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우상 파괴. (1) >
1.
우리 아이들이 최종 진화를 완료하고 나서, 얼마 후.
[몽마족이 진화를 겪습니다!]
[새기족이 진화를 겪습니다!]
[산와족이 진화를 겪습니다!]
다른 종족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진화할 수 있는 종족이 비단 지정족만은 아니었다. 땅의 아이들은 그저 처음으로 포문을 열었을 뿐. 아직 진화가 가능한 몇몇 종족들 역시, 하나둘 오러를 뿜어냈다.
파아아아앗!
하늘 아래가 삽시간에 무지개빛으로 물들었다.
-오오.
-이것이…….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몸 주변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괴수의 사지 위, 하다못해 발톱 위에라도 걸터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들이 일제히 형형색색의 오러를 태워올린 것이다.
마치 무지개에 휘감긴 것처럼 일대가 환해졌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
그 빛은, 거대 괴수가 자신을 심지로 삼아 타오르는 촛불이기도 했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은 수면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
‘끝났군.’
나는 홀로그램을 보면서 가늘게 눈을 떴다.
기룡의 웅장한 몸집이 빠른 속도로 졸아들고 있었다. 이미 가을비의 마왕과 싸웠을 때 눈앞에서 직접 지켜본 현상. 타천이었다.
‘그래도 그 때보다는 훨씬 얌전하네.’
기룡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몽마족들이 기룡을 꿈속 세계에 붙들고 있으니까.
아마 저 거대한 거북이는 고통을 느끼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이 더는 권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등급 조정에 착수합니다.]
[심해에 거하는 기룡의 이명을 박탈합니다.]
호사好死.
마침내 괴수의 몸이 허물어졌다.
자기 스스로 이 대륙을 창조한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 성좌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 의해 온몸이 잡아먹혔다.
“……정당한 결말이야.”
흑룡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들이 진화하는 모습을 보고 아나스타샤는 한동안 말을 잃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은 듯했다.
“설령 저 용대가리 덕분으로 대륙에 오러가 풍부해졌다고 해도…. 그래서 여덟 종족들이 모두 쟤한테 은혜를 입은 셈이라 해도, 억울해할 수가 없어.”
자업자득.
아나스타샤는 담담하게 괴수의 죽음을 평가했다.
“자기 자식들을 죽이려다 당한 일인걸. 아이들한테 이빨을 드러내는 존재가 어떻게 창조주고 부모겠니? 일단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건 짐승이야. 서로 싸워서, 죽이고, 강한 쪽만 살아남는 거지.”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강했네요.”
“맞아. 우리 아이들이 잘난 덕이네.”
아나스타샤와 나는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표정이 밝았다. 우리들이 직접 스테이지를 공략한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기뻐 보였다.
분위기 훈훈한걸.
“뭐, 어떤 종족이든 다 잘했지만요.”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제일 잘한 아이들을 꼽자면 역시 지정족 아닐까요?”
"......응?"
아나스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니? 몽마족이 용대가리를 잠재우지 못했으면 애당초 스테이지를 깰 수도 없었단다. 그런 몽마족을 데려온 흡혈종이야말로 제일 큰 공을 세웠다고 봐야 돼. 따지고 보면 지정족은 그냥 맛있는 장면을 뺏어간 거고.”
“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산와족의 건축술이 없었다면 매일 수십만 명이 기룡의 몸에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단심문관이 아하핫, 웃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오러흡입.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달라붙느냐가 중요했던 만큼, 산와족은 작전을 실현시키는 데 혁혁한공을 세웠습니다!”
“허. 다들 뭘 모르는구만. 수십만 명이 있으면 뭐 하는가?”
백작은 냥이혀로 냥이손을 핥았다.
“그들이 전부 배를 타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야, 이동하면서 먹을 식량도 있어야, 이동하고 나서 생활할 공간도 있어야 거사가 이루어지는 걸세.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만 저 대륙의 자본과 물류는 요정족이 움직이고 있지. 알겠나? 객관적으로 볼 때 사실은 요정족의 숨은 공로가 가장 커.”
“참고로 그 물류를 운반하는 선박들은 전부 새기족이 이끈다. 음. 내 말은, 객관적인 사실을 따지자면 그것 또한 객관적인 사실에 속한다는 얘기다.”
어?
이 사람들 혹시 진심으로 자기 아이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에이. 아니죠. 누가 봐도 지정족이 가장 잘했잖아요. 이분들이 눈에 콩깍지가 껴도 단단히 꼈네. 견적이 딱 나오는데도 자기 자식을 편들다니.”
"......."
"......."
어라.
분위기가 농담이 아닌데.
조금 전까지 훈훈했던 공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탈락자 대기실은 싸늘해졌다.
‘진짜?’
진짜로 진짜 자기 자식이 제일 역할을 많이 했다고 믿는 거야? 말도 안 돼 거의 인지부조화 수준 아닌가?
