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 역전. (3) >
6.
독사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 눈에서는 검은 물이 빠졌다. 얼굴에서는 드글거리던 열기가 빠졌다.
주화입마에 빠져 있던 그의 이지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보고 폐관수련을 하라고……?”
“정확히는 관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스테이지, 이 세상에 유폐되는 것이니 폐계수련(閉界修鍊)이라 말해야겠네요. 세상 하나를 통째로 관으로 삼아 수련하는 셈이니, 그만큼 호화롭고 호사스러운 수련도 없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를 질투한다 말씀하시면, 아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너무나 성장해버렸구나. 내가.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조금 더 신경써야 했는데 그걸 못했구나… 나도 참 모자란 인간이다. 참 나쁜 인간이다…. 뭐 이딴 식으로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천무문주를 바라볼 줄 알았어요?”
"......."
“저는 지금 기분이 끝내 주게 좋습니다!"
나는 목을 꺾어 웃었다.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웃는 도중 실비아의 꽃잎이 입술에 묻었고, 에스델의 빗물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고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질투를 받는다는 건 말이에요, 천무문주. 정말로. 진짜로 기분이 좋거든요. 아, 아, 내가 이거 느끼려고 세상에 태어난 거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냥 모든 사람들이 날보고 질투하는 광경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구나, 싶을 정도로, 그냥 기분이 째져요.”
“너……."
“진심입니다.”
그 순간 맞은편 시체더미에서 창이 날아왔다.
나는 가벼이 손을 튕기어, 창의 궤적을 흐트러서 영 엉뚱한 곳으로 창이 날아가게 만들었다. 쿵! 그것과 동시에 시체더미를 박차고 독사의 빙의체가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흐랴아아아압!!”
짜리몽땅한 몸집이지만 대검을 꼬나쥐고 있었다. 독사가 숨겨둔 비장의 한 수일까. 저 시체더미 속에 파묻혀, 내가 틈을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한 칼을 쑤셔넣고 말겠다는 열망.
“천무문주. 아니, 독사 씨.”
나는 사박, 발을 밟았다.
이 근방의 땅은 모두 김율의 모래가 되어 서걱서걱거렸다.
“안 된다니까 왜 그래?”
나는 칼로 바닥을 후려쳤다.
촤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독사의 빙의체가 달려들던 바로 그곳에서 모래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차, 하고 뒷걸음질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곳에도 모래구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처 구멍에서 도망치기도 전에, 모래구멍은 그 발가락들과 종아리를, 허벅지를, 몸통을, 마침내 머리통을 집어삼키었다.
“봤습니까?”
나는 김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독사의 빙의체를 바라보았다.
“귀인 12익장이든 귀인 36천이든, 아니, 그냥 귀인족 전체를 분신으로 만들어서 싸워도, 당신은 지금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
“이런 식으로 싸울까요? 예? 명예도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귀인족을 멸종시켜버릴까요? 아무튼 싸우다가 졌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긍지를 잃지 않았다. 그러니 괜찮은 거라고…… 모두가 괜찮다고 말해주는 장례식이, 천무문주. 독사 씨, 당신이 바라는 풍경입니까?”
나는 독사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렇지 않지요?”
"......."
“그런 장렬한 패배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독사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예."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예."
“너보다 앞장서고 싶다.”
“예."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
그래.
그것이 진정한 밑바닥.
만일 소망의 형식을 빌려서 얘기하자면, 너절하기 그지없는 문장.
[나도] [너처럼] [되고싶다]
이 얼마나 적나라한 욕망인가.
“아하하.”
그 욕망의 덩어리가, 하지만 내 눈에는 아름답게 보였다.
왜냐하면 독사는 행동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저 질투할 뿐으로 키보드나 두들기던 누구와는 다르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행운만을 기다리며, 일상을 허망히 보내던 누구와는 다르다.
독사는 나와는 다른 것이다.
