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64화 (264/400)

264화.  < 가족 면담. (1) >

1.

이단심문관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텅 빈 자리엔, 이단심문관의 작은 몸무게를 늘어놓은 듯 소파의 정중앙이 움푹 파였을 뿐. 우리는 소파의 빈 자리와 홀로그램을 두리번 두리번 돌아봤다.

“김공자. 정말 쟤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하니…?”

“음. 이단심문관 씨도 예전에 비해 많이 성장했어요.”

“싸이코가 변심해서 사이코가 되었대도 그냥 획 하나가 줄어들었을 뿐이지. 여전히 맛이 간 건 똑같단다.”

“아나스타샤. 생각해보세요. 싸이코패스에서 패스 두 글자가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면 굉장한 진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게도 볼 수 있으려나….”

“어이. 너희 둘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주고받는 것인가…?”

성기사는 어이없는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의 잡담을 끊었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다음부터는 그냥 너희들이 얘기하는 걸 엿듣고만 있어도 정신이 멍해진다. 흑룡주와 사왕이라니. 절대로 친구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두 인물이 붙어버린 것도 충격이건만, 의외로 죽이 잘 맞는다는 게 더욱더 충격이다…. 한 명은 얼빵한 건달의 대명사이고 다른 한 명은 완벽한 차도녀 아니었나.”

“왜요? 저희만 절친 먹으니까 좀 외로우세요? 저는 언제나 성기사 님에게도 마음을 열어두었습니다. 헤이, 헤이. 프렌즈. 우정! 프렌즈쉽! 컴 온!”

“이 남자가 우리 탑의 서열 2위란 말이지……."

성기사가 투구 너머로 한숨을 쉰 순간, 홀로그램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아하하핫!”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기실에서 곧잘 터진 예의 웃음소리. 이번엔 홀로그램 너머에서 들려온 것이다.

우리는 마치 길거리를 걷다가 악취가 풍겨나오자 즉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악취의 주범을 보는 것처럼, 즉 길바닥에 설치된 지 아무리 못해도 30년은 넘어갈 법한 쓰레기통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홀로그램 속 이단심문관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산와족 여러분! 그리고 비(非)산와족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깜찍하게 생긴 금발 쓰레기통이 활짝 웃었다.

“이 모습으로 여러분을 뵙는 건 처음이군요! 슬라임폴리스에 머무를 때는 주로 강아지에 빙의해서 여러분께 제 말씀을 전달했으니까요. 여러분의 꿈속에 나타날 때도 저는 강아지 모습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건네드릴 인삿말로는 이것이 최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단심문관은 밀림의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와족 여러분!”

이단심문관이 환히 웃었다.

마치 하늘에서 휘광이 반짝이는 듯했다.

-저, 저거…?

-똑같다. 영상으로 본 그분이랑 똑같아!

-이게 무슨…….

산와족들은 멍하게 허공을 올려보았다. 어디 산와족뿐인가. 세임슬람이 압도적인 결투를 시연해준 터라 수많은 종족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려 있었다. 이단심문관이 전송된 곳은 하필이면 세임슬람의 머리 위 허공, 즉, 만인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최고의 무대였다.

-라임. 역시 신과 같은 자태 아니신가…?

-아름다우시다….

산와족이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그렇다.

여유롭게 허공을 거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신성했다. 사실 [신성술식-송신(送神)]의 능력을 끊임없이, 0.5초 간격으로 발동하여 마치 하늘에 가만히 떠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요식 행위지만. 그걸 산와족들이 알 리 없겠지. 아이들은 황홀한 얼굴로 자신들의 신을 올려보았다.

"......."

이 순간, 대기실에 앉아 홀로그램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우리 동료 일동들 머릿속으로 한 가닥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이거….”

“의외로 먹히는 거 아닌가?”

“맞아요. 이단심문관 씨가 원래 외모는 죽여주잖아요. 사실 외모빨로 서열 4위 먹었다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걸요. 우리 탑에서 제일 잘 생겼는데다 가히 국보급의 미소 몇 번만 뿌려주면……."

