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 놈이 전설이다. (1) >
1.
증인 A.
첫 번째 증언.
“거, 검제요? 유명하죠….”
앞머리로 얼굴을 절반 가린 마법소년은 입을 더듬거렸다.
“전 검제가 여섯 번째 첨탑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직접 봤거든요…. 굉장했어요. 단지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온갖 마법으로 떡장갑을 바른 탑이 우르르르…. 아! 장로님이 그렇게 빡친 것도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음…. 꼴보기 싫은 애들이 제6지부에 많았는데 다 죽어버려서, 정말, 기분 좋았지요……. 뭐 그 여파로 제 사맥(師脈)이 전멸하는 바람에 출세길이 막히고, 그 후 한직만 전전하다가 결국 몇 십년 뒤에는 131년 동안 하수구 청소만 하게 된 건 엿같았지만요….”
증인 B.
두 번째 증언.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질적인 눈매를 지닌 사서는 한숨을 쉬었다.
“검의 성좌…. 통칭 검제는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유명해. 지금 살천성이 누리는 명성의 10배 정도였다고 보면 되려나. 아무튼, 유일무이하게 99층 너머로 올라간 사람이니까. 나는 솔직히 그 사람이 100층을 클리어했을 거라고 봐. ……응? 왜 그따구 싸이코패스가 유명했냐니? ……당신, 무슨 소리야? 왜 아까부터 똥 씹은 표정이고?”
증인 C.
세 번째 증언.
-난 딱히 성좌가 되길 원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천하의 망나니가 지껄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한테 신앙이 모이더라고. 그리고 어쩌다 어쩌다 보니까 성좌가 되더라? 뭐, 그것도 다 나중 이야기지만. 어쨌든. 결론은 내가 무진장 잘난 놈이라는 거지. 진정한 구원자라는 건 말이다, 좀비야. 가만히 있어도 신으로 모셔지는 거란다.
증인으로서 전혀 쓸모가 없기에 이상의 증언은 개소리로 분류한다.
“이 세상은 썩었어……!"
“정말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건데? ...아니, 당신도 도서관장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인간이지. 약간 이상한 면이 있는 것도 당연하구나.”
실시간으로 절망에 빠져가는 나를 두고 [보조작가]는 중얼거렸다.
이곳은 하무스트라 신도의 은신처.
지하동굴을 한참이나 내려가서 당도한 비밀 아지트였다. 번듯한 건물이나 가구 따윈 없었다. 그냥 동굴바닥에 돗자리 좀 깔아놓고 간편한 통조림들이 장만되었을 뿐.
하지만 여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신도들은 안심이 되었는지 "아아…”, "다행이다”, "사자님 덕분에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등등 야단법석을 벌였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목숨은 전부, 사자님께 빚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하하…. 천만의 말씀이에요.”
평소라면 담담하게 감사의 인사를 받았을 텐데. 지금 나는 입가에 진도 5짜리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제교. 검제의 종교가 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접해버린 나는 그만 충격과 공포 때문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이제 다들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시면 되겠군요.”
"......."
지극히 정상적인 내 말에 신도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저어, 사자님. 그것이….”
“미안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세계가 없어.”
보조작가가 말했다.
“마탑이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았거든. 옛날 옛적에는 반란군이 조직되어서 저항도 해봤지만 그것도 수백 년 전 이야기야. 지금은 마탑에 협력해서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배신자들밖에 없어.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장소가 없지.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허어.”
나는 다소 놀랐다. 식민지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탑이 다른 세계의 탑을 정복하는 일이 정말로 가능했구나.
“우리 같은 애들이 50층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거야.”
보조작가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흘렸다.
“아랫층으로 도망칠 수 없어. 우리를 잡아다가 마탑에 바칠 녀석들이 한가득이니까. 그렇다고 윗층으로 나아갈 수도 없지.”
“왜요? 퀘스트를 깨면 바로 51층으로 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당신. 진짜로 여기에 막 올라온 신입이네.”
보조작가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뭐, 연기 실력이 어마어마한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이 정체를 숨기고 50층에 내려온 은거기인인 줄 알았어.”
무슨 얘기일까.
“그, 침입자님.”
마법소년이 옆에서 말했다. 곤란한 낯빛이었다.
그리고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150년 전 이후로 50층을 클리어한 헌터는… 없어요.”
뭐?
“저, 정확히는 마탑 소속이 아닌 헌터 중에는 없어요. 50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마탑에 소속하거나… 적어도 척을 지지 말아야해요.”
“진짜요? ……150년 동안이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마탑이, 퀘스트를 막고 있으니까요.”
마법소년은 불안해하며 지팡이를 꼬물락거렸다.