나를 질투하면서도 따라잡기 위해 생각하고 노력하며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질투를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 나가는 강자(强者)다.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천무문(天武門).”
나는 독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남궁연 무림맹주가 천무문의 태상가주로 계시지요.”
독사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평소에는 천무문 길드원을 단련시켜주면서 소일한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탑에서 잘나가는 문파의 길드원들이라 해도, 한 세계에서 손 꼽히는 기재로 추앙받던 태상가주님 눈에 차겠습니까. 그래서 당신도 괴로워하는 것이겠고요.”
독사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다. 대답 없이도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인정한 것이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천무문주. 마지막 정마대전(正魔大戰)을 떠올려보십시오.”
"......."
“드넓은 설원의 양편으로, 일천의 마교군이 도열했지요. 삶이 그림자인 양 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묵포를 둘렀습니다. 그 수가 물경 일천. 세계가 눈에 좀 먹혀 멸망해가는 가운데, 오직 천마를 봉송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그야말로 마교의 총화.”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때까지 가만히 도열해 있던 우리 가문의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른 모래 평원에 한 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대오를 이루었다.
달빛조차 그들의 부대에 가까워가면 희미해져서, 멀리 보면, 그들은 아예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같았고, 그래서 한 마리의 흑룡과 같았다.
"......."
독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직 몸을 얻지 못했다해도, 모래평야에 펼쳐진 1천의 마교 정예는 구경할 가치가 있었다. 정신체로 있다고 하여 그들의 강함을 알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독사 씨. 저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스킬을 썼다.
"백귀환생(百鬼還生)."
그러자.
교인들이 대열을 갖춘 바로 맞은편의 평야에서, 새로운 달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두침침했다. 어두운 수풀에서 이런저런 그림자들이 엿보였다. 처음에는 족제비가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것도 같았고, 다음에는 사슴이 갈대 숲 사이로 달려나가는 것도 같았다.
그들이 거죽 위에 걸친 거죽은 희었고 털은 하얗기 그지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소환이 끝나 하나의 덩어리로 그들이 일렁일 적에, 그들은 새하얀 대호와 같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저 녀석들은……."
독사가 그들을 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환하지 않은 백귀들.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그들을 부를 자격이 없었기에, 마지막 안식 속에 남겨두었던 자들.
“무림맹의 정파 1천 정예입니다.”
"......."
“당신은 남궁연 맹주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스승님의 제자인 제가 마교의 소교주가 된 것처럼, 당신 역시 저들을 이끌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독사는 멍하게 평원 위에 새겨진 정파의 정영 1000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저들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지요.”
“그래. ……거기서 정마대전을 준비해준 건 네놈이었으니까.”
“저들의 충성을 한 명 한 명 받아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걸 해내보란 소리냐….”
“아니요.”
나는 독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할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독사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창을 우두둑, 뽑아냈다.
고통과 굴욕에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똑바로 섰다.
“저 정파의 무사들은, 네가 스테이지에서 사라지면 덩달아 사라지겠지."
“예. 저의 스킬에 부속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다면 저들한테 인정받는 건, 폐계(閉界)가 끝난 다음이 되겠구먼.”
“그리 되겠네요.”
독사는 피 묻은 침을 뱉으며, 나를 향해 노려보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사왕.”
그가 깃든 귀인족 전사의 눈동자가, 그에게 깃든 독사의 외눈이, 한 자루의 창날처럼 나를 겨누었다.
“이번 스테이지에선 내가 패했다! 그래, 우리 귀인족 아이들이 패배했다! 하지만 다음은 다를 거다…… 다음은! 거기서 얌전히,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라!”
“아니요.”
그리고 그 말을, 다시금 나는 부정했다.
“패배하신 분이 폐계수련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말을, 독사는 일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가신들은 그 말을 이해했다. 특히 단 5분을 현계에 내려서는 대가로 1만이나 되는 종족 포인트를 요구하는 강신을 구매한 사왕가의 자문사, 에스델은, 그런 나의 생각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공녀! 저는 이 스테이지를 기권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외쳤을 때에도, 가신들은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독사가 동요했다.