“의외로 선동당하기 쉬울지도 모르겠군.”

그렇다. 우리가 어쩌면 이단심문관을 너무 저평가했을지 모른다.

외모빨.

흑룡주와 더불어 우리 탑의 외모 지분을 둘로 갈라먹는 저 사기적 면상. 아울러 사기적인 보이스와 미소. 그 사기체가 땅바닥을 걸어다닐 때도 혹세무민한 인간들을 끌어당기기 충분했는데, 이젠 아예 하늘에서 둥실둥실 떠다닌다. 그러면 그게 곧 신 아니겠는가!

“산와족 여러분.”

이단심문관은 공손히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폼으로 만신전(萬神殿) 길드장을 10년 간 해온 것이 아닌지라, 기도를 올리는 이단심문관의 손짓은 참으로 경건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기도하는 이단심문관의 얼굴 역시 잘 깎여진 대리석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살짝 내려간 눈썹, 눈썹 사이로 올망올망하게 빛나는 눈동자. 비밀을 말하려는 듯, 고백하려는 듯, 절묘하게 좁혀진 입술…….

그 모든 몸짓이 산와족들로 하여금 멍 때리고 올려다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여러분이 영상을 모두 보셨다니 아시겠지요. 저, 이단심문관. 여러분에게 위대한 개라 칭송받는 이는, 오직 여러분을 위해 동료들과 떨어져서 200년의 시간 동안 유폐당했습니다. 오직 여러분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여러분을 제일 근처에서 지켜보며 돌봐드리고 싶어서요!”

-라이임….

-맞다. 다른 신들은 일 끝나니까 볼 거 없다고 얼른 다른 곳… 이세계? 외세계? 아무튼 다른 어디로 훌쩍 떠나버리지 않았냐. -하지만 우리 신님은 계속 우리 곁에 머물러주었다…. 한 사람이 50년을 버티기도 어려운데, 자그마치 200년이나… 누구한테도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친구들과 얘기조차 나눌 수 없는 채로, 200년을 견딘 것이다…. 그것이…….

“예."

이단심문관은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환히 웃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오오오오-!

산와족들이 들뜨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너희를 이끌던 자가 사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진실은 분명히 충격적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이겠지.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은 인간이긴 해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헌신한다]라는 진실은, 충격을 뒤엎을 정도로 감동스러운 것이다. 신이 아니라면 뭐 어떤가? 애당초 신이 무엇인가? 우리를 굽어보고 두루살피는 분, 그분이 곧 우리의 신 아니겠는가?

-천사님!

어떤 어린 산와족이 촉수를 휙휙 흔들었다.

-천사님이셔!

-맞다! 우리 종족을 사랑해주시는 천사님이시다!

-천사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아, 천사님! 감사합니다!

신이라는 이름이 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면 그만일 뿐.

“아하하. 음! 사랑스러운 저의 달팽이들!”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선동, 날포, 혹세무민, 날조, 다단계사업, 광신도 양산 및 배포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면판에 제일 고혹스러운 보이스를 첨부한 뒤, 거기에 제일 끔찍한 싸이코패스 AI를 장착하면, 그야 이단심문관 같은 존재가 안 될 수가 없다.

“저와 여러분의 생김새가 다르다 하여 놀라지 마시길. 우리들이 나누는 사랑에 비해, 겉모습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저 역시,”

이단심문관이 손가락을 탁, 치자 돌연 그의 신장이 날씬해졌다. 어른 형태로 바뀐 것이다. 산와족들이 깜짝 놀라서 ‘라이무!’ ‘라이무!’ 하고 촉수를 펄럭펄럭 흔들자, 이단심문관은 도로 소년의 형태로 돌아왔다.

“보시다시피, 얼마든지 제 외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외형이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랑! 오직 여러분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과, 저를 아끼시는 여러분의 마음만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오오오, 라임이시여….