“침입자님께서 지금까지 거쳐온 스테이지들에는 담당자가 한 명씩 있었을 거예요. 담당 성좌죠…. 하지만 50층 이후부턴 그런 친절한 안내자가 없어요. 자기 스스로 성좌를 찾아내어서, 모셔서, 성좌한테 인정받아 퀘스트를 가져와서…… 통과해야 돼요.”
“아니. 잠깐만요. 그건 이상합니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성좌들이 퀘스트를 내려주면 그만이잖아요? 저만 해도 50층에 도착하자마자 성좌들한테 무수히 귓속말이 왔는걸요. 자기랑 같이 퀘스트를 뛰자고. 어떻게 마탑에서 퀘스트를 독점할 수 있습니까?”
"......."
마법소년은 후드를 푹 내려썼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배신을 보여줘서 까먹을 뻔했지만 소년 역시 마탑의 일원이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건 자잘한 퀘스트들이야.”
마법소년을 대신하여 보조작가가 대답했다.
“누구를 처치해라. 누구를 도와라. 그런 퀘스트들은 얼마든지 낼 수 있어. 보상도 줄 수 있고. 하지만, [50층을 클리어했다]라고 인정할 만한 퀘스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마탑을 둘러갈 수는 없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이려나. 음. 하지만, 당신도 도서관장님의 사자잖아?”
보조작가는 볼을 긁적였다.
“우선 하나. 싫건 좋건, 마탑은 이 50층을 지배하는 세력이야. 그건 당신도 알고 있지?”
“예. 대강은….”
“그렇다면 이 마탑을 내버려두고 50층을 돌파했다고 인정할 만한 퀘스트를 구성하기 까다롭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 마치 지난 497쪽 동안 주구장창 최종보스에 대한 복선을 뿌려댔으면서 이후 3쪽 동안 ‘사실 그 최종보스는 별로 안 무찔러도 상관없어요’ ‘맞아맞아, 사실 무시해도 괜찮음’ 그렇게 대충 만담으로 때우고 넘어가는 소설이 쓰레기라는 걸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비유가 참 하무스트라의 사도답다….
“그러니까, 성좌들 입장에서도 50층 돌파 퀘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마탑]이라는 소재를 써야만 하는 거야.”
보조작가는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첫째. 마탑에게 인정받는다. 마탑에 긴 시간 봉사하거나, 꾸준한 친목질을 통해 [마탑의 일원] 또는 [마탑의 명예 멤버]가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 50층을 지배하는 세력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같은 식으로 업적을 쌓는다. …이게 지금의 [정규 루트]에 해당하지. 이 루트로 올라간 헌터들이야 1년에 한 둘은 꾸준히 나오고 있고.”
"......."
“둘째. 그 마탑과 정면으로 싸워 굴복시킨다. …이게 [비정규 루트]에 해당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 비정규 루트를 돌파한 헌터는 지난 150년간 없었다… 라는 거군요.”
나는 이해하여 말했다.
보조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간단한 일이 아니지.”
보조작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샤르륵, 종잇장들이 나타났다. 페이지 한장한장이 반딧불과 같이 연한 빛을 내며 보조작가 주위를 맴돌았다.
“이 페이지들은 나의 스킬. [공모전 낙선작]이야."
"......."
“내가 지은 이름 아니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 눈깔 뽑아버린다.”
이 누님 성격 나오시네 .
“……어쨌든, 난 [공모전 낙선작]으로 다른 사람들이 [실패해버린 퀘스트]를 훔쳐볼 수 있어.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50층을 그 [비정규 루트]로 깨려다가 실패한 흔적이야.”
차르륵.
찢어진 페이지들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펄럭거렸다.
나는 그중, 가장 가까운 종잇장 하나를 잡아서 들여다보았다.
+
[독점도시 해방전]
성좌: 영원한 평야의 군마
난이도: SSS
임무 목표: 전사들이여! 드디어 궐기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마탑의 악마들은 참람하게도 독점도시를 억압했습니다. 검의 파수꾼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어찌하여 이 세상에 용사가 한 명뿐이겠습니까? 이제는 그대들이 검을 잡을 때입니다.
일어서십시오. 맞서 싸우십시오! 마탑의 남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무너뜨려, 그들의 손아귀에 갇혀 신음하는 성좌들을 구해내고, 독점 도시의 저 너머로 당당히 걸어가십시오!
결과: 실패
낙선 사유: 연합군의 참패.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간부들 대다수 참살. 이후, 성좌가 공개적으로 퀘스트 실패를 인정. 향후 100년 동안 마탑을 대상으로 한 퀘스트를 내리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굴욕적인 휴전을 맺다.
+
팔락.
나는 또다른 종잇장을 낚아챘다.
+
[사랑은 세상을 구한다]
성좌: 사랑과 정욕의 화신
난이도: SSS
임무 목표: 평안하신가요, 애정하는 사랑꾼님들. 저는 평안하답니다. 하지만 평안하지 못한 사람도 독점도시에는 있습니다.(두둥)
그것은 바로 마탑을 지배하는 자, 마탑주, 장로입니다.(깜짝!)
