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검제 귀환. (2) >
-근데 너 지금 나한테 욕할 시간은 있냐?
배후령이 실실 웃었다.
-경보 울렸잖아.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거미들이 몰아닥칠걸?
“제길. 하무스트라 신도 여러분!”
나는 열쇠 꾸러미를 든 채 감옥을 향해 달려나갔다.
“자기가 하무스트라 신도다! [만상의 대도서관장]은 우주 최고의 성좌다! 그러는 분 있으면 작게 신음이라도 내보세요!”
“으으으…."
이곳저곳에서 나약한 신음이 흘렀다.
오러로 강화된 나의 청각은 미세한 소리마저 놓치지 않았다. 모두 열 두 곳. 나는 어서 열쇠 꾸러미를 넘기며 알맞은 열쇠를 찾아내려 하다가---.
“이럴 시간도 없겠다!”
나는 열쇠 꾸러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성검을 뽑아들어 철창들을 베어 넘겼다. 까가가강!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쇠창살들은 오라지게 단단했지만, 오러를 펑펑 쏟아부으니 수수깡처럼 잘려나갔다.
“자! 아직 일어날 기력이 있는 분은 어서….”
-무오오오오오!
그때였다.
멀리서 불길한 포효가 울렸다.
어떤 괴물이 부르짖은 소리인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저놈이 울부짖은 이유가 새벽을 알리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당신의 위기를 재밌어 합니다.]
[‘외로운 구도자’는 당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지 눈여겨봅니다.]
[‘사랑과 정욕의 화신’은 당신이 포로로 잡힌 미래를 그리며 흥분합니다!]
환장하겠네.
“그냥 다 따라오세요! 탈출합시다!”
나는 신도들의 구속구를 잘랐다.
“다, 당신은 뉘시우…?”
심하게 고문당했는지 일어설 힘조차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겐 내가 혈도를 짚어 오러를 순환시켜준 다음 포션을 부어넣었다.
“마셔요!”
"우붑, 웁......."
“토하지 말고! 몸에 존나 좋은 거니까!”
나는 유리병을 신도들한테 한 개씩 쥐여 줬다. 이젠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린 약제사의 특제약이었다.
의리 있는 약제사는 ‘공자님께는 특별히 친구 가격으로 제공해드릴게요…’ 하고 말해주었다. 덕분에 지금같이 뿌려야 할 때 마음껏 뿌릴 수 있었다.
“오오오?”
“이, 이 맛은……!”
“말도 안 돼. 쥐꼬리만한 용량으로 효과가 이렇게나….”
약제사의 실력은 50층에서도 통용되는 모양이다.
‘과연 마이 프렌드.’
-걔도 참 또라이였지. 그러고 보면 이 챠루무인가 하는 애 걔랑 좀 비슷하지 않냐?
‘거 조용히 하십쇼.’
그렇게 하무스트라 신도들 대부분이 약을 들이켰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두’와 같지 않다.
“기다려. 당신이 누군데 따라오라는 거야?”
안경이 어울려보인다고 할까, 눈매에 날카로움이 생생하게 서린 여인이었다. 수감으로 말미암아 헝클어진 머리 탓에 인상이 배는 사나워 보였다.
“저도 하무스트라의 편입니다.”
내가 말했다.
여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 같은 사서는 본 적 없어. 무슨 속셈으로 우리를 탈출시키려는 건지 말하기 전엔….”
이럴 시간도 아까웠다.
“잠깐 집중 좀.”
“뭐?”
나는 오러를 가속시켜 시간 감각을 늘렸다. 엿가락처럼 길어진 시간선상에서, 나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하무스트라 신도들이 조마조마한 낯으로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료나 하급자가 아니라, 명백히 상급자를 보는 눈빛. 얼른 도망치고 싶지만 여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엔 움직이기 어렵다는 기색이었다.
‘과연.’
나는 바로 이유를 알아챘다.
‘이 사람이 [보조작가]로군.’
하무스트라 신도들 사이에선 거의 사도급으로 취급받는다 했던가.
신도들을 이끌려면 우선 이 사람한테 신뢰를 얻어야만 했다.
‘성좌의 사도급 인사라면 전음(傳音) 정도는 알아듣겠지?’
나는 느려진 시간선상을 그대로 놔둔 채 입을 열었다.
“[만상의 대도서관장]께서 제게 직접 부탁하셨습니다. [보조작가]님.”
보통 사람은 결코 흉내내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이 흘러나왔다. 경지가 낮은 인간이 들으면 나의 한 문장이 마치 한 단어처럼, ■, 와 같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지지직거림으로 들릴 것이다.
과연 [보조작가]는 전음을 알아차릴 수준은 되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관장님께서 부탁하셨다고…?”
“예. 자신의 신도들을 돌봐달라고. 자신이 지금 처지가……."
