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283화 (283/400)

283화.  < 마지막 투표. (4) >

5.

우리는 연회를 열었다.

거의 단번에 40층대를 클리어했거니와, 독사가 혼자만의 폐관수련에서 상상 이상으로 강해져서 돌아온 거다. 연회를 열 이유로는 충분하지.

우리는, 5대 길드장들은, 더 이상 동료의 빠른 성장을 경계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친구가 그러하듯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주었다.

매우 순수하게 말이다.

“내 특제 우유 칵테일을 특별히 천무문주를 위해 만들어줌세.”

“그만해! 그만! 검성 할배! 당신, 칵테일에 대해서는 게껍질만큼도 모르잖아! 칵테일바 분위기는 즐기고 싶은데 뭐 마셔봤자 맛을 모르겠으니 그냥 우유만 처마시는 키치 댄디가 어디서 날 희생양으로…… 푸읍!?”

“자, 마시게. 전투력 측정기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일세. 평범한 깔루아 밀크는 재미없다 싶어서 두리안 주스에 에스프레소를 넣어, 밀크를 섞어보았다네. 마침 이곳이 밀림이 펼쳐진 바닷가 휴양지와 비슷하지 않던가? 자네의 낭만력을 내 측정해줌세.”

“피흡…… 욱, 우에엑! 훕, 크욱, 우우우우욱!”

“호오, 낭만력 1만… 2만… 5만… 53만… 점점 올라가는군. 젊다는 건 좋은 거야. 나 같은 늙다리 전투력 측정기는 죽어야지 그냥.”

“약왕이 옮았냐 이 미친 늙은이야!?”

너무나도 순수한 개판이었다.

“당신들 진짜 노는 게 학생 수준에서 안 벗어나는구나…. 두뇌 발달에 문제가 있는 거려나…?”

흑룡주는 고개를 저으며 성기사와 담백하게 술자리를 즐겼다. 네모낳게 돗자리를 깔아둔 것이, 마치 지능이 일정 수준 이하 떨어지는 것들은 여기에 접근하지 말아달라는 뉘앙스를 폴폴 풍기는 것 같았다. 백작도 돗자리에서 코를 박고 ‘냐앙냐앙’ 하며 두 사람한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평화. 고급. 우아.

술자리의 진정한 멋이란 이거다, 라고 은근히 과시하는 듯한 블랙 드래곤 퀸의 품격.

“한 쪽은 지옥, 다른 한 쪽은 낙원인가….”

나는 오렌지 주스를 든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 어느 쪽이든 낙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야 아래에서 새하얀 금발이 한 차례 찰랑거렸다.

소녀(少女)라는 이상, 아니 우상을 완벽하게 조각해놓은 것 같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신출귀몰하시네요. 공녀님.”

“응! 내 특기인걸!”

소녀는 엣헴, 양손으로 허리를 받쳤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현현합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

30층에서 49층까지 우리를 담당하는 안내역.

다른 사람들은 성좌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탑의 최고 권력자인 기둥 중 하나.

무엇보다도 탑주(塔主)의 진정한 딸이기도 하다.

“야아아아-. 그나저나 대단한걸. 응. 사왕이 대단한 거야 내가 벌써 몇 번이나 칭찬했지만, 역시 대단해! 응응! 역시 내가 점찍어둔 등천자(登天者)다워!”

털썩.

공녀는 은근슬쩍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방실방실 웃었다. 나는 이 사람이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싶어, 엉덩이를 비켜주면서도 참새 새끼 같은 눈깔로 쳐다봤다.

"이번엔 무슨 계략을 꾸미시려고요?”

“전혀. 아무것도! 난 진짜로 사왕을 칭찬하려고 들렀을 뿐이야.”

나는 한숨을 쉬고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성좌이자 기둥인, 어느 어미의 딸아이는 내 옆에서 키득거렸다.

