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55화 (255/400)

255화.  < 스테이지를 공략하지 않는 자. (1) >

1.

시대는 빠르게 흘렀다.

사상최초로 산와족이 화하평의회 의장에 올랐음에도, 혼란은 크지 않았다. 의혹을 품은 자들도 [저 산와족이 적룡의 모가지를 땄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한 지정족과 귀인족의 수많은 전사들이 세임슬람의 전적을 증언했다.

“이제 이건 지정족들만의 나라가 아니야!”

흑룡주가 흥분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주제로 떠드는 게 아나스타샤의 취향인가보다.

“우리 아이들이 만들게 될 나라는 로마보다도 위대할 거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니, 공자야?”

“아나스타샤, 저 중졸이에요. 고등학교는 자퇴했고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깔쌈한 말로 플리즈……."

“아, 응. 로마도 원래는 로마인만의 나라로 출발했지. 하지만, 다른 속주 출신의 이방인들이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 어느 변방에서 자라난 신앙을 국교로 삼았을 때, 비로소 로마는 모든 이를 아우르는 대제국이 되었어.”

그 세계를 바라보면서 흑룡주가 자신의 양뺨을 짚었다.

“하지만 로마에는 한계가 있었지…. 그 한계가 뭔지 알겠어?”

그러니까 모른다니깐요.

내가 그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더는 정복할 나라가 없어져서 전쟁경제를 끌고 나가기 어려워져서 아니겠나?”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가 타락한 탓이다.”

내가 아니라 이단심문관, 백작, 성기사가 끼어들어 꺼낸 말들이었다.

흑룡주는 어어, 소리를 내더니 팔을 휘휘 저었다.

“당신들은 저리 가있어. 나 지금 공자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는.”

셋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났다.

흑룡주가 헛기침을 했다.

“음. 많은 한계들이 있었지만, 나는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뚜렷이 나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무슨 뜻인가요?”

“보려므나.”

흑룡주는 화하평의회의 의석들을 가리켰다.

"고블린들이 국방과 식량 생산을 책임지는 가운데, 요정족이 자본을 관리하고. 새기족들이 물류를 휘어잡고. 산와족이 지하자원을 관할한다… 이렇게 되면, 종족이라는 생물적인 차원에서 당파가 형성돼. 어느 한 종족이 멸종 당하거나 노예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특정 종족에 속한 누군가가 문어발 식으로 모든 권력을 틀어쥘 수는 없는 셈이야!”

흑룡주는 많이 마셨는지 볼이 살짝 붉었다.

말까지 더듬었다.

"이게, 이것이 중요해. 생물적인 차원에서 결정이 된다는 거. 서로가 필요해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해서 자연스럽게 견제와 양보가 이루어진다는 거….”

"......."

"이 시스템은, 강력하고 견고해. 심지어 후발 주자들에게도 상냥하지. 어떤 종족이든, 응, 가령 어떤 새로운 종족이 기존 종족 중 하나가 맡고 있던 분야에서 더 뛰어나다면, 뛰어날 수밖에 없다면, 자연스레 그 분야가 해당 종족의 전문 분야로 자리잡을 테니까. 그치만, 응, 그치만 그 시스템이 자리잡기까지가 대단히 험난한 거야.”

흑룡주는 머릿결을 넘겼다.

"가령 어떤 종족이 자신들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한다면. 자신들이 전문 분야에서 밀려날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래서 후발 주자들을 탄압하기로 한다면. 그걸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종족들이 막기는 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풍조가 지배적이라면, 이 체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썩어버릴 거야. 그치만.”

어떤 종족도 멸종 당하지 않았다.

우부르카가 산와족을 멸종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지정족 위주로 대륙이 통일되는가 싶었던 때, 시의적절하게도 화하평의회에서 종족의 차별이 없어졌다.

쏘니아. 요정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춤을 추고 싶어했던 그 아이가, 일생을 바쳐 무대에서 혈화(血花)를 선보인 덕분이다.

신대륙의 발견은 물길을 이끄는 새기족들의 입지를 강화해주었으며, 신대륙의 선주민이었던 몽마족들은 아나스타샤가 이끌던 흡혈종들과 결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귀인족들과의 일전에서, 사람들은 신에 대한 거리감을 잡았다.

하나씩.

한명 씩.

하나의 인생이.

세상을 바꿔 나갔고, 마침내 화하평의회에는 산와족이 최초로 의장에 등극했다.