“뭐!? 아니 잠깐, 기권이라니 도대체 어째서……."
그런 독사를, 나는 손을 들어 말렸다.
"제 뒤를 보십시오, 천무문주.”
독사의 눈에서 다시금 열이 걷혔다. 아지랑이가스러진 그의 시야에는 비로소 내 어깨 너머에 보이는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지정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
-.......
수천의 지정족 전사들. 그들은 모조리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본디 그 손에 들고 적을 겨누었던 무기들은 모조리 발치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성난 눈빛이 향하는 곳에는 우리 가문의 가신들이, 새하얀 거인 우부르카가 있었다.
-.......
-.......
지정족들은 침묵을 지킨 채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들은 이런 승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아아. 아무리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제가 그만 선을 넘어버린 모양이네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양팔을 펼쳤다.
“아이들을 돌본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예요. 애들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거꾸로 애들을 무시하고 방해하는 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거듭, 열이 걷힌 독사의 눈에는 더 많은 것이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염상유택에서 살아 도망친 귀인족들. 그들이 시체들의 몸을 빌려 빌려 일어선 독사를 불가해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포함해서.
“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천무문주.”
내게 항의하는 지정족들과, 독사를 두려워하는 귀인족들 사이에 서서, 나는 독사를 향해 말했다.
“승자는 자신이 달게 여기지 않는 승리를 마다할 권리가 있지요.”
독사가 눈을 치떴다.
“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반면에 패자는, 그렇게 마다된 승리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웃기지 마!”
독사가 노호하여 외쳤다.
“이런 승리를, 이 따위 승리를 내가….”
독사의 말이 사그라진 것은, ‘패자는 마다된 승리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말을 머리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 터였다.
만약 사왕가가 나서지 않고 자신이 귀인족들의 시체에 빙의하여 지정족들을 몰살시켰다면, 그런 승리 역시 살아남은 귀인족들은 바라지 않았으리란 것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독사의 외눈에는 자각의 표정이 떠있었다. 지정족들의 비난을 받는 속에서도, 나는 그것이 기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독사는 더 강해질 것이다.
강해지고, 강해지고, 강해지고, 강해질 것이다.
“천무문주.”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내려서는데 대한 불만도, 불안도 없었다.
지정족들은 잘 해낼 것이다.
흑룡주도, 성기사도, 검성도, 물론 천무문주도, 앞으로 남은 ‘40층까지’의---결과적으로는 ‘50층까지의’ 등정을 훌륭히 완수해줄 것이니까.
“고생하십쇼.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서려던 때였다.
“랴오판!”
독사가 소리쳤다.
“네?”
“내 이름은 랴오판이다!”
독사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명도 아니고 별명도 아니고, 내 이름은 랴오판이다! 알겠냐!”
"......."
“랴오판! 다음에는 너를 이름으로 부를 거고, 너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다! 잊지 마라!”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스테이지 기권.]
[36층 스테이지 클리어를 기권했습니다.]
하얀 빛에 휘감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가문원들, 우부르카를 제외한 실비아 에바나일, 김율, 에스델, 사마군, 교인들, 전원이 하얀 빛무리에 잠겨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개또라이 새끼!”
그때, 아래에서, 나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치켜들은 귀인족이 있었다. 뿔이 꺾여나가고 온몸이 만신창이였으나, 그 두 눈만은 흔들림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나 역시 가만히 중지를 들어보임으로써 응답해주었다.
“또라이 눈에는 또라이만 보인다네요-.”
“뭐? 이 씨바아알놈, 너 진짜 나중에 두고 보자! 나중에 보면 아주---."
독사가 그렇게 인상을 찡그렸을 때.
[당신은 임시 공간으로 전송됩니다!]
마침내 전송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