“칭찬해주고 싶다는 건 진심. 당신은, 으응. 당신들은 정말로 잘했어. 나도 여러 탑들을 둘러봤지만 여기처럼 만장일치나 다름없이 스테이지 클리어가 이뤄진 곳은 아예 없을 거야.”

“아예 없어요?”

“예이! 내가 지금까지 봐온 케이스 중 [제일 잘 된] 경우는, 딱 1종족만 왕따당하는 거였어. 이거 원래 지금의 접근레벨로는 당신이 절대 들을 수 없는 비밀이지만….”

뭐 어때, 하고 공녀는 다리를 쭉 폈다.

“거긴 등천자들이 고른 종족이 모두 6개였는데 말야. 처음부터 아예 한 종족을 욕받이 역할로 매달자, 라는 합의가 이뤄졌어. 똑똑하지? 홍수가 나도 그 종족 때문. 가뭄이 들어도 그 종족 때문. 내 인생이 똥 같은 것도 사실은 그 종족 때문.”

"......."

“아군을 만들려면 먼저 적부터 만들라는 얘기가 있잖아. 그 탑의 등천자들, 그러니까 공략자들은 확실히 입증된 전략을 들고 나온 셈이지. 한 종족을 제외하면 모든 종족이 철저히 단결했으니까.”

“……그게 [제일 잘 된] 케이스예요?”

나는 공녀를 바라보았다.

이 탑은, 모든 탑들은 탑주의 불가마다. 탑에서 끓어오르는 비명, 원한, 죽음은 모조리 탑주가 껴안아서 대신 그 아픔을 느끼고 있다.

나에게 어미를 구해달라 말했던 아이가 할 말이 아니잖는가.

"응."

공녀는 떡 안주를 집어 우물우물 먹었다.

“왜냐면 그 한 종족, 이름은 [마녀족]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마녀족이 나머지 다섯 종족을 쳐바른 다음, 자기들이 신이라고 믿었던 공략자까지 개바르고, 나머지 네 명의 공략자까지 개쳐발랐거든.”

"......."

엑.

“네에?”

“네에네에. 그리고 다른 종족들을 노예병으로 세뇌시킨 뒤, 오히려 역으로 탑의 아래층들을 공격. 공략자만 믿고 후방에서 편안히 놀던 인간들을 모조리 학살했답니다. 인간은 생체실험도구로 썼고. 해피 엔딩, 해피 엔딩

공녀는 싱글벙글 웃었다.

“아. 참고로 지금 말하는 [인간]은 너희 [인간]이랑 종족이 쫌 달라. 두꺼비처럼 생겼어. 요컨대 입장이 역전되어서 그쪽 세계의 인간들은 신처럼 대접받다가 하루 아침에 실험실 두꺼비 신세로 전락해버린 거지.”

“세상에. 원……."

“쩔지?”

공녀는 떡을 끝없이 우물거렸다. 양볼이 햄스터처럼 빵빵 불어올랐다.

저런 상태에서 잘도 발음이 안 뭉개지고 떠는구나….

“그게 대략 1000년 전에 벌어진 일이던가.”

공녀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양볼이 꿀떡으로 가득 차 도저히 진지해 보일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눈빛만은 참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너랑도 의외로 인연이 깊은 아이들이지. 사왕아.”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예?”

“잘 떠올려봐.”

공녀의 눈이 돌연 진지해졌다.

“너, 걔네랑 만난 적 있어.”

"......."

장난기는 공녀의 체취와 같아 언제나 항상 눈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향에 좀먹지 않은 보석처럼,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쉽사리 떠올릴 수 없었다.

“1000년 전에 탑을 공략한 사람들이라매요. 저랑 어떻게 만나요? 아무리 그래도 시간 차가……."

“단순히 살아가는 것뿐이라면 오러를 쓰든, 마법을 쓰든, 수천 년이 넘도록 장수하는 일은 흔해. 적어도 50층 이후의 스테이지에선 흔하지. 살천성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문득.

“……아."

공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던져준 [힌트]들이 내 머릿속에서 차르륵 짜맞추어졌다.