화하평의회는, 문자 그대로 불길과 물길을 모두 끌어안는 대의회로 거듭나고 있었다.

“모든 게, 응, 너무도 잘 맞아 떨어졌어.”

스크린 위에는 적룡을 쓰러트린 기념으로 열린 대축제가 비치고 있었다.

끼가 많은 어떤 요정족이 온갖 서커스와 혈화극을 선보였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축제에 어울려 깔깔깔 웃었다.

“우리가 눈앞에 두고 있는 건, 이 풍경은 말이야. 공자. 무수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포개어져 만들어낸 성화(聖書)와도 같은, 그런 하나의 거대한 기적인 거야.”

흑룡주는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쁜 기분은 아니어서, 나는 살짝 웃었다.

“그러게요. 정말이지 기적….”

“만약 이 기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나는 멈칫했다.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전에, 흑룡주의 목소리에서는 몽롱한 느낌이 빠져 있었다. 동시에 분위기가, 더 정확히는 눈동자가 달라졌다.

“너 말이야. 공자야.”

흑룡주는 나를 돌아보았다.

축객령을 받았던 다른 이들은 모두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물러난 상태였다.

우리 둘 만이 이야기를 있는 이 자리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겨누었다.

“설마 나한테 말하지 않고 [회귀]를 한 건 아니지?”

"......."

“너한테는 회귀 스킬이 있잖아. 김공자. [가을비의 마왕]을 물리칠 때 그랬던 것처럼… 너 혼자 미리 스테이지에 올라서 죽고, 죽지 않는 루트를 찾아내서, 간신히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아내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아니겠지?”

흑룡주의 양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맥주캔이 떨어졌고, 의자가 나뒹굴었다. 서늘한 바닥에 나는 누웠으며 흑룡주는 그런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저 세계가, 네 시체들 위에 건설된 것은 아니겠지.”

아아.

"......."

그렇구나.

'음.'

부끄럽게도 나는 잠깐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 노고가 인정받아서 눈물이 나온다는 게 아니었다. 새삼. 그건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감정으로써, 오래 전 내 마음속 냉장고에서 폐기처분당했다.

그런 게 아니라.

‘역시 선배는 아름다운 사람이야.’

아나스타샤 선배의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후회가, 고마움이, 분노 같은 것들이. 그같지 않은 것들이. 그것에 미치려다가 만 수많은 것들마저.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뒤섞여 있었다.

비록 나에게 독심술 스킬 따윈 없다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친구가 죽는 것 따윈 싫어.]

선배의 눈동자가 의미하는 것 정도는,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아나스타샤 선배는 이미 나한테 한 번 당했으니까.

기적과 같이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났다 생각한 전투가…… 아이김 제국에서 벌어졌던 전쟁이, 사실은 나의 무수한 죽음을 머금고 피어난 꽃이었음을.

이제는 선배도 알고 있다.

“선배.”

그러기에.

“저희, 우정계약서를 갱신하도록 해요.”

나도 진지하게 말했다.

"응?"

“저번에 만든 계약서요. 아, 잠깐 몸 좀 치워주시고요. 이런 모습 라비엘이 보면 [하여간 술자리만 나가면 누군가한테 덮쳐지는구나]라며 비웃는다고요.”

“아, 리얼하게 상상되네…. 미안. 나도 술 좀 깰게. 계약서는 여기 있단다.”

흑룡주가 손톱을 세워서 허공을 긁었다. 마치 지퍼가 열리듯이 허공이 양갈래로 갈라졌는데, 갈라진 틈새는 새까만 무저갱이었다.

흑룡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저갱에 손을 들이밀어 뭔가를 휙 꺼내왔다.

+

[우정계약서 (友情契約書)]

본 계약서는 아나스타샤 젤렌스카(이하, A)의 요청에 김공자(이하, C)가 수긍함으로써 체결된다.

A는 인간 감정의 유효기간을 신뢰하지 않는바, 오직 바지런한 자세와 부지런한 지성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반석에 올릴 것이라 확신한다. 이에 따라 A와 C는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1. 모든 약속은 두 사람이 동의했을 때만 유효하다.

2. 모든 약속은 두 사람이 동의하면 폐기할 수 있다.

3. 단, 약속의 성립이나 폐기는 오직 그 주의 주말(토요일 혹은 일요일)에만 가능하다.

