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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자살헌터-275화 (275/400)

275화.  < 검객. (2) >

2.

안 듣고 있군.

몰입인가?

이놈 난놈일세. 마음에 들어.

야, 내 이름은 랴오판이다.

어차피 안 들리겠지만 상관없어.

아까 알현실에서 네놈이 내 목숨을 살려줬지. 천무문주씩이나 되어서 은혜를 묵혀버려서야 쓰겠냐?

넌 정면만 보고 달려라.

왼쪽은 내가 맡아주마.

어마어마한 특혜라고, 이거.

내 오른쪽에 선 놈이 죽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거든.

가라, 신성新星.

3.

“와라. 사왕.”

"......."

나는 독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한테.’

독사는 외눈을 지녔다. 시야가 빈 한쪽 자리에 안대를 찼다.

외눈을 가진 사람과 눈길을 마주쳐본 적 있는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겠지. 나 역시, 의도하지 않았으되 여태껏 인생을 살아오며 오직 두 눈을 지닌 인간들과 마주치는 것에만 익숙해졌으니 말이다. 나의 눈동자. 나의 시선. 내 사고의 리듬은 양안(雨眼)에 맞추어져 있다.

외눈을 마주할 때는 다르다.

상대방을 보고 있을 때, 봐야만 할 때, 내 시선은 평소보다 반폭 줄어든다. 내 눈은 평상시 익숙해진 넓이를 잃고 좁은 외길로 모아진다. 보는 것이 좁아지는 만큼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진 틈을 타서 잡상이 번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 천무문주와 눈을 마주치고 있음에도 내가 머리 한켠으로 옛일을 떠올리는 까닭은.

‘독사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그건 [가을비의 마왕]이 불러들인 마물들과 싸울 적의 일.

나는 처음으로 검에 흠뻑 빠져 전장을 달렸다. 그때 독사는 나를 보조해주었다. 내가 되도록 오래동안 무아지경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왔다. 고마운 배려 아닌가.

‘기억을 못해.’

나는 [가을비의 마왕]에게 수백 번 죽었다. 독사가 나를 도와준 일은 수백 번의 죽음 중 한 번 벌어졌던 일이다. 내 죽음에 시간은 파묻히고 가려져, 독사가 그때 그 일을 떠올려낼 리는 결코 없다.

단순히 불가능하므로.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천천히.

검집에서 성검을 뽑았다.

칼날을 뽑기 전.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잡은 순간부터 이미 나는 오러를 끌어올렸다.

내 몸속에 흐르는 핏줄에 또 다른 붉은색이 겹쳐 흘렀다.

오러가 혈맥을 타고 격하게 흐를수록, 심장을 휘감아 가쁘게 소용돌이칠수록, 내 사고의 속도는 빨라졌고 내 시야의 유속은 느려졌다.

검이 검집에서 뽑혀나오는 찰나 동안 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나를 질투한다고 말했다.’

왜.

왜 내가 돌보는 아이들은.

지금도, 그때도, 사왕. 왜. 어째서 내가 보살피는 아이들은, 네가 돌보는 녀석들처럼.

‘비록 당신은 내가 죽어나간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왜 너만 다른 녀석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냐.

너는 천마에게 최고의 순간을 마련해주었다. 선물해주었다. 천마는, 죽음의 고통에 갉아먹혔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건네준 선물들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왜.

‘내가 깨달은 순간마다 내 옆에 당신이 자리했다.’

왜 맹주는 그러지 못했던 거냐.

내 잘못이냐.

사왕.

나는 왜.

‘내가 당신에게 질투가 되어버린 것처럼, 당신 역시 내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날카로운 쇳소리.

성스러운 여신이 의태한 검이 내 칼집에서 완연히 뽑혀나왔다.

‘그걸 당신한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이 나한테 무의미하지 않음을.

내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의 풍경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음을 어떻게 해야 알려줄 수 있을까?

알려줄 수 있을까.

“오오. 좋아. 바로 그거지. 말귀를 알아듣는구만.”

말로?

“이래 봬도 말이지. 내가 말이야. 폐관수련을 하면서 남궁운 할아범의 가르침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그 할아범이 뭔가를 가르치긴 가르쳐줬었는데 야아, 평소엔 안 떠오르다가 혼자서 수련하다 보니 새록새록 떠오르대? 역시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법인가 봐.”

한뼘의 혓바닥과 반폭의 눈으로?

“폐관을 추천해줘서 고맙다. 짜식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나저나…… 왜 아까부터 말이 없냐?”

어쩌면, 아무런 말도.

“혹시 내 기운이 승천한 걸 알아채고 긴장했냐? 이거 서운하네. 난 수십 년 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다른 놈들한테는 인사도 안 주고 있는데. 싸울 땐 싸우더라도 서로 말 몇 마디는 나눠야 하잖아.”

말로 당신을 이기는 것은 쉽겠지.

