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74화 (274/400)

274화.  < 검객. (1) >

성기사는 34층에서 기권할 때 말했다.

『정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면 나로 해라.』

『괜찮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만, 나는 굳이 새기족이 대륙의 패권을 쥐길 바라지 않는다. 막고 살만하면 족하다.』

성기사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고, 연기를 한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성기사는 백작에게 [김공자 시험 계획]을 듣고 찬동했을 테지만, 내가 의심스러워서 시험에 참여했다기보다, 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시험에 참가했을 거다.

『뒤를 맡긴다. 공자여.』

단지 진실을 전부 말하지만 않았을 뿐.

성기사.

파트리시아는 거의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성기사는 품에 안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컨트롤하느냐에 달렸지.”

“컨트롤이라니요?”

“지정족이 요정족을 차별하지 않을 리 없다. 갈등은 반드시 벌어진다. 그리고 한 번 봉합한다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김공자. 네가 갈등의 상처를 꿰매도 해가 지나면 다시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성기사는 피식 웃었다.

“네가 좀 좌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

“설마 요정족에게 새로운 예술을 전래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혈화극이라니! 안 그런가, 백작. 너도 우리도 그런 샛길은 생각해보지 못한 거다!”

성기사의 손길이 살짝 격렬해졌다. 쓰다듬 신공을 내려받으며 백작 고양이는 마아, 마아, 울었다.

“냐. 요, 요정족을 혈화극의 중흥자로 간택한 건 굉장히 좋은 수였네. 혈화극은 무대 예술의 일종이지만 평범한 공연이 아니지. 그렇다고 오러를 쓴다 하여 무술도 아닐세. 예술이자 무술. 무술이자 예술. 말 그대로 무예(武藝)로구먼. ……그런데 부단장, 손길이 좀, 부담스럽네만……."

“사람은 모든 것을 차별하고 경멸한다! 그 차별과 경멸을 봉합하기란 불가능하다!”

쓰담쓰담.

백작의 하소연 따위는 들리지 않는 건지 성기사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유이하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멸을 관두는 지점이 두 곳 있다. 바로 강함과 아름다움이다. 물리적인 강함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깝치지 못하게 하며, 심미적인 아름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을 열게 하지!”

“부, 부단장……? 이제 쓰다듬는 건 그만……."

“혈화극은 양쪽 모두를 겸비했다! 훌륭해. 고강한 오러를 흩뿌리며 유려한 춤을 추는 요정을, 어떤 지정족이 깔보겠는가! 아아. 요정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지정족들이 [이종족]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너그러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터다! 완전히 말이다!”

“미야아아아…!”

음.

성기사가 엄청 흥분하면서 날 칭찬하는 건 알겠는데, 실시간으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가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집중해서 들어주기가 좀 난감했다.

잠깐. 설마 백작이 고양이로 변신한 채 돌아다니고, 상련 길드원들한테 고양이 귀를 의무적으로 착용시킨 게, 백작 본인의 취향이 아니라 성기사의 취향이었던 건가?

위험한 상상이 든다. 아무렴 그건 아니겠지. 설령 맞다고 해도 나는 친구의 프라이버시를 기필코 엄수해줄 것이다….

“……얘기 안 듣고 또 이상한 거나 상상하고 있구나. 당신.”

슬슬 흑룡주가 내 표정 읽는 스킬로 만렙을 찍어가는군.

“그야 뭐. 제가 잘난 놈은 맞지만 혈화극은 원래 지정족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인걸요. 저는 원래 아이들이 지니고 있던 끼가 활짝 피도록 좀 도와줬을 뿐입니다.”

“들었는가! 백작!”

성기사는 더 가열차게 흥분했다.

“나는 지금 [거짓말 탐지기]를 켜두고 있다! 저 발언이 한 점의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실이란 말이다. 심지어 [제가 잘난 놈은 맞지만] 이라고 말할 때조차 [거짓말 탐지기]는 울리지 않았다. 놀랍지 않은가! 백작, 네가 입을 열어서 말하면 10초 중에서 8초 동안 탐지기가 시끄럽게 삑삑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다!”

“므야아, 미야아아아…!”

“그런가. 백작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가. 잘 되었군! 더 시험해볼 것도 없다. 김공자. 너는 백작의 시험을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려우면서도 제일 효과적인 방법으로 난제를 해결했다. 네가 우리의 리더가 되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따르마.”

리더.

“전 물론 찬성입니다!”

이단심문관이 뒤를 이었다.

“여러분 중에 모르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미 32층이 클리어된 직후 사왕한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여러분보다 조금 더 빨랐다고 볼 수 있겠군요!”

"......충성을 바친다 만다랑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 응. 쟤한테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겠구나.”

흑룡주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찬성이야.”

“……아나스타샤.”

“당신한테 리더라는 자리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알아.”

