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81화 (281/400)

281화.  < 마지막 투표. (2) >

2.

복사꽃이 내린다.

꽃은 차갑지 않은 눈이었다.

3.

“좋습니다.”

내가 말하며, 검을 들었다.

“시험해보지요.”

달려들었다.

휘두른다.

내가 휘두른 검이, 독사가 든 칼에 부딪친다.

쩡...!

쇳소리가 울린다.

쩡…!

쇳소리가 울린다.

쩡…!

독사의 어깨가 멈칫하더니, 팟, 응축된 근육이 일제히 펼쳐지는 소리와 함께 검로가 쪼개진다.

마치 서너 갈래의 검로가 동시에 들이닥치는 듯한 착각.

‘아니, 검로(劍路)가 아니라 검토(檢討)인가.’

오러를 끌어올려 칼의 잔상을 여럿 만들어내어, 내게 그 중 어떤 것에 응수하겠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저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검로의 변화는 전혀 다른 것이 되겠지.

그리고 그 중 어떤 변화도 내게는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천하무쌍.’

아마도 이것이 독사가 탑에 처음 들어와 얻었다는 스킬.

스승님의 세계에서 얼핏 스쳐갔던, 예상 투로를 읽는다는 그 능력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고를 필요가 없죠!”

단, 한 자루의 검이 아니었다.

독사가 좌상단으로 내리친 검격은 [연민검]이 받아친다.

“하나!"

내 허리로 파고든 검격은 [기원검]이 막는다.

“둘!"

손목을 노리는 검격은 [희생검]이 멈춰 세운다.

“셋!”

목을 향해 덤벼든 공격은 [구원검]이 비끼어 흘린다.

그로써 독사가 쏟아낸 공격들을 전부 봉쇄. 상대방의 손을 묶어버린 다음, 독사의 품속을 향해 도리어 뛰어든다.

“하앗!"

손에 쥔 [우상검]을 휘두른다.

"읏,"

독사가 뒷걸음을 친다.

거리를 벌리고 태세를 정비하려는 속셈이겠지.

미안하지만, 여유를 허락해줄 생각은 없다. 달려든다.

벤다.

"-----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독사의 입가에 스쳐가는 미소를 보았다.

“흐랴아아아압!”

까앙! 쇳소리가 울린다.

내가 휘두른 [우상검]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이다.

독사의 칼이 막은 건 아니다.

독사의 손목이---오러로 휘감은 장갑이 막아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막아낸 그대로 손을 한 바퀴 돌려, 칼날을 붙잡는다.

당긴다.

“랴오판,”

독사의 외눈이, 확, 가까워진다.

“당신 검사 아닙니까,”

“두 가지 말해주겠는데,”

나와 독사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다음 순간, 폭음에 묻힌다.

쾅……!

독사의 다른 주먹이 내 귓가를 스쳐가면서 일어난 소닉 붐이, 잡다한 소리를 모조리 집어삼킨 것이다.

- 이것도 훌륭한 검술 중 하나고,

그래서 독사의 말은 그 입술의 움직임으로만 전해졌다.

- 내가 주로 칼을 쓰는 건, 그냥 그게 그나마 나한테 어울리고 멋있으니까다.

주먹이 스쳐간 순간, 독사는 이미 다음 공격에 들어가 있었다.

붙잡은 검을 끌어당기면서, 굽힌 무릎으로 내 복부를 찍으려 한다. 만약 내가 검을 놓고 물러나면 그대로 검날째 잡고 휘둘러 십자막이로 어깨를 후려칠 심산이겠지. 그렇다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설까? 아니다. 그러면 굽힌 무릎을 펼치며 내 명치를 후려찰 것이다.

- 하긴, 그렇군요.

보인다.

느껴진다.

- 귀인 7영웅을 조종할 때도 그 많은 무기를 동시에 다뤘지요.

- 암.

독사의 의도가. 내 대응에 대한 예측이. 예측을 기반으로 세워진 다음 수단이. 그 모든 것이 떠받치고 있는 순수한 하나의 목적이.

- 대낫부터 주먹에 이르기까지, 내가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없다!

우리는 지금, ‘대화’를 하고 있다.

- 그래요.

오러가 만들어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영하며, 독사가 쓸 수 있는 카드패의 가짓수를 곁눈질로 세었다.

좀 세다가 포기했다.

- 많네요.

수십.

뒤집힌 채 발동만을 기다리는 함정까지 헤아려서 자그마치 수백.

찰나의 순간, 내 왼편과 오른편, 등 뒤, 사방과 사방의 너머로부터 독사의 의도와 살기가 느껴진다.

- 거 참.

그야말로 인해전술.

귀인 7영웅, 12익장, 72마왕, 108나한… 무엇이든간에, 그때 수많은 육신을 단 하나의 의지로 조종하여 펼쳤던 합격과는 성질부터 다르다.

단 하나의 육신으로 수많은 의지를 펼쳐낸다.

그러기에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랴오판 한 사람이면서 랴오판 한 사람이 아니었다.

