서 나는 듯한 소리가 어디선가 울렸다.

-왜냐.

-당신은 저를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빗속에서 겨누어진 말은, 다만 순수한 사실이어서 잔혹했다.

-저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삶밖에 가능하지 않으며, 당신이 제게 다른 삶의 방식을 주입하려는 시도는, 그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망가진 가로등이 빗살에 못 이겨 쓰러졌다.

그런 속에서도, 양 팔을 펼친 채 이단심문관은 환히 웃었다.

-그렇지만, 천무문주. 그것은 그렇게나 나쁜 일일까요?

-저를 책임지지 못하기에 저를 죽이려드는 사람을, 저는 적이라고 규정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99퍼센트는 적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런 점에서 천무문주는 무척 희귀한 케이스입니다. 아마 저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죽이진 않을 거니까요!

벼락이 쳤다.

세찬 빗줄기 속에서 벼락은 보랏빛으로 보였다. 그 서슬에 놀란 자동차가 근처를 내달리다가 물웅덩이를 크게 밟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물장구를 거하게 친 듯, 물보라가 일어났고, 두 사람을 덮쳤다.

-말하자면, 저희 둘은 친구이고 동료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라면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4.

우천(雨天)에 벼락이 내렸다.

모든 오러는 색깔이 다르다. 하지만, 색깔이 다를 뿐만은 아니다. 똑같은 붉은색 오러라 하여도 그건 [피]를 의미할 수도 있고 [장미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러 사용자가 심장에 품은 이미지, 자신의 밑바닥에 박혀 있는 심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오러도 달라지는 것이다.

내 오러는 핏물이나 불꽃을 닮았다.

그리고 서열 6위의 헌터, 독사는, [보라빛으로 상한 벼락]을 심장에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제가,”

나는 근처에 떨어진 어느 시체의 칼을 잡아 들었다.

“어떻게 압니까!”

“왜 몰라, 새끼야!”

독사가 달려들었다.

오러의 태가 벼락인 만큼, 주화입마에 빠져 진기를 개방한 독사는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다. 눈으로 독사의 움직임을 쫓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단 한 순간만에 독사의 신형이 내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촤아아아악!

“제기랄,”

내 어깨에서 혈선이 터졌다. 피가 뿜어졌다.

기이한 쾌검(快劍). 만일 조금이라도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왼팔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런 부상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화가 났다.

“거 젠장, 뭘 그렇게 생떼를 쓰고 앉아있습니까!?”

내가 회귀하기 전에, 천무문주는 감히 내가 올려다볼 수도 없을 만한 거물 중 하나였다.

허당 기질이 넘치는 라이트노벨의 황제라는 것을 알아낸 뒤에도, 근본적인 부분에서 나는 이 남자를 존중하고 있었다.

주화입마 중이어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런 남자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울컥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한테, 부끄럽지도 않아요!?”

“후배? 하. 너 같은 후배가 세상에 어디 있냐!”

독사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독사가 쉼없이 사방으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1초를 잘게 나눈 빠르기의 속도로, 어느새, 독사는 내 앞에 당도해 있었다. 나는 오러를 이용해 최대한 시간감각을 연장시켰다. 한없이 늘어난 시간 속에서 독사는 내 배를, 내 턱을, 내 머리를 후려갈기기 위하여 움직였다.

필살(必殺).

기필코 나를 죽이고 말겠다는 의념이 일격과 일격에 담겨 있었다.

나는 발을 움직여서, 손을 밀어서, 허리를 비틀어서, 그 일격들을 피했다.

“어째서냐!”

독사는 멈추지 않았다.

탓, 발소리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독사는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나는 오러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아슬아슬하게 독사가 휘두른 검격을 회피했다.

“사왕! 왜 너냐!”

검격을 피한 순간.

독사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독기에 타오르고 있었다. 독을 품은 구렁이들이 항아리에 담겨 구불거린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은 독기였다.

독사의 눈동자는 고독(蟲毒)의 항아리가 되어 검붉은 색으로 번들거렸다.

“왜 너만, 다른 녀석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냐!”

“갑자기 무슨,”

“너는 마천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 이야기는.

내게 있어선 갑작스러웠다.

일순 멈춰선 내게, 독사는 토혈하듯 외쳤다.

“너는 천마에게 최고의 순간을 마련해줬다! 선물해줬다. 천마는, 죽음의 고통에 갉아먹혔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건네준 선물들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천마실록]에 나와 함께 들어갔던 동료.

나는 마교의 편에 서서 싸웠으며 독사는 정파의 편에 서서 싸웠다.

나는 천마를 스승님으로 모시었고, 독사는 무림맹주를 스승으로 삼았다.

“왜!”

나와 겨울을 공유했던 동료가 소리를 질렀다.

“왜 맹주는 그러지 못했던 거냐!”

-......."

그 절규에는 내 발을 잠시나마 멈춰 세우는 힘이 있었다.

독사가 날린 검기에 내 뺨이 쓸려, 차자자작! 피가 튀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궁연 할아범도 필사적으로 살아왔어! 어떻게든, 천마와 대적할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일생을 다 바쳐 단련하고 수련했다! 내 외눈에는 오히려 무림맹주가 더 숭고해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냐…… 어째서 그 양반은 그런 끝을 맞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치기들을 돌봐주는 데에서 늘그막의 행복을 찾아야 하는 거냐……."

독사의 오러는 더 어두워졌다.

보라색 오러가 어깨에서 올라오더니, 천천히 넘실거리면서, 이윽고 허공까지 뻗쳤다.

“내 잘못이냐.”

"......."

“그것도 나의 잘못이냐. 나는, 이 녀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처럼, 무림맹주 할배를 더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거냐… 어째서 나는."

독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조용해지는 만큼이나 그의 전신에서 솟아나오는 오러의 양은 막대했다. 이제 독사의 오러는 그의 등에 매달려, 꿈틀 꿈틀거리는 촉수처럼 움직였다.

침묵.

이미 천무문(天武門)과 사왕가(死王家) 사이의 싸움은 결착이 나고 있었다.

김율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두어 명의 빙의체가 절명했다. 우부르카가 한 번 도끼를 찍을 때마다, 대여섯 명의 빙의체가 절딴 났다. 에스델이 붉은 대검을 휘두르면, 일렬을 맞춰 반격을 시도하던 빙의체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독사 자신의 비명뿐.

패색이 진해질수록 침묵은 깊어졌다.

“사왕…."

“예. 천무문주.”

“나는 왜….”

그리고.

독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새까맣게 꿈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치고,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독사의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이해되었고, 독사의 목소리가 지닌 진동을 이해했다. 어쩌면 그건 나이기에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과거에 내가 품었던 눈빛이었고 목소리였기에.

내가 최초로 품은 소망. 처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결국 이루지 못했던 원망. 높은 산등성이와 같은 곳에 올라 맑은 공기만을 마시며, 휘두르고 싶은 대로 칼을 휘두르고, 걷고 싶은 길만을 걸어서, 살고 싶은 대로 살기를 바랬던, 나의 소원이자 본질.

내가 최초로 얻은 스킬.

[너처럼 되고 싶다].

독사의 눈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 눈동자에 서린 독의 이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이해한 것이다.

“나도.”

독사가 이를 물었다.

만일 영혼이 있다면 지금 그의 어금니에서 찢겨져 나가고 있겠지.

“나도, 너 같은 놈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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