아무리 우리 지정족이 잘 나간다 해도 그렇지 이건 추악한 질투이고 시기이며 좀 너무 질척질척거리는 감정 아냐?
“[띠링! 사왕이 동료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아직 몰랐습니다. 영원히 굳건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동료애와 우정이 설마 자식들로 인해 틀어질 거라고는.]”
“뭐 하세요, 공녀님……?”
“메세지 놀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거 알아? 사실 너희한테 전달되는 메세지나 설명문, 스테이터스, 전부 다 한 사람이 수작업으로 치는 거지롱.”
“네? ……예에?”
“아무튼 38층을 깼구나! 축하해!”
공녀는 자기 입으로 빠바바밤, 하고 축하음을 흉내냈다.
“사실 너희가 공략해온 스테이지들은 세계마다 달라. 1층부터 10층까지는 튜토리얼이니까 대동소이해도, 11층부터 31층까진 완전 다르지. 세계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고 너희 등천자(登天者)들이 활약할 무대는 무수하니까!”
“헤에.”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동료들이 공녀의 말에 관심을 돌렸다.
“스테이지가 세계마다 다르게 등장한다는 건… 역시 우리 세상 말고도 탑이 세워진 세계들이 있다는 얘기구나?”
“응! 49층까지는 이세계인들끼리 마주칠 일이 거의 없지만.”
“초보자 배려?”
“그런 거, 그런 거. 50층부터는 온갖 세계에서 몰려든 등천자들이랑 경쟁해야 될 거야.”
동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거나 짐작한 내용이지만, 그들은 마치 이런 얘기를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아. 아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정말로 처음 듣는 거겠네.’
동료들은 나와 다르다.
나야 배후령 덕택에 이미 [다른 세계의 헌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배후령 자체가 이세계에서 99층까지 찍은 전설적 인물 아니던가.
‘하지만…… 검성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
탑주와 만나서 탑의 진실을 파고든 내가 특이 케이스다.
대부분은 그런 걸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알 방법도 없겠지.
새삼 정보의 격차를 느끼는 와중에,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렇지만 31층부터 49층까진 대체로 같아. 만국공통, 아니 만계공통이랄까?”
'음.'
이건 나도 처음 접하는 정보다.
“결국에 너희가 스테이지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의 문제. 쉬운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구태여 어려운 길을 가려는 사람도 있지. 50층에서 이세계인들이랑 뒤섞이게 될 걸 대비해서, [다른 세계의 종족과 만날 경우 어떻게 되는가]를 미리 체험한 거라고 보면 돼!”
공녀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이제 체험의 대가를 치를 때야.”
대가.
“자식이 크면 언젠가 부모의 맨얼굴을 깨닫게 되기 마련이니까.”
동료들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는 순간이었다.
[연쇄 계층 진행 중.]
[공략자는 39층으로 강제 전송됩니다.]
[39층 퀘스트가 표시됩니다.]
우리들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
[우상 파괴]
난이도: 미정(未定)
임무 목표: 당신은 당신의 종족을 도왔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종족은 수많은 난관을 이겨냈습니다. 때로는 흉폭한 자연, 때로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종족, 때로는 신세계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역병, 때로는 이 대륙을 창조한 존재가 난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당신이 마지막 시험이 될 차례입니다!
당신은 여태까지 ‘신’이 되어 종족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루를 살기 위해 하루를 벌어야 하며, 먹어야 하고, 웃거나 화냅니다. 저 종족과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똑같은 인간입니다.
선택하십시오.
당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종족에게 알리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진실을 숨기고 종족을 하인으로 부리겠습니까?
※단, 진실을 숨길 경우 더 이상 탑에 오를 수 없습니다.
+
"......."
그래.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 퀘스트다.’
회귀하기 전에 우리 탑이 좌초하게 된 이유.
파죽지세로 스테이지를 공략해 가던 염제가 40층에 이르러 허덕거리게 된 원인.
몬스터나 성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써내린 역사가 적으로 돌변한 계기.
‘우리는 신이 아니야.’
다만 저 종족들과 똑같은 사람일 뿐.
이제 그걸 아이들도 알 때가 되었다.
2.
오래도록.
나는 이 39층을 정말 오래도록 준비해왔다.
『굳이 말하면 케케륵케르는 우리의 악우(惡友)다.』
내가 신이 아니라 단지 너희의 부모에 불과하며, 더 정확히는 친구에 지나지 않는단 사실을 끊임없이 아이들한테 강조했다.
『사도 고르케는 죽는 순간까지 일족에게 신신당부했다. 케케륵케르는 선한 초월자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를 좀 챙겨주려고 드는 친구에 불과하다고.』
『입이 더럽고 성질이 쪼잔하니 가히 가까이 두고 싶은 친구는 아니라고 말이다.』
어쩌면 진짜 신인 척 시늉하는 쪽이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화산이 흘려대는 용암으로부터 지정족을 지켰다. 제국의 소금 동굴에서 아이들을 탈출시켰다. 진흙에서 뒹굴던 지정족에게 문신을 가르쳤고, 글자를 만들어줬으며, 대륙의 패자로 거듭나는 길을 알려주었다.