4.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길 경우, 주사위를 굴려 높은 눈이 나온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

성명: 아나스타샤 젤렌스카(印)

성명: 김공자(印)

+

“응. 이게 우리 계약서인데… 이건 왜?”

나는 손톱끝에 오러를 아주 약간 집중시켰다.

“여기에 약속을 추가하는 거죠.”

슥삭, 사각사각.

검지에 맺힌 오러가 신중하게 글씨를 써나갔다. 아니, 실제로는 오러가 종이의 겉면을 아주 살짝 태우는 것이니까 [글씨를 태우다]가 표현해야 맞겠지만.

+

5.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듯,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안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6. 그러나 [계약에 걸고]라는 말과 함께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코 거짓을 입에 올릴 수 없다.

7. 그리고 [계약에 걸고]라는 말과 함께 돌아온 대답을, 우리는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

“이러면 조금 더 선배랑 제가 믿음을 쌓는 데 좋지 않겠습니까? 조금, 음, 유치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애당초 우정 계약서 같은 걸 쓴 시점에서 아웃이고. 저는 선배에게 어울려드리자는 생각에서……."

“계약에 걸고.”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 선배는 내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단 한 번도 죽지 않았어?”

"......."

기껏해야 글자 몇 줄.

기껏해야 약속 몇 가지.

글자와 약속엔 아무런 힘도 없어서, 그것을 무시하고 어기기란 너무도 쉽다.

만일 무시하고 어기기 쉬운 그것들이 갑자기 어려워진다면, 그건 단지 글자를 쓴 사람의 손길과 약속을 내건 손가락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

어릴 적 살던 나라가 쪼개어진 사람. 쪼개어진 빈틈에서 피난 갈 적에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나는 물어보지 않았고, 그녀도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세상을 한 번 버렸다.

세상을 버렸다는 점에서 흑룡주의 냉정함이 엿보였고, 버렸음에도 인정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아나스타샤의 결핍성이 드러났다. 버려진 세상속에서 다시 탑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흑룡주의 고귀함이 드러났으며, 그렇게 세운 탑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나스타샤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심장에 색깔이 있다면 그녀의 심장 역시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행동하길 멈추지 않았다.

주저 앉아 흐느끼는 대신, 무릎을 안고 틀어박히는 대신, 그녀는 항상 걸음을 떼어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해왔다.

아나스타샤 선배는 강한 사람이다.

“한 차례, 죽었어요.”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 죽음에 대해 말하려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해요. 누구를 만났는지, 왜 죽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것들은 언젠가, 아니, 이번 스테이지들이 마무리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아나스타샤. 이것만은 약속드릴 수 있어요.”

나는 아나스타샤를 향해 말했다.

“31층부터 37층까지 올라가는 지금까지--- 이 스테이지들을 공략하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죽지 않았어요.”

“제가 키운 아이들은, 여러분이 키운 아이들은, 대단해요. 정말로요. 저는 되돌리지 않았어요. 선배가 말씀하신 이 모든 기적은, 저 없이도 가능했던 일이에요.”

"응."

문득.

흑룡주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

“그렇구나.”

한 차례, 두 차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나스타샤 선배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이라고 선배는 말했다.

잠시간 그렇게 침묵했다가, 말했다.

“언젠가 네게 ‘죽어달라’고 요구할 거야.”

.......

“탑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죽어 달라고. 죽은 자들을 살려 달라고.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당장 내가 회귀자라는 걸 밝혔던 날에, 아나스타샤는 말했다.

“동정을 빌미로. 정의를 미끼로. 우애를 덫으로. 염치 하나 없이 네게 그런 요구를 할 거야.”

나를 이용하겠다고.

나의 생명도, 자신의 우정도, 더 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탑을 위해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고.

“그러니까, 사실 내게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겠지만….”

나는 아나스타샤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아나스타샤도 자신이 그런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래도 지금은 말하게 해줘.”

아나스타샤 선배는 웃어 보였다.

“다행이야.”

그 웃음은 그녀의 심장을 이루는 색조 만큼이나 복잡한 것이었지만, 조금 전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 만큼이나 오해할 수 없는 한 가지 감정을 띠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이끄는 동안, 네가 다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다행이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을 받았다.

“네."

마주 웃었다.

“걱정해주셔서, 다행이라고 여겨주셔서 고마워요.”

그때, 탑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38층 스테이지 진입.]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38층 스테이지에 진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종족들.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음 시련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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