- 진짜 많네요!

대장장이의 망치질 같은 주먹이 나를 노린다. 농사꾼의 낫질 같은 손날이, 정원사의 가위질 같은, 어부의 그물 같은 무수한 공격들이 나를 향해 펼쳐진다.

- 그래요, 전력을 다해보십시오.

나 또한 전력을 다해서 당신을.

아니, 당신들을 꺾을 테니.

‘가자, 휘야.’

끌어당기는 서슬에 거꾸로 뛰어들면서 나 또한 주먹을 휘두른다.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칼을 쥔 독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내 심장에 공명해다오.’

주먹이 허공을 가른 순간, 나는 염했다.

‘찢어진 여신의 구원.’

허공에 떠오른 네 자루 검 가운데 구원검이 우우웅, 진동한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그것은 일찍이 살천성이 가지고 있던 비기.

기억을 버리고, 버린 기억의 무게만큼 힘을 끌어낸다.

과거가 버려질수록 지금의 나는 죽어간다. 함부로 목숨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라비엘과 약속했기에 나는 되도록 [찢어진 여신의 구원]을 쓰려 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전력을 다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구원검.’

나는 검을 휘두른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飯死流劍.

구원검이 허공에서 격렬히 날뛴다. “크읍!” 내 오른편을 노리고 달려오던 대장장이의 주먹이 멀리 튕겨 나간다. 한 명, 두 명, 세 명, 무려 네 명의 인생이 가담하지만 [구원검]을 막아내진 못한다.

나 역시 오러의 소모가 극렬하다.

그러나.

‘방금 물리친 네 개의 공격에 대한 기억을 버린다.’

일순, 시야가 맑아진다.

심장이 뛴다. 소모된 오러가 채워진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손짓이 빨라진다.

오른편을 슬쩍 살펴보자, 사방이 포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그곳만은 훤히 비어 있다. 더 자세히 보면 네 명의 생애가 신음하며 땅을 뒹굴고 있다.

비록 어떻게 저리 되었는지 기억해낼 순 없지만, 왜 그리 되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오케이.’

나의 오른편이 뚫렸다.

‘희생검.’

그렇다면 이 다음 해야 할 일도 명확하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이식第二式.

갈사비검渴死痛劍.

내 왼편에서 희생검이 몰아친다. 신음이 흐르고 비명이 울린다. 왼쪽에서 접근해오던 공격이 차단당한 것이다.

‘지금 차단한 공격에 대한 기억을 버린다.’

나의 왼편이 뚫렸다.

‘기원검.’

보십시오.

천무문주.

제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삼식第三式.

익사만검潮死滿劍.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어떻게 제가 마천의 검을 쓰겠습니까. 비록 순간과 순간에 지나지 않다고는 하나 어떻게 기억들을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제 영혼을 긁어가며, 상처에서 바스러진 살점들을 한 점 한 점 모아, 한 획의 검으로 잇겠습니까.

‘연민검.’

저를 막겠다고 하셨습니까.

저를 자신의 업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사식第四式.

동사접검凍死接劍.

저야말로 그런 당신을 전력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력이란 건, 저의 칼에 제 삶이 얹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라비엘에게 무슨 말로 변명할지 고민합니다. 어쨌든 죽은 것은 아니므로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할순 없지요. 낱말 하나를 보여지는 의미로만 고집하는 파렴치함을 어떻게 라비엘한테 내보이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오식第五式.

독사격검毒死擊劍.

저는 배후령의 눈길이 신경 쓰입니다. 이 양반. 제가 마천진법을 개발하고 나서 부쩍 진중해졌습니다. 제게 떠드는 시간보다 저를 지켜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저를 조금 더 대등한 무인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저는 그게 기쁘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제가 펼쳐내는 검을, 지금 배후령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안 그렇습니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육식第大式.

병사유검病死流劍.

저는 스승님을 생각합니다. 스승님이 무림맹주와 벌인 결전을 떠올립니다. 그때 스승님은 진기를 부서트리면서까지 싸웠고, 스승님이 걸음하는 발자국마다 복사꽃이 피어 흘렀습니다. 스승님이 뿌린 진기와 흘린 피를 세상이 먹어 치워, 몇 잎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칠식第七式.

장사타검杖死打劍.

그 정도가 되어야 상대를 설복시킬 텐데.

그 정도는 되어야만 당신을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인데.

제가 지금 그 정도에 손끝 하나 손가락 하나라도 닿을 수 있을련지,

마천신공魔天神功.

제팔식第八式.

소사연검燒死連劍.

걱정입니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저의 사랑, 저의 우정, 저의 동경을 모조리 염려하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고민하게 했으므로.

당신은 제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왼편이 비었다.’

없다.

‘오른편이 비었어.’

걸리적거릴 게 없다.

‘후방도 텅 비었군.’

뒷덜미가 잡힐 일 또한 없다.

'즉.'

이제 남은 곳은 전방.

내 앞길일 뿐.