밤하늘의 색을 품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해. 내가 아니고, 성기사도 아니고, 이단심문관이나 백작도 아니라, 모두 따로 노는 길드장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김공자. 당신이 필요해.”

"......."

“그리고 당신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흑룡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에 납득하고 있음을 무의식 중에 드러낸 것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일을 떠올려서 지금의 얘기와 연결시킨 것일까.

의문의 해답은 바로 흑룡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서로 어울린 지 제법 오래됐지?”

“……그렇죠.”

“우크라이나랑 관련된 농담을 당신한테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어.”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

"우크라이나. 내 고향 말이야.”

"아뇨. 그건 당연히 알고 있는데…… 농담이요? 뭔 소리입니까?”

"나 꽤 예쁘지 않아?”

"......."

아나스타샤가 감기에 걸렸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존경스러운 친구를 살펴봤지만, 이 친구는 그냥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하게 대답을 요구할 뿐이었다.

“나 예쁘잖니.”

“미, 미인인 건 확실하죠. 잡지에서 괜히 이단심문관이랑 투톱으로 표지 장식하는 게 아닌데요.”

“그런데 왜 농담을 한 번도 안 해? 우크라이나 출신이라서 그런지 미인이시네요, 라고.”

뭔 소리여?

그냥 감기가 아니라 독감 레벨인데?

거울을 6개인가 7개인가 소환해서 싸우다 보니 자신의 외모에 취해버린 건가? 스킬 설명문에서 부작용을 설명하는 부분에 [ ※단, 자신의 외모에 다소 중독됩니다]라는 문장이라도 적혀 있나?

“……그래, 맞아. 바로 그 표정이야. ……사람을 좀 바보 취급하는 거 같아서 열받는 표정이긴 한데, 아무튼 당신이란 인간의 사고방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지.”

“저기. 여전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안 잡히는데요.”

“내가 살면서 300번은 넘게 들어본 농담이란다. 공산주의자냐는 질문도 200번은 들어봤고, 나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도 50번은 들었지. 내전에서 어디 편을 들었냐는 질문도 엄청, 엄청 많이 받았고.”

“그, 그랬어요?”

"응."

흑룡주는 고개를 돌려 성기사를 쳐다봤다.

성기사 역시 한 차례 끄덕, 턱을 움직였다.

“김공자가 내게 베네수엘라와 관련해서 농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 자신도 가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미인 농담이나 석유 농담을 쓴다만, 김공자의 입으로 들어본 기억은 없군.”

어어.

……그냥 잘 모를 뿐인데?

“저도 딱히 없군요!”

이단심문관이 웃었다.

“애당초 제 과거 시절을 얘기해도 듣기만 할 뿐, 사왕이 직접 나서서 뭔가를 더 캐물어본 경우가 없습니다! 아핫. 신기한 일이지요. 궁금해서라도 더 물어보는 게 보통일 텐데 말입니다!”

“카, 카레 농담도 들어본 적이 없구먼.”

성기사의 공격을 견뎌내며 고양이 백작이 간신히 말했다.

“우리가 무슨 종교를 믿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무교인지 아닌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는가?”

“어….”

“머릿속으로 생각이라도 해보았나?”

안 했다.

“마아.”

백작이 웃었다.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군. 전혀.”

없다.

“자네의 무관심이 우리는 편안하네.”

"......."

“우리라는 인간 자체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오히려 매우 열정적으로 알려 들지. 자네는 우리가 했던 말, 했던 행동, 지절렀던 과오를 거의 열성적이다시피 알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자네는 우리를 좋아하고 있다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네의 관심사는 퍽 한정적이란 말일세?”

"......."

“흑룡주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네를 선인이라 평가하네만.”

탓.

마침내 백작이 성기사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백작은 허공에서 낙하할 무렵엔 고양이였지만, 땅을 짚었을 때는 이미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색 사리가 망토처럼 한 차례 너울거렸다. 펄럭! 허공과 땅 사이의 간격에 있을 백작의 그림자를 사리가 가려주었다.

“나는 자네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이 없다네.”

천천히 사리가 가라앉았다.

그곳에서 백작은 교묘한 미소를 지은 채 털부채를 쥐고 있었다.

“자네의 그 성격은 단순히 남들한테 미움을 받기 싫어하는 심리의 발로일 수 있어. 마음의 깊은 곳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어쩌면 우리한테 대하는 태도가 모두 아양이고 아부일지도 모르지.”

"......."

“그래도 상관없네. 내가 따지는 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디서 출발했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에 도착했느냐일세. 자네가 종착역으로 삼은 곳은 우리에게 참 편안해.”

너무 과대평가 아닐까.

나는 물론 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렇지만 문득 걱정됐다. 내 소원이 너무나 성공해버린 나머지 그만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들에게 호감을 얻어버린 것 아닐까? 내가 이들의 기대, 동료들의 믿음, 친구들의 신뢰에 언제나 항상 보답할 수 있을까? 내 성공은 너무 지나쳤던 것 아닌가?