장로는 지난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다는데요. 장로도 인간인 이상에야 설마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요?(궁금) 저는, 저 얼어붙은 동토 바닥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풀꽃이 피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누구라도 좋아요. 장로에게 사랑의 멋짐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세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저희 멋진 사랑꾼님들이라면 가능하겠지요?(엄지척!)
결과: 실패
낙선 사유: 마탑의 장로에게 접근한 [사랑과 정욕의 화신]의 신도들이 모두 처형당함. 장로의 어깨에 손을 댄 자는 손가락이 230번에 걸쳐 깎여나가고, 장로에게 입맞춤을 시도한 자는 입술이 23조각으로 갈리다. 이후, 성좌가 공개적으로 퀘스트 실패를 인정.
+
"......."
나는 찢어진 종이들을 넘겼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성좌마다 다른 어투와 다른 취향을 담아 퀘스트들은 작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간에 한 단어. 두 음절로 이루어진 낱말만은 반드시 포함되었다.
실패.
"......."
[실패], [실패], [실패].
100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이루어진 [비정규 루트 퀘스트]들은 어느 순간을 시점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아니. 급격히 줄어들었다. 결국 10년에 한 번, 20년에 한 번 꼴로 갱신되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실종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정규 루트 퀘스트가 내려진 게 31년 전.”
보조작가는 손가락을 튕겼다.
거짓말처럼, 허공을 서성거리던 종잇장들이 사라졌다.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퀘스트 참여를 독려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안 먹혀. 도서관장님께서 사라지신 다음부터는 우리들도 자기 목숨 챙기기 바빠졌고…. 지금 이 도시는, 50번째 스테이지는, 말 그대로 시간이 고여버린 장소야.”
“......왜?”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탑에선 왜 이런 짓을 한답니까? 이렇게 해서 얻을 이익이.”
“많지.”
보조작가는 즉답했다.
“이렇게 [정규 루트]를 강제함으로써, 50층 너머를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채운다. 이럼으로써 탑의 진행을 성좌들이 맡는 게 아니라 마탑에서 독점하게 돼. 그리고 항구 독점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낳게 마련이야.”
“하지만……."
“맞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안 것일까.
보조작가는 내게 동감하다는 얼굴로 조용히 끄덕거렸다.
“재미없지.”
"......."
“죽을 정도로 재미없어. 심심해. 지루해. 고루하고 갑갑하며 따분하지.”
애초에 정규 루트라니 대체 뭐야 그게, 라면서 보조 작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탑이 독점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검제가 휘몰아쳤던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면 재밌었던 적이 거의 없어. 그래서 우리 사서들은 마탑에 저항하는 거야.”
보조작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신도들이 수감 생활로 다친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몰골이 허름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겨우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감돌았다.
“……[우리]라고 해봤자 이제는 이게 전부지만 말이야.”
그런가.
‘이해했어요.’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한탄하는 걸로 비추겠으나, 내 눈에는 배후령이 비추었다.
‘댁이 왜 마탑을 깨부셨는지.’
-음.
‘그저 재미 삼아 난장판을 친 게 아니었군요.’
-뭐, 장로놈 상판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꽤 재밌었다만.
배후령은 허공을 침대 삼아 가로 길게 누워 있었다.
-설마 내가 사라지고 나서 마탑을 이기는 신인이 한 명도 나오지 못할 줄은 몰랐네. 하긴 내가 좀 규격외로 킹왕짱이긴 했지.
‘왜 전부 무너트리지 않고 첨탑 하나만 없앴어요?’
-그야 당연하지. 난 애새끼들한테 숟가락을 떠먹여주는 보모가 아니니까.
배후령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탑이 개 같은 놈들이라면 그 개놈들을 이기지 못하는 애들은 뭐냐? 그 개놈들의 개가 되어 헥헥거리면서 50층 돌파하는 놈들은 또 뭐냐고.
"......."
-얌마. 김좀비 니가 잘 나가서 체감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쟤들도 다 헌터야. 50층까지 올라온 헌터. 강자(强者)들이라고. 초보자 시절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났는데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해야지.
"......."
-첨탑 하나 없애준 걸로도 나는 도의를 다했다.
과연.
그건 참으로 배후령다운 말이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배후령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게 내버려둘 것인가. 자기 자신을 책임지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
그저 맨 마지막 태도만이 그와 내 차이점이겠지.
“보조작가님.”
"응?"
“부탁이 있습니다.”
그 하나의 차이점이 나로 하여금 입을 열게 했다.
“검제교를 비롯해서, 다른 성좌를 모시는 신도들을 한 명씩만이라도 불러주세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째서?”
“저는 헌터입니다. 헌터가 할 건 정해져 있지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았다.
“다음 스테이지에 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