『검제 양반.』

『엉?』

『150년 전에 저기 마탑(魔塔)을 한 채 무너트렸다면서요.』

그건 살천성을 만나기 위해, 다분히 치트키에 가까운 수단을 동원하여 내가 50층에 도달했을 적의 일.

50층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스테이지들과 전혀 달랐고, 위험천만했으며, 무엇보다 어느 무시무시한 [세력]이 스테이지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래 쟤들 탑이 여섯 개였거든?』

『근데 그중 한 개는 내가 무너트렸어.』

이 [세력]은 나의 배후령… 검제(劍帝)와 풀지 못한 원한에 얽혀 있다.

철천지원수라고 할까.

그래서 내가 검제의 흉내를 내서 소리를 지르자마자, 저 [세력]은 곧바로 반응했다.

『검제에에에에에에에에!!』

반응이 좀 격렬했던 거로 기억한다.

『돌아왔구나, 검제!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다!』

『빙의냐! 환생이냐! 됐다! 아무튼 상관없다! 죽여버린다!』

『네놈만큼은 우리가 죽여버린다! 영혼을 갈갈이 찢어서 삼라만상에 흩뿌리고 그 위에 똥을 싸갈겨주마! 죽여! 죽여!! 저놈을 당장 죽여버려! 마탑의 이름과 역사를 걸고 저놈을 지옥까지 쫓아가라!』

수백, 수천, 수만 명의 마법사가 빗자루에 올라타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모습을 나는 아직 잊을 수 없다.

그 기억에 살짝 어깨를 떨면서 공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공녀는 싱글방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

음.

과연.

정리해보자.

1. 1000년 전, 신들과 인간들을 역으로 집어삼켜 탑의 주역이 된 종족이 있다.

2. 그 종족의 이름은 [마녀족]이라 한다.

3. 우연찮게도 1000년 전부터, 탑 50층에 눌러앉아 스테이지의 대빵으로 군림하는 세력이 있다.

4. 그 세력의 이름은 [마탑(魔塔)]이라 한다.

5. 마녀족은 자기네를 핍박하던 종족들을 모두 노예로 써먹거나 생체실험용으로 쓴다고 한다. 이렇게 불쌍한 처지에 놓인 종족의 숫자는 모두 6개. 마녀족을 왕따시킨 이종족 5개에 플러스 마녀족을 버린 그 세계의 두꺼비 인간까지 해서, 총 6개다.

6. 우연히, 정말로 우연찮게도, 마탑은 6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

즉.

“제가 50층에서 만난 마탑의 마녀들이 바로 그 마녀족인 겁니까!?”

“빠바바방- 정답이랍니다아-.”

팡!

어디서 구해왔는지 공녀는 생일축하용 폭죽을 터트렸다.

“야아, 역시 사왕이야! 눈치가 빨라서 얘기하기 편한걸.”

“미친……."

내 인연이 복잡하다 못해 꼬이고 꿰여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던 차에, 중요한 질문 하나를 그사이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잠깐만요. 탑의 주요 주민이 바뀌는 것도 가능했어요!?”

“그럼. 만일 지정족 아이들이 빡돌아서 너희 탑 주민들을 전부 몰살해버리거나 하면 그 순간부터 탑의 주민은 인간이 아니라 지정족이 되는 거지. 뭐, 사왕이 살아있는 이상에야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

“아이김 제국의 신민들도. 라비엘이 머무르는 묵시록의 백성들도. 이론상으로는 너희를 대신해서 탑에 오를 수 있어. 단지, 너희가 아직 [랭킹]을 독점하고 있어서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랭킹.

확실히, 지금 탑의 최전선에 나설 수 있는 것은 랭킹 7위까지였다.

“그럼, 지금까지 공략한 세계 중에 누군가가 여기 있는 이들 대신 랭킹 7위 내에 들어갔다면……."

“응! 그 애들도 탑을 오를 수 있게 됐겠지.”

공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걔네는 [랭킹]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겠지만 말이야.”