실망시키지 않을까.

“니샤.”

"......."

“그게 내 본명일세. 성기사가 무심코 내 본명을 부르던 걸, 자네는 분명히 들었을 것이네.”

그렇다.

나는 백작의 본명을 들어서 알고 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와 맞서 싸울 때 틀림없이 성기사는 백작의 이름을 외쳤다. 비록 백작이 나에게 이름을 직접 알려주진 않았지만, 내 머리의 한켠엔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절대로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군. 아니, 내 앞에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시늉이나 암시조차 드러낸 적 없지.”

“그건 당연히……."

“당연한 예의를 당연히 갖추었을 뿐이라고, 자네는 지금 생각하고 있을 것일세.”

백작이 부채를 부쳤다.

“그게 바로 내가, 우리가, 자네를 리더로 옹립하려는 이유라네.”

"......."

“우리에게 당연한 존재가 되어주게나. 김공자.”

백작이 빙그레 웃은 순간.

[퀘스트 진행.]

[순인종의 투표가 시작합니다.]

나는 검성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왔던 기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검성은 다만 주름살 잡힌 미소를 은은하게 지은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30분이 지나도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투표를 시작하라고 일러두었다. 아해들이 내 말에 잘 따라주었군.”

“어르신.”

“나는 이미 백작의 의견에 찬성했다. 공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되도록 참여하지 않으면서, 과연 자네들이 [정말로 협조하여 스테이지들을 나아갈 수 있는가] 지켜봤다.”

[개표 완료.]

[2번 득표율: 23.81 퍼센트.]

[1번 득표율: 76.19퍼센트.]

“나뿐만 아니라,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를 통해 자네의 행보를 직접 관람한 종족들 전원이 자네를 지켜봤다.”

"......."

“책임이란 막중하지. 나 역시 한때 책임을 지고 탑의 공략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그리고 숙청의 책임을 한 조각이라도 지기 위해,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는 탑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검성이 허허 웃었다.

“말하자면 자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실패자]로군.”

"......."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이 [최악의 경우]이고, 자네가 처절히 실패한 말로이며, 자네가 걱정하고 있는 우려와 염려가 현실로 드러난 실례일세. 자아. 이제 말해보게, 사왕.”

노신사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 실패작이 정말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해 보이는가?”

“……아니요.”

나는 말했다.

“어르신은…… 끔찍한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적어도, 저에게 칼렌베리 님은.”

“다행이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의 실패도 그리 끔찍하지 않을 걸세.”

"......."

“나 같은 늙은이가 건네어도 믿음직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실패를 너무 끔찍하게 여기지 말게. 어쩌면 자네에게도 나처럼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현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스테이지 클리어.]

[46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본명, 밤볼리나.

담당, 산와족.

득표율, 77.50%. 스테이지 클리어.

백작(伯爵).

본명, 니샤.

담당, 요정족.

득표율, 88.40%.

스테이지 클리어.

성기사(聖驗士).

본명, 파트리시아.

담당, 새기족.

득표율, 98.68%.

스테이지 클리어.

흑룡주(黑龍主).

본명, 아나스타샤.

담당, 흡혈종, 몽마족.

흡혈종의 득표율, 97.55%.

몽마족의 득표율, 100%.

스테이지 클리어.

검성(劍星).

본명, 마르쿠스 칼렌베리.

담당, 순인종.

득표율, 76.19%.

스테이지 클리어.

사왕.

김공자.

지정족.

100%.

스테이지 클리어.

“---어이, 어이.”

그리고.

“본인 말고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니. 이거 정말이냐구.”

마지막 개표자.

“다들 너무 착해빠져서 탈이라고. 어? 사람관계라는 게 야아, 너 좋구나, 야아, 나도 좋다, 이런 식으로 끝나면 정신상담사들은 다 실직하고 거리를 떠돌 판이라고. 응? 감정이란 건 말이다. 입으로 풀리지 않아서 감정이지.”

밀림의 그늘을 즈려밟으며 외눈의 검객은 걸어왔다.

“여어.”

검객은 여어, 라고 인삿말을 장식했다.

“네 말대로 폐관수련을 거창하게 뛰었다. 지금의 난 무협지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고. 자고로 무협지 주인공이라면 그 뭐냐, 어? 입으로 수긍하기 전에 먼저 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그게 강호의 도리거든. 우리 애들도 다시 한 번 승부를 보기 전에는 투표고 나발이고 알 거 없수다 그러는데 뭐 어쩌겠냐.”

그 검객은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검성을 제외하면 나한테 가장 처음으로 본명을 알려준 인물이었다.

“칼 뽑아라. 김공자.”

독사(毒能).

본명, 랴오판.

담당, 귀인족.

“다 됐고. 한 판 뜨자고.”

득표율.

미정.

[퀘스트 진행.]

[귀인족의 투표가 시작합니다.]

투표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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