검으로 당신을 꺾는 것 또한, 아마 어렵지 않다.

“응? 안 그러냐?”

수십 년을 폐관하며 수련했다지만 당신이 지금 밟고 있는 경지가 내 눈 아래에 밟힌다.

당신이 취한 자세. 당신이 품고 있는 오러의 색을 보아 어림으로 짐작된다.

그것밖에 못 했느냐고 말로 상처를 입히긴 간단하고, 그것밖에 못 했노라고 검으로 증명하기도 수월한 것이다.

“……? 야, 사왕?”

상처 입히고 이기는 일은 언제나 쉬웠다.

어려운 것은 항상 당신의 마음을 얻는 길이었다.

“……진짜 아무 말도 안 할 셈이냐?”

스승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돌이켜 보면, 스승님이 가르쳐준 것은 두어 가지 남짓이다.

상처에 마음을 입히는 법.

칼소리에 목소리를 겹치는 법.

"......."

인간이 혀로 내뱉는 말은 소음에 불과할 것인데 그 소음이 방향을 가지고 뜻을 가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능히 상처를 낸다.

내가 휘두르는 칼 역시 한낱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 덩어리가 방향을 가지고 뜻을 가지면 역시 베지 못하는 마음을 베어버릴 수 있다.

스승님이 한 자락의 쇠로 베고자 한 것은 마음 중에서도 고집멸도(苦集減道)이며, 내가 베고 싶은 것은 당신의 고집이고 집착이고 멸시이며 도착이다

“……과연.”

벨 수 있을까.

“말이 필요없다 이거군.”

벤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말했다. 너보고 오라고 하면 안 되지. 도전하는 놈이 도전을 받는 놈한테 먼저 달려드는 게 예의인데.”

한 획의 물질과 한 줄의 사물에 불과한 칼질로.

오러를 핏줄에 흘리고 심장에 둘러서, 칼날까지 뻗혀, 내가 삶을 거닌 유속, 내가 세상에서 건져낸 체온, 이곳에 내 피가 흐르고 있으며 내 심장이 살아 있음을 당신한테 건넨다.

건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폐閉하여 수십 년을 견딘 검객劍客이므로.

“간다.”

반짝아.

[반짝이가 당신의 부름에 반응합니다.]

휘야.

[…….]

[수호의 여신이 당신의 호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상(偶像).

[.......]

연민(懷惑).

[.......]

기원(祈願).

[수호의 여신이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희생(樣姓).

[예, 사왕.]

구원(救援).

[명을 받듭니다.]

내가 차례차례 검들을 호명하여 그 이름이 세 번째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휘야는 내 의중을 읽어 이 숲속에 드러냈다.

휘야가 빛을 발했다.

빛은 강렬했다. 빛이 더해지고 퍼지는 순간이, 내 눈에는 한 장 한 장 이어지는 사진의 나열처럼 느릿하게 비추었다.

사방으로 빛이 퍼졌다. 칼날의 빛이 허공에서 환해질수록, 검신(劍身)이 땅에 드리운 그림자 역시 짙어졌다. 마치 사방의 빛에 압박을 받아 포위된 듯, 땅에 새겨진 칼 그림자는 점점 더 좁혀졌다.

좁아지고 더 어두워졌다.

더.

조금 더.

[구원검이 당신의 명을 받듭니다.]

마침내 나의 손바닥이 쥔 칼, 땅바닥에 진 칼 그림자, 두 개의 길이가 똑같아졌다.

[희생검이 당신의 명을 받듭니다.]

둘 중에 어느 쪽도 실물이 아니었고 허물도 아니었다.

[기원검이 당신의 명을 받듭니다.]

꿈틀.

강렬한 빛에도 더 이상 졸아들지 않은 칼 그림자가 문득, 살아 있는 생명처럼 움직였다.

[연민검이 당신의 명을 받듭니다.]

내게 달려들 태세를 취하던 독사가 멈칫했다.

"......!"

그는 외눈을 치켜떴다.

말 그대로 찰나의 시간 동안 칼 그림자는 꿈틀, 꿈틀, 움직이더니 이윽고 분열되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의 칼이 드리운 그늘이 네 갈래로 나뉘었다. 칼 그림자들은 각각 동, 서, 남, 북, 정방(正方)으로 흩어졌다.

흩어졌다고는 하나 낱낱이 흩뿌려진 것은 아니었다.

칼 그림자들은 모두 나를 호위하듯 엄중히 둘러쌌다.

마치 시간을 감는 시침, 분침, 초침처럼 칼 그림자들은 천천히 돌았고, 나는 그 한복판에 서서 우상검을 들었다.

[수호의 여신이 현현합니다.]

그리고 칼끝으로 독사를 겨누었다.