“어째서인가요?”

“음? 그야 자신들이 태어난 곳에서 하루하루를 상대로 싸우고 있잖아. 지상을 떠날 이유가 없는 자들은 대개 하늘에 오를 이유 또한 갖지 않는 법이야.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탑은 그런 이들에게 주목하지 않아.”

그 말은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남겨주었다.

잠시 후, 공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치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등천을 목표하는 자들은 있을 수 있지. 가령 지정족, 아니, [아수라]라고 불러야 하려나?”

공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수라는 강해. 그리고 자신들 가운데 성좌가 나왔다는 걸 알아서, 더 높은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 그 뿐일까. 절기라 평해도 모자람 없는 마천신공을 익혔고, 심지어 마천진법을 펼칠 줄 알아. 그 아이들은 서열이 빨리 오르겠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를 일으킬 거야.”

아이는 어미에게 장난기뿐만 아니라 독기마저 물려받은 걸까.

공녀의 눈동자에선 어떤 교묘한 비소(非笑), 무언가를 조롱하며 즐거워하는 웃음기가 살며시 흘렀다.

“무슨 문제요?”

“사왕이 너야 지정족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하잖아. 네 동료들도 그렇구. 하지만, 너희와 함께 공략에 참여하지 못한 절대다수의 주민들은? 너희가 갑자기 자기들 자식이라면서 데려온 종족들에 마냥 두 팔 벌려 환영해줄까?”

"......."

“후후후.”

공녀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흉내냈다.

“어쩌려나? 애초에 [문제없으니 안심하시오]라는 말을 믿어주려나아-. 사왕이 너야 이미지가 좋아서 말빨이 좀 먹힐지 모르지만, 다른 동료들은? 흑룡이가 바뀌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지? 이단심문관이 변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여섯이나 될까 싶어.”

"......."

“걔네가 [믿어주세요]라고 말해도, 믿어주겠어? 독사는? 검탱이는? 탑 아래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믿어줄까? 너희가 데려온 아이들을 과연 신뢰할까?”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왁자지껄한 술자리 소음이 들려왔다.

“아쉽지만 두리안 코스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네.”

“사, 살았다…… 우욱. 살았다구… 살아남은 거라구….”

“다음은 산와족의 체액으로 빚어낸 백주에, 슬라임폴리스에서 손수 캐낸 최고급 소금을 섞어 만든 칵태일일세. 천무문주. 이건 한번에 들이마셔야 그 진미가 드러난다고 하더군. 마시게나.”

“어……. 그거, 그냥 젤리에 소금 타서 마시는 거 아니야?”

“마시게.”

그래.

남녀노소, 종족, 부모와 자식을 불문하고, 연회장에선 모두가 껄껄거리며 각자의 방식대로 어우러졌다. 그곳에 질투가 있었고, 동경이 있었으며, 우정이 있었고, 설익은 희망과 오래 달여진 한숨이 있었지만.

다들 서로가 서로를 똑바로 보고 있다.

독사가 내게, 내가 독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공녀의 눈웃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헤에?”

“정확히는, 해결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거지만요. 뭐.”

나는 고개를 돌려 흑룡주를 쳐다보았다. 흑룡주는 성기사와 대작하고 있었는데 딱히 수다를 떨지 않은 채 심심한 얼굴로 이리저리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뭘 보니?

흑룡주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은 야자수잎이 드리운 그늘에 물들어 있었다. 서로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오러를 타고 흘러든 전음은 내 귓가에 똑똑히 울렸다.

“잠깐 와주세요”

-귀찮은데…. 왜?

“공녀님이랑 두 분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중요한 일이에요.”

흑룡주는 한숨을 쉬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팟! 술잔이 미처 바닥에 닿기 전, 한숨이 마저 흘러나오기 전에, [순간전이]를 쓴 흑룡주는 바로 내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그래?”

“50층을 향해 올라가기 앞서, 먼저 준비해야 할 이벤트가 있어서요.”