“믿을 수 없어. 우리는 관장님의 [최애캐 랭킹]에서 한참 떨어지는 인간들이야. 그런데 우리를 탈출시키려고 당신을 보냈다고? 말도 안 돼. 관장님께서 그런 [캐릭터 붕괴]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한 편의주의적 전개]야.”
최애캐 랭킹이랑 캐릭터 붕괴, 편의주의적 전개는 또 뭐야….
그 성좌에 그 사도라는 생각이 들지만, 거듭, 이럴 시간도 아깝다.
“이럴 줄 알고 증표를 얻어왔습니다.”
“증표라니?”
“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과 도서관장, 두 분만 아는 대사가 있다고. 당신이 묵시록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라고.”
나는 보조작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는 지금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
보조작가의 눈이 커졌다.
“[언젠가 당신도 죽겠지요. 당신이 눈을 감을 때 제 얼굴을 떠올린다면, 우리 두 사람은, 죽을 때 서로를 바라본 채 죽는 것입니다. 똑같아요. 서로 바라보면서. 똑같아. 저는 여기서 잠깐 멈춰서, 당신이 눈을 감을 때까지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됐어, 아니. 알겠어. 알겠으니까.”
보조작가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해.”
보조작가는 슬퍼하는 것 같았다. 화난 것 같았으며 놀란 것도 같았다.
언뜻, 누구나 살면서 한 획씩 가지기 마련인 상처자국이 그녀의 표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래, 관장께서 보내주신 사람이 확실하네.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떨치기 어렵지만, 뭐 생각해보면 나는 어차피 [주인공]이 아니니까….”
씁쓸하게 고개를 젓는 보조 작가.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말했다.
“신도들은 내가 추스를게. 탈출방법은?”
“음. 원래는 몰래 빠져나갈 작정이었는데….”
늘어진 시간자락 속에서 경보는 기이한 길이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지랄이니까요. 힘으로 밀어붙입시다.”
“가능하겠어?”
“지금 대화가 빨리 끝날수록 가능성이 높아지겠네요. 전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지만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깐요. 그러니 어서….”
“이 남자는 관장께서 보내신 전인이 맞아!”
보조작가가 주변의 신도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이 남자의 지시를 따라! 빌어먹을 거미 새끼들! 탈출하자!”
“예!”
신도들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크오오오오오!
괴물도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차게 울었다. 마침내 괴물이 코너를 돌아 감옥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덕택에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던 신도들의 목소리는 후반에 가서 이상하게 꼬여 "예에에에에!?” 가 되어버렸다.
-오. 키메라다. 오랜만에 본다 야.
괴물은 이쪽의 눈치를 살핀다거나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짐승들의 장점이라면 언제나 지금 있는 이 순간의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괴물이 가진 지금 이 순간이란, 아가리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저건 만티코어에다 슬라임을 뒤섞어서 교배시킨 돌연변이구만.
쿵! 쿵! 괴물이 달릴 때마다 돌바닥이 흔들렸다. 괴물은 눈동자가 있어야 할 부분에 눈동자가 없었다. 대신, 끈적거리는 초록색 액체가 끊임없이 눈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배후령이 혀를 찼다.
-어휴. 하여간 변태놈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제가 앞장섭니다! 무조건 따라오십쇼!”
나는 전방으로 달려들었다.
“아…! 치, 침입자님! 그건…!”
차루무가 신음을 삼키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쇄도했다. 대충 무엇을 말하려고 저러는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특수한 방법이 아니면 죽일 수 없는 생명이다, 그런 거겠지!’
50층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대체로 특수하다.
요컨대 [반으로 갈라져 죽는 자]를 죽이려면 그 이름처럼 정확히 반으로 갈라야만 하며, [비명자]를 죽이려면 참격이 아니라 음량으로 압도해야 한다.
눈앞의 키메라는 마탑에서 등장한 몬스터. 말하자면, 50층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던전에서 출현한 괴물이다. 무작정 자른다고 죽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끼이이익, 미끄러져서 키메라의 몸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어 키메라가 반응하기도 전에 놈의 뱃가죽에 푹! 칼끝을 집어넣었다.
‘아예 먼지 한 톨도 안 남게 없애 버리면 된다!’
검이 번쩍였다. 붉은색 번개가 치솟나 싶었더니 다음 순간, 퍼어어억! 괴물의 배가 터졌다.
아니. 배만 터진 게 아니었다. 괴물의 내장, 몸뚱어리, 척추, 머리, 눈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슬라임마저. 그야말로 괴물의 [전신]이 한 순간에 터져버렸다.
“히익!?”
마법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방금, 나는 성검을 일종의 주사기로 삼아 오러를 미친 듯이 때려박았다.
상식을 뛰어넘은 오러의 주입에 그만 괴물은 산 채로 폭발한 것이다.
“후우.”
나는 오러를 불사질렀다.