"아이,"

독사가 멈칫하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말려드는 자국에 따라 숨결이 따라 접히는 소리, 등 뒤로 배후령이 눈을 한 차례 크게 깜빡이는 소리, 우리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는 검성, 흑룡주, 성기사가 양안을 치켜뜨고, 에스델이 눈을 움직이는 소리가, 내 귀에는 똑똑히 울렸다.

“어이---."

사르륵.

네 갈래의 칼 그림자에서 네 자루의 검이 부상했다.

“정말이냐고!”

그림자에서 떠오른 검들은 땅을 뜨고 나서도 그늘의 색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어두웠다. 뚜렷한 윤곽 대신 쉼 없이 꿈틀거리는 결을 지녔다. 생동했다. 맥박쳤다. 울렁였다. 으르렁거렸다. 설 익은 짐승처럼.

살아 있었다.

“이건, 반칙 아니냐고……!”

나의 몸을 숙주로 두고 오러가 뛰놀듯, 다시 나의 오러를 살육으로 삼아 [수호의 여신]의 분신들은 현현한 것이다.

"칼 한 자루만 휘둘러도 이길까 말까인데! 이젠 다섯 자루를 쓰는 거냐고!”

단순히 오러를 검기라 칭한다면 이것에 가까운 말은 검강이리라.

내가 고개를 돌리면 네 자루의 칼이 따라 움직였다. 내가 칼끝을 겨누면 네 갈래의 혓바닥도 따라 신음했다.

일사불란.

나의 구원, 나의 희생, 나의 기원, 나의 연민. 내가 검을 잡은 이후로 끊임없이 모아오고 수집하고 수확해온 나의 나락들은, 내가 손에 쥔 우상에 따라 빈틈없이 호흡을 맞추었다.

“오냐! 좋다!”

이것이 지금의 내가 딛고 있는 경지다.

내가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경치다.

아직, 스승님처럼 그림자마저 퇴색시킬 수는 없지만.

“네가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나를 꺾어버릴 속셈이라면!”

겨울의 끝자락을 베지 못할지언정 당신의 심장에 접혀 있는 한 자락의 마음 정도는 벨 수 있다.

“나는 기필코! 네놈 입에서 한마디 말이라도 끌어내마!”

독사가 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가 내지르는 검로를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언제였는가.

아.

설원에서 무림맹주 남궁운이 스승님과 맞서 싸울 적에 보인 투로를 닮은 듯하다. 그래. 몸이 무너져 내리고 살이 썩어가고 뼈가 녹아 가는 가운데, 무림맹주가 내공으로 온몸의 근육을 조종하여, 인형이 되어버린 관절로 펼쳐낸 절기를 닮은 듯도 하다.

“사왕!"

예전의 나라면 못 알아보지 않았을까.

옛날에는 그랬다. 제아무리 절정의 고수가 화려한 무술을 뽐낸들 내 까막눈은 거기에 담긴 무예를 읽어내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 봐도 알 수 없었다.

스승님과 남궁운이 어울린 한 판의 춤조차, 989번째의 비무조차, 처음 봤을 때는 다만 익살스러운 인형놀이로 비추지 않았던가.

"------!"

지금 독사가 펼치는 무공도 꼭 그와 같은 경지였다.

나의 맹목.

예전이라면 보아도 읽을 수 없어 ■■■■으로 보였던 무언가.

아니, 무엇으로조차 여기지 않은 어떤 것. 연막. 허물. 헛것.

"......! ----, ----!"

지금은 그것이 황월파천(黃月破天)이라는 소리를 가진 손짓임을 안다.

나는 독사가 휘두른 검을 연민검으로 비껴 흘렸다. 무음. 독사가 지닌 칼과 내가 떠올린 그림자가 부딪혔으나, 서로가 충돌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독사의 칼은 내 그림자를 소리내어 베지 못했다.

"-----!!"

독사가 검을 휘둘렀다.

■■■

지왕사(地王能).

■■■

온월용(種越龍).

■■■■ ■■가 ■■ ■의 ■■처럼 ■■고 ■의 ■■처럼 ■■■■, ■■■를 ■■ ■■을 ■■■■ 전에 ■■을 ■■■ ■■■■ 하며, ■■을 ■■■ ■■ ■■를 ■■■ ■■어야 하고, ■■의 ■을 ■으로 ■■ ■을 ■■.

물어뜯는 기세가 자못 뱀의 이빨처럼 독하고 용의 허리처럼 교묘하니, 아가리를 벌려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호흡을 빼앗아 절단해야 하며, 계책을 부리기 전에 거리를 빼앗아 맞붙어야 하고, 상대의 힘을 역으로 흘려 목을 친다.

"......! -----!"

■■■■.

천무문주.

■■

독사.

■■

어이.

■■, ■■.

가라, 신성.

내 이름은 랴오판이다.

‘랴오판.’

천천히 그가 휘두르는 검을 비끼어 쳐냈고.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이기어검以氣默劍.

나는, 검을 휘둘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