“이벤트?”

“예. 이벤트요.”

흑룡주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공녀는 흥미로운 얼굴로 날 보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탑 1층으로 돌아가서 투표를 열 겁니다.”

“투표라니? 투표는 귀인족을 마지막으로 전부 끝났잖아.”

“아니요. 아직 마지막 투표가 남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탑에서, [바빌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투표를 아직 받지 못했어요."

"......."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정말로 필요한 투표가 남았어.’

5대 길드는 과거의 분열을 딛고 단합했다.

길드의 우두머리들은 심장에 상처를 심은 채, 계속 앞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좋은 일이다.

축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만의 이야기.’

바빌론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주민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전례 없는 속도로 스테이지들이 공략되어서 기쁘고, 환호하며, 거대 길드들을 지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문제점]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다.

어쩌면 탑주가 보여준 어느 세계선처럼, 만신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흑룡주가 배신을 당하여서, 탑이 내부에서 처절히 무너져 내릴 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도외시하면, 그들 또한 우리를 무시할 것이므로.

‘서로 이야기를 해야 돼.’

아니,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여줘야 한다. 느낄 수 있게. 체험할 수 있게.’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이벤트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나스타샤.”

“기자회견을 준비해주세요.”

아나스타샤가 미간을 좁혔다.

“으음."

“제가 사왕이 되고 난 이후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그런 행사는…… 있으면 나쁘지 않지. 대외에 자랑할 만한 쾌거고….”

“회견에는 기자만 아니라 탑의 주민들도 자유롭게 참석하게 해주세요. 주민들도 질문할 수 있고, 저는 질문을 피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흑룡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분도 전원 참석해주기를 바랍니다.”

"......."

“바빌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정정당당히 말합시다.”

우리가 함께 탑을 오르기 위하여.

"......."

흑룡주는 침묵했다.

침묵이 길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적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이 너무도 많아서, 그 폭주를 견뎌내어 삼키기 위한 침묵이었다. 따라서,

“위험할 거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다분히 함축적일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기자회견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어. 출입을 허가하는 신문사, 기자, 회견장에서 허락된 질문들, 반응들, 좌석의 배치, 전부 흑룡에서 세심하게 제어할 수 있지. 하지만 주민들한테도 질문권을 허락해리면……."

“알아요.”

"......."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더 입을 다물었고, 조금 더 시간에 침묵을 졸인 뒤에, 입술을 열었다.

“너를 음해하려는 사람이 많아.”

“예."

“우리 길드들이 합심해서 비밀리에 키워둔 스타다. 사왕의 공적은 실제로는 5대 길드들이 해낸 것인데, 의도적으로 스타를 키우기 위해 사왕한테 공훈을 몰아주고 있다. 사왕은 마리오네뜨에 불과하고 실상은 5대 길드의 지령을 따를 뿐인……."

“알아요.”

“고아잖니. 원장 선생님을 탑으로 불러들였잖니. 고아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무시받을 거고, 자리에 오르자마자 주변 사람을 챙기냐면서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예."

“당신에게 상처를 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많아. 굳이, 당신이 상처를 받으러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요. 있는 거 아시잖아요?”

"......."

“만일 저한테 상처와 흠집을 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 물론 옛날 저처럼 쪼잔할 뿐인 애들도 있겠지만…. 아나스타샤. 5대 길드들이 그동안 십 수 년 넘도록 비밀주의를 고집하며 탑을 운영한 대가예요.”

나는 아나스타샤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겹쳤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상처를 입히는 게 아닙니다. 여태껏 쭉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왔기에, 누구한테 상처라도 내서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려는 겁니다.”

“……전혀 엉뚱한 사람한테, 전혀 엉뚱한 상처를 말이지.”

“음. 뭐. 세상은 비합리적인 일 투성이죠.”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리더한테는 비합리적인 일을 잠깐 떠맡아주는 역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여러분은 저를 리더로 만들어줬어요.”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제, 제가 이 탑의 리더가 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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