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82화 (282/400)

282화.  < 마지막 투표. (3) >

4.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뱀신님!”

여태까지 관중들은 되도록 조용히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검성이 아까 고함을 지르긴 했지만, 그거야 독사의 말마따나 노친네니까 공경해주어야 할 사항. 부외자는 조용히 물러나 있는 것이 결투의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그 결투가 막을 내린 지금, 그들이 다급하게 달려든 것이다.

“멈추어라!”

“너희야말로 게 서지 못할까!”

그리고 그런 그들은 당장 두 쪽으로 나뉘어 대치를 시작했다.

한 쪽에는 사왕가가 있었고, 그 선두에는 에스델이 섰다. 가을비의 마왕이었으며 아귀였고, 딸이 되었으며, 이제는 우리 가문의 자문사가 되어 언제든 내 잘잘못을 옆에서 조언해주게 된 가신(家臣)이었다.

다른 한 쪽에는 귀인족이 있었고, 그 선두에는 새하얀 헬멧과 전신 슈트를 뒤집어쓴 귀인족이 섰다. 기룡 대항전 마지막에 합류했던 256색 귀인 전대의 수장이었다.

“뭘 막아서는 것이냐! 좋은 나이 처먹고 색깔맞춤 까까옷이나 입고 다니는 광대 패거리가!”

“그러는 너희야말로 어디 화투 치러 가냐? 올 블랙으로 깔맞춤한 너희 따윈 우리 RGB 코드 000000 ~The Real Black- 선에서 간단히 정리되거든?”

“이명을 짓는 센스도 없는 것들이!”

“그러는 네 이명은 뭔데?”

“한 때 황야의 성녀라 불렸고, 가을비의 마왕이라 불렸으며, 아귀라 불리다가, 지금은 사왕가의 자문사라 불리는 자다!”

“어 뭐야… 진짜 좀 멋있네….”

귀인 전대 수장이 헬멧 째 뒷머리를 긁으면서 머뭇거렸지만, 에스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에스델을 멈춰 세워야 했다.

“에스델. 그만하려므나.”

“아니요, 가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곧바로 불복의 말이 날아왔다.

벌써 반항기인가 싶어 가벼운 충격 속에 고개를 수그리자니, 에스델은 잇소리를 내며 천무문주를 노려보았다.

“애시당초, 천무문주가 가주님께 한 소리는 방자하고 무례하여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지경입니다.”

"......."

“가주님께서 엇나가실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하. 주화입마에 빠져 민초와 백성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여, 인간세상에 만연한 비명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 양 만들기 위해, 삼라만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오직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인간들만 모아 다가 작은 낙원을 만든다. 그것이 천무문주. 당신이 말하는 가주님의 위험입니까.”

“오냐.”

독사는 겨우 바닥을 짚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곧 다시 그 손바닥이 쭈르륵 풀밭을 미끄러지는 바람에 진흙밭에 박았다.

“젠장….”

쪽 팔린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잠시 거칠어졌던 호흡이 차차 되돌아갔다.

그가 말했다.

“네 말대로. 난 네놈들 천마가 언제든 주화입마에 빠져, 삼라만상에 여즉 누구도 보지 못한 대학살을 펼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에스델이 이빨을 물었다.

“당신이 그걸, 가주님을 얼마나 오래동안 봐왔다고…. 가주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각오로 가문의 깃발을 내려받았는지 모르면서. 그런 우리 전원이, 모든 생과 명을 다하여 가주님을 보필하겠노라고 맹세했는데! 그런데도….”

“그런데도가 아니야.”

독사가 기침을 했다. 진흙을 뭉쳐 목에 난 상처를 막았지만, 막히지 않았다.

“그러니까다.”

“……뭐?”

“너네집 가주가 주화입마 걸려서 난동을 부리면, 너희는 절대로 못 막을 테니까.”

에스델은 주먹을 꾹 쥐었다.

“하. 저는 비록 쇄락했다고는 하나가을비의 마왕입니다. 제 눈물이 빗방울 되어 삼천을 휘두르면, 오우거, 오크, 고블린, 수많은 몬스터가 빗방울이 되어 떨어져 군세를 이룹니다. 조금 경지가 올라갔을 뿐인 칼쟁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 너희 강하지… 존나 짱 쎄지.”

독사는 쿨럭, 쿨럭, 피기침을 게워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거로 주화입마에 빠진 가주를 막을 거야?”

“예. 물론. 저의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아니야. 그게 아니지.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해봐야지. 내 말 제대로 들었어? 엉?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린 지금 아가씨의 가주. 김 공자를 얘기하고 있잖아.”

독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콜로세움 한복판에 섰다가, 지쳐서 어깨를 늘어뜨린 검노처럼.