작, 우, 후, 삼변이 비워지고 독사의 본체로 향하는 길만이 환히 열린다.

‘간다.’

발을 내디딘다.

‘당신이 살아온 삶 전체를 뚫고서.’

일보(一步).

몰려드는 생애를 막아세우기 위해 내보냈던 검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구원, 희생, 기원, 연민, 네 자루의 검이 재빨리 모여들어, 나를 지척에서 감싸고 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을 벤다.’

이보(三步).

네 자루의 검이 스르르, 철가루처럼 흩어진다. 이기어검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오러들을 도로 거둬들인 것이다. 일순간 눈앞이 환해지며 온몸에서 피가 들끓는다.

그런 날 향해 회계사의 펜이, 야채장수의 됫박이, 술꾼의 술병이, 무수한 사람들의 수도 없는 일상들이 날아들지만.

‘좋다.’

그 모든 것을 상대할 기세로 내 발걸음이 땅을 짓밟는다.

"천무문주!”

내 입에서 목소리가 터진다.

오랜 밤이 가라앉아 숲이 드리운 그늘이 새파래지고, 이파리들이 새벽빛을 받아 서늘히 떨릴 적에, 나의 사자후는 쩌렁쩌렁 밀림을 울린다.

“독사!”

문득.

내가 디딘 발자국에, 무언가가 흐른 것 같다.

“랴오판!”

삼보(三步).

무엇인가가 흐른다는 내 느낌은 착각이 아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내가 밟은 땅에서 꽃잎이 몇 점 흐른다.

아주 잠시 내 시야의 밑변에 흩날렸을 뿐인 그것은, 스승님과 맹주처럼 밟는 자리마다 꽃줄기가 피어난 것도 아니고, 꽃들이 흐드러져 칼이 휘두르고 지나간 허공마다 향기가 문드러진 것도 아니고, 두 사람같이 칼이 오가는 반경을 한 폭의 화원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어서, 단지 독사와 나 사이에 정말로 잠깐, 하얀 꽃잎이 스친 것에 불과하지만.

마천신공魔天神功.

제구식第九式.

자결검自決劍.

사보(四步).

내 검이 한 장의 꽃잎을 가른다.

"------."

숨을 들이켜는 소리.

내 칼끝에서, 숨소리가 헐떡인다.

-.......

날에 베인 꽃잎은 소리없이 두 쪽으로 나뉜다. 하얀색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천천히 시야가 열린다. 한 쪽에서 랴오판이 찬 검은색 안대가 드러나고, 다른 한 쪽으로 랴오판의 왼눈이 드러난다.

칼날은, 랴오판의 목 옆에 멈추어 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

나의 심장.

내 명치께에, 랴오판의 주먹이 얹혀 있었으므로.

-.......

-.......

멈추는 것이 약간 늦었는지, 내 칼날이 멈춘 곳은 얕게 베여, 좁쌀만한 피가 날을 타고 붉게 방울져내린다.

멈추는 것이 약간 늦었는지, 랴오판의 주먹이 멈춘 곳은 살짝 패여,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피가 턱을 타고 붉게 방울져 내린다.

"......."

이 이상 나는 검을 휘두를 수가 없다. 그 순간 내 심장이 터져나갈 것이다.

이 이상 그는 주먹을 내지를 수가 없다. 그 순간 그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알았고, 그러므로 자연스레 멈추었다.

“아……."

“이런, 어떻게……."

“세상에.”

숲이 울렁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이 숲에서 관전자 노릇을 하는 사람은 헌터들뿐만이 아니다. 헌터들을 따라 온 종족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특히 우리 사왕가(死王家)의 가신들 전체가 숲 그늘에 가려친 채 비무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인산인수(人山人樹).

규모가 이 정도이니 숲에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숲이 이루어질 지경이다.

그렇게 만인의 시선을 내려받으며, 먼저 내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저는 검성도 이겼는데.”

숲의 한 켠이 움찔했다. 아마도 검성일 것이다.

독사도 툭 던지듯이 답했다.

“그 할아범은 나도 이겼었어. 옛날에. 예전에.”

역시나 검성이 움찔했다.

나는 웃었다.

“눈 한 쪽 잃었다면서요.”

“그게 졌다는 뜻은 아니잖아.”

“뭐야. 그럼 검성 할배 지기만 한 거예요? 전투력 측정기네, 완전히.”

“노친네잖냐.”

“뭔가 반로환동 찬스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아. 막 은발 미소년 되고 말이지? 하긴. 클리세지만 있을 법 하네.”

“아니, 그냥 젊은이나 아저씨 정도로 젊어지는 걸 생각했는데요…. 미소년이라니 대체 뭔가요…. 저 좀 막 기분 나빠지고 그러는데…."

“나만큼 기분 나쁘진 않을 것 같네만!?”

마지막 고함은 검성이 터뜨린 것이었다.

나는 웃었다. 랴오판도 웃었다. 그 웃음을 담고서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핏방울이 뚝, 바닥을 때렸다.

"윽...."

그리고 우리 둘은 동시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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