-위대한 강아지, 저희 종족을 인도하시는 분이시여….

음.

과연.

확실히 내가 이단심문관의 능력을 좀 얕본 것 같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 어처구니 없는 눈으로 홀로그램을 구경했다.

“쟤는 그냥 어느 세계에나 툭 던져서 떨궈놓아도 교단 하나 만들 놈이네요….”

“응. 선천적으로 타고났어, 선천적으로…… 선천적으로 교주에 재능이 있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닐까? 뭐랄까, 그런 선천성이 허락된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실수라고 생각해.”

“……이단심문관은 바깥세상에서 몰려든 갖가지 종교들, 수많은 교파들, 별의별 이단들을 다 만나보았다. 다 만나서 처리했고, 처리되지 않은 신도들은 관리 아래 놓았지. 종교라는 영역에서 이단심문관을 이기기란 가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었다.

-시끄럽군.

찰싹!

음공(音功)을 머금은 채찍질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밀림에 우거진 야자수 이파리들이 떨었고, 야자수 몸통의 잔껍질들이 후두둑 바람에 쓸려 날아갔다. 산와족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채찍질이 들려온 방향으로 더듬이를 돌렸다.

-화하평의회에서 방금 법안을 제출했건만, 우매한 동포들은 여즉 법안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산와족 최강.

촉수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화하평의회에 군림하는 여걸.

세임슬람은 기분이 무척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더듬이를 움찔움찔 찌푸렸다.

-신들에 대해 말하려면 반드시 내게 결투를 걸어 1번의 칼질은 막을 것. 그것이 법이다. 명쾌하고, 명료하며, 명백하지. 이리도 법이 명징하건만 너희들이 다 개처럼 짖어대는 이유는, 라임, 본인이 계도기간을 두는 배려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인가?

-.......

-본래라면 법을 어긴 것들을 모조리 참하여도 무방하나.

밀림 속 공기가 순식간에 음습해졌다.

-사안의 특이성을 고려하여 이번 한 번은 봐준다.

-푸르흐으으..'

-라이무우….

밀림 이곳저곳에서 한숨이 쉬어나왔다. 세임슬람이 얼마나 엄격한 의장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특히 그녀와 동류인 산와족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세임슬람은 자기 종족한테 더 엄하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라임.

사위가 고요해지자, 세임슬람은 더듬이를 들어 이단심문관을 올려봤다.

-이단심문관이라 했나.

“예! 그렇습니다!”

-먼저 묻지. 그것이 소위 위대한 라임의 진정한 이름인가?

“진정한 이름이냐고 묻는 거면, 흐으으음. 좀 대답하기 어렵군요.”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저에겐 저의 인생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고, 저의 출생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단심문관]이란 건 전자지요. 요컨대 당신에게 있어 [화하평의회 의장]이라는 직함과 비슷합니다! 저의 위치를 드러내고, 입장을 밝히며, 의무와 능력을 보여줍니다.”

-나는 세임슬람이다.

세임슬람이 무표정하게 이단심문관을 올려봤다.

-세임슬람.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화하평의회 의장일 수도 있고, 의장을 그만둘 수도 있으며, 의장이 되기 전까지의 인생도 물론 가지고 있고, 의장이 아니게 된 다음 인생을 개척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네 어절. 세임슬람. 오직 그것만이 나의 이름이다.

"......."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시간이 흘렀다.

아직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정오였다. 정오의 햇빛은 야자수 나뭇잎에 이리 튕기고 저리 막혀서, 지상에는 프랙탈처럼 쪼개진 그늘 들을 흩뿌렸다. 세임슬람은 반쪽으로 조각난 그늘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이단심문관 역시, 두세 조각으로 쪼개진 그늘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밤볼리나.”

-밤볼리나?

“예."

이단심문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인형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입장에선 이계어죠. 쿠크라(KyKna), 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똑같은 뜻이니까요. 하지만 되도록 밤볼리나라고 저를 불러주시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그건 왜인가?