“김공자가 누구야? 어? 우리 시대의 천마가 누군지, 한 번 봐보라고. 스승이 죽을 때도 주화입마에 안 걸렸어. 그냥 슬픔으로 받아들였어. 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 세상에 수두룩한데 하필 스승님이 죽어야 하냐며, 어? 사자후 한 번 터트릴 법한데 안 터트렸어. 그냥… 그냥 좀 울면서 가시는 길 배웅해드렸지. 알고 보면 독한 새끼예요, 얘가.”

밀림의 콜로세움 한복판에 앉아 독사는 목청을 돋구었다.

“세상이 멸할 때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심장이 찢어지는 순간이든, 아, 멀쩡해! 주화입마에는 절대로 걸리지 않아. 제정신 꽉 잡고, 이거 놓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인지 뭔지 아무튼 정신줄을 꽉 붙잡고, 살아. 아무리 지옥 같은 일이 코앞에 닥쳐도 주화입마에는 걸리지 않은 양반이었다 이 말씀이야.”

짝, 짝, 짝.

독사가 손뼉을 쳤다. 손등에도 상처가 자잘히 나 있었지만, 미리 붕대를 챙겨왔는지 이 시간을 쉬는 용도로 써서 응급처치를 해놓았다. 그럼에도 독사가 손뼉을 칠 때마다, 촤악! 촤악! 촤악!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대단한 인내심이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레벨이, 가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어.”

"......."

“아가씨. 그런 김공자가 주화입마에 걸리려면 대체 얼마나 개 같은 걸 봐야 할까?”

정적이 흘렀다.

“세계가 멸망하는 모습 정도야 숱하도록 봤으니까, 그 정도로도 안 돼. 세계가 멸망하면서도 특히 지랄나게 멸망하는 모습도 봤지. 그거로도 안 되잖아? 그러면 정말로…… 인간의 악의가, 악의에 악의를 뭉쳐서, 짓이겨서, 가까이 다가가거나 냄새를 맡기만 해도 [아 여기가 지옥이군]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악의가…… 있어야.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사왕가의 가주이시자 마교의 천마인 김공자께선 비로소 머리가 확 돌아버리시겠지?”

독사는 끌끌 웃었다.

“그때, 너희. 너희 가신단이라는 놈들 말이야. 김공자, 막을 수 있겠냐?”

"......."

“막고 싶겠냐?”

"......."

“그때 너희가 보게 될 지옥이 뭔지, 나는 모르지. 상상도 할수 없어. 하지만 김공자가 제정신을 잃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이라면…. 그래서, 이 지옥을 만들어낸 자들과 방관해둔 자들이랑 모른 척 지나간 이들을, 김공자가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할 때.”

독사는 고개를 스윽 들어 좌중을 둘러봤다.

자문사 에스델, 무사장 우부르카, 가영 김율, 시종장 실비아 에바나일. 아직 가문에 들어오는 것이 확정되지 않았으나 경호원이 되고 싶다고 자청한 검성까지.

“너희가 말이야…… 김공자를 막을 수 있겠어?”

“저희는……."

“오히려 김공자 따라서 그 지옥을 만든 개새끼들을 쳐죽이러 다닐 거 같은데. 눈 뒤집혀서.”

"......."

“말하자면 가문 전체가, 교단 전체가 주화입마에 빠져서 온 세상을 학살하게 되는 거지. 야아. 그림 좋다.”

독사는 실실 웃었다.

“저 중에는 옛날에 성좌였던 놈 하나. 현역으로 성좌인 놈도 하나. 성좌들 잘썰어서 이명까지 받은 헌터 하나. 성좌의 힘을 끌어다 써서 세상을 망가트릴 뻔했던 사도 하나. 나머지 병졸들은 이게 클래스도 보통 클레스가 아니야. 세상이 멸망하는데 꿋꿋이 살아남은 마교의 정예들이야. 정예! 최소 고수급 마공을 펼치는 쫄따구들이 자그마치 1000명인데……."

툭.

독사는 돌멩이를 쥐어다가 던졌다.

돌멩이는 에스델의 발 앞에 떨어졌다.

“세계 하나 아작내기 참 쉬워 보이는 전력이다. 안 그래?”

"......."

“천마가 주화입마에 걸릴 정도라면, 너희 가문은 모조리 주화입마에 걸리는 게 당연하고, 너희들이 전부 주화입마 걸려서 탑을 활보 하면 말이다. 그 날로 세상은 끝이야. 끝.”

툭.

두 번째 돌맹이는 우부르카의 앞발에 걸렸다.

그리고.

“사왕아.”

툭.

“천마야.”

툭.

“어이, 김공자.”

툭.

“너한테는 내가 필요해."

"......."

“내가 없으면 너, 망해."

"......."

“네가 빡 돌아서 미칠 거 같을 때. 아 사람이 어떻게 진짜 이렇게까지 지옥을 만들 수 있냐, 어? 사람이 사람이라면 정말 최소한 이거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하고. 네가 빡치기 시작할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역류하여 온몸이 붉게 타오를 때.”