단순히 키메라의 몸을 터트린 것에 만족하지 않고, 녀석의 가죽과 뼈를 전부 태웠다. 마지막 남은 살육 한점까지. 아주 잠깐 잿가루 비슷한 먼지들이 공중에 흩날렸으나 그것조차 바사삭 태워졌다.
문자 그대로 괴물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이다.
“오케이!”
나는 벌떡 일어서서 뒤를 돌아봤다.
“공략법이고 뭐고 지워버리면 땡이죠! 얼른 갑시다!”
마법소년과 보조작가, 신도들은 멍하게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해요. 얼른 가자니까!”
“아, 응. 그래. 어, 얼른 가자!”
그나마 보조작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다른 신도들의 어깨를 잡아끌며, 때로는 엉덩이를 차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신도들도 제정신 행렬에 동참하여 나와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다.
[‘외로운 구조자’가 당신의 오러 운용에 할 말을 잃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당신이 지치지 않고 멀쩡한 것에 놀랍니다.]
[‘사랑과 정욕의 화신’은 이미 당신만을 위한 장편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고마워요, 고마워!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그, 그 키메라는 큰 거미님이 특별히 애정하던 아이였는데….”
마법소년이 헉헉거리면서도 내 뒤를 쫓아왔다. 달리기도 벅찰 텐데 틈이 날 때마다 나의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어지간히도 조금 전 광경이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키메라의 핵을 이루는 심장이, 슬라임처럼 액화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몸안을 돌아다녀서, 그걸 정확히 찌르지 못하면, 안 죽거든요….”
“아, 과연. 제 방법이 정답이었네요.”
"......."
마법소년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물었다. 달리기에 집중하려는 모양이다.
-그어어어어어!
-고오! 고오오오!
복도에는 쉴 새 없이 괴물들이 등장했다. 어디서 솟아 나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죽기 싫으면 비켜, 이놈들아!”
나는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퍼억! 콰직! 내 검에 스치는 괴물들은 하나같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터졌다.
3초에 한 마리 꼴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몬스터가 기어나왔지만, 내가 1초에 한 마리씩 없애버리니 전방은 장해물 없이 뻥 뚫렸다.
“흐랴아아압!”
대략 40초 동안 오십 여 마리의 괴물을 폭발시킨 순간이었다.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잔뜩 긴장하고 잠입했고, 잔뜩 경계하며 탈출하고 있는데도,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확실히 몬스터들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단순무식하게 오러를 때려박아 터트리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
‘생각보다 쉽잖아?’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혹시, 어쩌면.
‘생각보다 내가 많이 강한 건가?’
뚝.
나는 발걸음을 멉추었다.
“헉, 허어억… 허억…!”
“치, 침입자님. 조금만… 흑, 천천히이….”
뒤에서 일행들이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경공술도 쓰지 않고 그냥 다리를 오러로 강화해서 달렸을 뿐인데도, 동행자들은 숨이 차서 힘들어했다.
그들도 모두 50층까지 올라온 헌터들인데 말이다.
"......."
나는 성검을 든 채 위쪽을 올려봤다.
아직 마탑의 지하. 우리는 땅밑에 있었다.
저 벽 너머에 50층의 도시가 펼쳐져 있겠지.
‘한번 해볼까.’
나는 칼자루를 꾹 쥐고 스킬을 발동했다.
‘노천주점에서 나와 떠든 헌터들에 대한 기억을 전부 버린다.’
우우우웅!
성검이 붉은 오러에 휘감겼다. [찢어진 여신의 구원]. 기억을 대가로 바쳐 순간적으로 힘을 얻는 스킬. 살천성에게 물려받은 스킬을 발하며, 나는, 복도 천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일섬(一閑).
핏빛 폭풍이 몰아닥쳤다. 돌벽이 무너지는 소음이 울렸고, 그것을 뒤엎는 폭풍의 굉음이 휘몰아쳤다. 바로 뒤에서 신도들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신도들 머리로 떨어지는 바위 덩어리를 휙, 휙, 쳐내며 위쪽을 올려보았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경악합니다.]
어느새 천장은 말끔하게 뚫렸다.
"오."
천장의 틈새로 우중충한 먹구름이 비추었다. 50층은 언제나 하늘이 먹먹했다. 하지만 그 묵빛의 하늘조차 지하복도의 천장에 비해선 밝은 것이었다.
마치 우물 밑바닥에서 구멍을 올려다보는 느낌.
“이게 되네?”
"......."
신도들은 입을 벌리고 나를 보았다.
“한 분씩 서세요. 제가 위로 올려드릴 테니까. 뭐하세요? 이러다 거미들까지 몰려오면 골치아파요. 어서 예의와 상식을 지키며 줄을 섭시다.”
“침입자님……."
마법소년이 우들우들 떨며 입술을 열었다.
“대, 대체 정체가 뭔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대답했다.
“악의 보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