“저의 한 명뿐인 주인님이 저를 가끔 부르는 이름이거든요!”

-.......

“굳이 저를 본명으로 불러야겠다면 쿠크라, 라고 불러주시길.”

-알겠다. 쿠크라여.

대기실.

일련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동료들은 말없이 내 눈치를 살폈다.

"......."

"......."

내가 이단심문관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단심문관 본인의 입을 통해 알음알음 퍼졌다.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 계약을 맺었는지에 대해서도, 흑룡주나 성기사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겠지.

오직 나한테만.

이단심문관이 충성을 맹세한 나만이 알게 된 본명을, 이단심문관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말해버렸다. 알려버렸다.

“이제 밤볼리나도 슬슬 깨달았겠죠."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저 자리가 단순히 교주와 신도의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내가 이단심문관의 본명을 알아내기 위해선 많은 조건이 필요했다. 수많은 난관을 뛰어넘어, 내 자격과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당신보다 유능하다는 것. 내가 당신을 훨씬 더 잘 이용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조건들] 없이도, 자기 자신을 밝혀야만 하는 상대가 있다.

“저긴, 굳이 비유하자면 부모와 자식 간의 면담 자리예요.”

자식.

딸.

아들.

"제아무리 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길드의 수장으로 있어도, 이단심문관은, 자기 자식들 앞에서만은 [만신전장]이라고 직함을 밝힐 수 없어요. 서열 4위? 그런 업적도 자랑할 수 없지요.”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 함께 시간을 보내어, 부모는 늙어지고 자식은 장성하여, 서로 같은 사회를 살아갈 시기에 이른다면--- 그러면 [만신전장]이라거나 [서열 4위]라거나 하는 직함의 무게를 이해할 테고, 존경할 테고, 이해와 존경 사이에 우애가 싹틀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밤볼리나가 말한 대로, 쟤는 지금 [처음]으로 산와족들과 대면하는 거니까요.”

부모와 자식이 마주하는 첫 자리.

그곳에서는 이단심문관도, 만신전주도 아닌, 오직 본명으로만. 자기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이용해먹을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

홀로그램 너머에서 이단심문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그 미소를 휘감은 공기가 어딘지 싸늘했다. 만인의 교주이기 위할 적에는 그토록 따뜻하고 환하며 상냥했던 웃음이, 이제는 단지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웃음으로 변했다.

그 상대방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식]이나 다름없는 산와족들인데도 불구하고.

-라이무.

세임슬람은 그런 신-천사-아비의 웃음을 무표정하게 올려보았다.

-우리 산와족은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쓸모있는 것뿐. 쓸모있는 자들만 살아남아야 하고, 쓸모없는 것들은 저절로 도태되도록 무시해야 한다.

세임슬람은 자신의 하나 남은 촉수를 들어 훌렁거렸다.

-우리는 쓸모있는 것이 되기 위해 평생 노력한다. 휴식은 일을 위한 준비단계. 잠은 일상을 위한 휴식단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신을 단련하고, 밤이 되면 업무를 끝마치고 돌아온다. 그 와중에 자기가 얼마나 쓸모를 보였는지, 혹시나 태만하진 않았는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점검한다.

세임슬람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은, 숱한 야자수들의 그늘에 가려져 어두워진 땅바닥으로 기어들었다. 라임. 그늘에 점액을 흘리며 들러붙은 산와족들이 더듬이를 끄덕이며 세임슬람의 말에 동의했다. 라임.

-쓸모없는 것들은 싹수부터 누렇다. 그런 것들에겐 청석(靑石)이나 물려주고, 저들끼리 퇴폐한 땅굴 속에서 썩어가라고 내버려둔다.

청석은 시퍼렇게 빛나는 돌로, 산와족들이 주로 먹는 약. 중독성이 강해 산와족들 사이에서도 꺼려지는 돌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주변 산와족들은 다시금 더듬이를 끄덕였다.

라임.