내가 지정족의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많고도 많았다.
원하기만 했다면 어느 종교보다도 광신적인 교도들을 만들 수 있었겠지.
『케케륵케르를 가리키는 이름은 ‘입이 더러운 사자’, ‘두들겨패는 손맛을 사랑하는 자’, ‘폭력교육의 신봉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케케륵케르.』
『어서 와라, 애비여.』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내가 신 같은 게 아님을 아이들한테 알려줘야만 했으므로.
-뭐?
-불의 신이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염제는 엘프들에게 절대신으로 군림하였다.
엘프들이 다른 종족을 도륙할 때, 세상을 불태우고 별의별 난장판을 칠 때, 염제는 언제나 [신의 명령]이나 [하늘의 뜻] 같은 변명을 썼다. 태초부터 기적을 목도해온 엘프들은 그런 염제의 수작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 신 아니라고.
그랬기에 배신감은 더욱 처절하게 사무쳤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
-아, 시발. 뭐 이딴 퀘스트가 다 있어. 하여간 연쇄 진행이니 뭐니 할 때부터 불안하더라. 쯧.
염제는 스테이지를 진행하기 위해 진실을 밝혔다.
-말귀 못 알아먹냐? 나 신 아니라고.
-왜 표정들이 그래? 내가 신이 아니면 뭐, 신이 아니라서 떫냐?
-놀고 있네. 나 아니었으면 진즉에 멸망했을 것들이. 나 덕분에 대륙 재패하고 제일 잘 나가는 종족이 됐는데, 시발 내가 신이 아니면 그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하냐? 어쨌든 너희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
-뭐 학살? 명령?
-그건 속은 너희들 잘못이고요.
-와, 이 새끼들 웃기네. 누릴 건 다 누려놓고 왜 이제 와서 지랄이야? 내가 너희를 이용한 게 아니라 너희가 날 이용한 거다. 너희도 다른 종족 죽일 때 즐겼잖아. ‘신의 이름’이란 변명을 쓸 수 있어서 존나 편했잖아?
-그럼 감사할 줄 알아야지.
-배은망덕한 새끼들.
결과는 당연히 파국이었다.
엘프들은 자신들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불의 신] 따위는 없었다. 다른 종족들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도 없었다.
수천 년에 걸쳐 자신들이 이뤄온 역사. 학살과 전쟁. 모든 것은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 창조주 노릇을 하며 속인 사기극에 불과했다.
-노려봐? 너희가 노려보면 뭐 내가 쫄 줄 알아?
그렇게 엘프들은 사분오열되었다.
-꼬우면 덤비시든지.
종족의 정상에 군림한 사제 계층이 먼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이끌어온 백성들에 의하여.
전사 계층은 분열되어 저들끼리 내전을 시작했고, 당연하지만, 절대다수의 군벌들이 [거짓된 신] 유수하를 적대하였다.
40층부터 우리가 싸우게 된 적들은 다름 아니라 엘프들.
그 때까지 염제를 신봉하고 떠받든 종족이 돌연 ‘적’이 되고 ‘몬스터’가 되어, 우리 탑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염제에 의해 멸망하게 된 종족들의 몇 안 되는 생존자들도, 물론 적이 되었다. 신을 자칭했을 적에도 반항했던 그들이다. 인간임이 밝혀진 다음부턴 저항이 더 격렬해지면 격렬해졌지, 결코 약해질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자업자득.
『아이들한테 이빨을 드러내는 존재가 어떻게 창조주고 부모겠니? 일단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건 짐승이야. 서로 싸워서, 죽이고, 강한 쪽만 살아남는 거지.』
회귀 전의 세상은 아나스타샤가 말한 대로 흘러갔다.
우리 탑은 엘프들과 끝없는 투쟁에 돌입했었다.
“자아.”
그것이 내가 알던 과거의 이야기.
“어떻게 할래?”
그리고 이제부터 달라질 이야기다.
“여기서 진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선택하면, 여태껏 그런 것처럼 계속 신으로 군림할 수 있어. 아. 퀘스트에 실패해도 지금까지 클리어한 스테이지들은 보존돼. 31층부터 39층에 해당하는 대륙 전체가 너희의 탑으로 편입되는 거야! 너희를 신들로 모시는 종족들은 덤으로 따라오겠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활짝 웃었다.
“하지만 만일 비밀을 밝힌다면……. 너희가 해온 일들이 모조리 공개될 거야. 응. 너희가 나눈 대화들, 해온 행동들, 전부 영상이 되어서 모든 종족들의 머릿속에 직접 [상영]돼.”
“엄청 난리가 나겠지. 근육돼지는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지만 그건 걔뿐이고. 다른 애들은 하나도 모르는걸!”
공녀는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뭘 선택할 거야?”
당연하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