툭.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내 심장 언저리를, 조금 전 독사가 주먹으로 눌렀던 부분을 두들겼다.

바라보면, 독사는 실실 웃고 있었다.

“내가 옆에서 자제시켜줄게.”

"......."

“자제가 안 된다 싶으면 죽여주마.”

그런가.

그리고 내가 주화입마에 빠져 독사에게 처단당하는 그 순간, 정파는 승리한다.

아니.

마천신교가 패배하는 것이다.

“하."

나는 웃었다.

“이 얼마나 오래된… 오래 걸리는 싸움입니까…. 10년? 20년? 30년? 어쩌면 수백 년일지도 몰라도. 랴오판. 당신은 지금 제게, 수백 년짜리 비무를 신청하는 것입니까.”

“그래.”

독사가 웃었다.

“내 입장에선 수백 년짜리 직업에 계약직 따내는 거니까 완전 땡큐지만.”

음.

그래.

“좋습니다, 랴오판.”

에스델이 나를 올려보았다.

“가주님……?”

“에스델. 애당초 비무에는 시간 제한이 없단다. 마천이 옳은가. 정파가 옳은가. 그걸 가려내기 위해 스승님과 무림맹주는 자그마치 990번의 비무를 펼쳐야 했지. 세상이 멸망해가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비무를 펼쳤건만, 그럼에도 결착이 나지 않았잖니. 조급해할 이유가 없어.”

에스델은 심호흡을 했다. 이어 불을 내뱉는 것처럼 말했다.

“가주님께선, 절대 잘못된 길로 빠지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그 길은 이미 제가 한 번 걸었던 길이니까요.”

나는 재가 뒤섞인 구름을, 붉게 펼쳐져 내리던 빗물을 생각했다.

그래.

그런 것이다.

“고마워.”

“그러니 설혹 빠지실 것 같다 싶으면 제가… 저희 모두가 합심하여 가주님을 설득하여, 머리끄댕이를 붙잡아서라도 도로 끌고 올 것 입니다.”

“믿을게.”

“굳이 저런 자가 있을 필요는……."

“그런데도 내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으니까.”

나는 에스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진흙 투성이가 된 얼굴을 거칠게 손으로 닦고 있는 독사를 바라보았다.

“랴오판.”

"......."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를 위해 노력해주셔서. 저를 이기기 위해 시간을 쏟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당신은 저를 질투한다 말했지만 그건 추악한 질투심이 아니에요. 당신은 저를 음해하지 않습니다. 음모를 꾸려 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올곧게 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질투심을 인정한 채, 저를 이기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

“오히려, 이기어검을 펼쳐서 당신을 매혹시키면 질투심도 저절로 사그라들겠지… 라고 생각한 저 자신의 안이함이 부끄럽네요. 당신은 이미 질투심을 극복한 지 오래였는데도요. 굉장하네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주먹의 튀어나온 뼈 부분만큼 움푹 들어간 심장 탓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지만, 참아내고, 독사를 향해 걸어갔다.

"......."

자신에게 다가오는 내 모습을 보고 독사는 어쩐지 긴장한 듯했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이 순간, 이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긴장될 수밖에 없지.’

자신이 질투해온 상대, 자신이 동경해온 상대, 그 사람과 마침내 마주치게 되었을 때, 서로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보게 되었을 때, 과연 자신은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어할까.

상대가 해주었으면, 간절히 바라는 말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누구보다 염제 유수하를 질투하고 동경했던 나이기에 알 수 있다.

“랴오판.”

나는 랴오판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당신도 만만찮게 저 같은 또라이네요.”

"......."

“저는 착한 또라이들이 싫지 않습니다. 좋아해요. 결국 제 심장에 주먹까지 꽂으시고…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

“주인공 같았어요.”

나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주화입마에 걸린 제 목을 치려면, 그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거 아시죠? 좀 더 정진하세요.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랴오판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 입 터는 것 좀 보소. 야. 누가 보면 방금 니가 이긴 줄 알겠다?”

“어허. 구체적인 상황을 생각한 다음 말하라매요. 주화입마에 걸리면 전투력이 올라간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건 대체 뭔 놈의 계산법이냐….”

랴오판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그 앞에 주저 앉아 웃었다.

“한잔합시다.”

곧 누군가가 술을 가져왔다. 잔이 준비되었고, 그 안에 술이 차올랐다.

그리고 어느 가지에서 흩날린 날리던 꽃잎이 나폴, 주면 위에 내려앉았다.

[개표 완료.]

그동안 무대를 지켜본 귀인족들이 결정을 내렸다.

[2번 득표율: 00.00퍼센트.]

[1번 특표율: 100.00퍼센트.]

[스테이지 클리어.]

아마 그들이 지켜본 것은 무대가 아니라, 어느 외눈에 흐른 투명한 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한 잔 하자. 김공자.”

그가 말했다.

“이 또라이 자식아.”

그렇게.

[47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마지막 투표가 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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