어두운 숲속에서 울리는 뻐꾸기 소리처럼, 산와족들이 그늘에서 지저귀었다.

-죽일 필요? 없다. 오히려 될 수 있는 한 살려둔다. 굶어죽어도 상관없으니 제발 청석만은 내어달라고 절규하는 놈들을 보면, 우리 [정상적인] 산와족들은, 아, 우리에게 아직 쓸모가 있구나. 우리는 아직 쓸모있는 놈들이구나, 안심할 수 있다.

라임.

-인생 실패자들에게도 딱히 나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청석이 좋아서 자기 인생을 망친 자들 아닌가. 인생보다 청석이 더 좋다는데, 그럼 우린 그들에게 인생 이상의 선물을 매번 선사하는 셈이다. 라임. 먹어라. 더 먹어라. 마구 먹어라.

라임. 라임.

-그것들은 떨거지이지만, 떨거지로서 [유용하다]. 우리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해주니 말이다. 라임. 우리는 위대한 종족이다. 우리는 여섯 종족을 촉수 아래 굴복시켜서, 위대한 동굴들을 지어 그곳에서 군림한 종족이다. 비록 노예들의 저열한 칼날 아래 천년제국이 무너지고 말았지만, 우리 마음속, 우리의 심장엔 여전히 제국이 건재하여, 오늘도 한 명의 제국인으로서 [쓸모있는]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라임.

-……이것이.

라임.

-이것이 모두, 당신한테서 배운 것들이다.

라임.

"......."

-당신이 우리를 가르쳤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이 쓸모있고 무엇이 쓸모없는지 말했다. 어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성하고 난 뒤에는 촉수들을 움직여 행동에 옮겼다. 당신이 우리에게 긍지를 가지라 말해서 우리는 긍지를 가졌고, 당신이 인도하여서 우리는 제국을 일구었으며, 당신의 말에 따라 우리는 만들어졌다.

라임.

-당신이 우리를 낳았다.

"......."

-우리가 느끼는 것.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군가를 경멸하는 방식. 기쁨을 느끼는 방법. 긍지로 여기는 것. 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느끼는 일. 모두, 당신이 가르쳤고 당신한테서 유전되었다.

"......."

-그러니, 쿠크라. 그대가 설령 우리의 몸을 낳지 않았을지언정 우리의 정신을, 우리의 감각을, 우리의 삶을 낳은 것이다. 그대는 우리 모두의 부모다. 심지어 우리의 말을 보아라. 태초에 그대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라임]이라 칭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분이 좋을 때도 [라임], 기분이 딱딱할 때도 [라이무]라 한다. 알겠는가? 당신의 이름이 우리의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마저 결정한 거다.

라임, 라임.

라이무.

라임.

-그런데.

세임슬람이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이 머저리 지정족들이랑 어울려 지내다보니….

살색이 붉은 아수라들이 팔짱을 낀 채,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세임슬람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 진지한 모습이 재밌었던 걸까.

세임슬람은 푸르픕, 비웃었다.

-내가, 우리 종족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알겠더군.

"......."

-사람은 쓸모가 있다가도 없을 수 있다.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지정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라 칭송받는 우부르카는, 선천적으로 백색증을 타고 나 태양 아래를 걷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전사로서 낙제였겠지. 하지만 그는 백색증을 되려 극복해야 할 난관으로 삼아, 극복했고, 자기 자신의 삶을 극복의 연속으로 일구어냈다.

세임슬람이 중얼거렸다.

-만일 우리 종족으로 태어났다면 어린 시절부터 청석에 맛들려 찌든 땅구멍에서나 살았겠지. 그리고 우리의 비웃음과 비아냥을 받아들이는 정도의 [쓸모]로 인생을 다했을 것이다.

"......."

-쿠크라여.

세임슬람은 무표정하게 이단심문관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아버지여.

“예."

어느덧 이단심문관도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미소를 짓지 않는 부모를 향하여, 노련한 산와족의 자식은 물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싸이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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