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잿빛 거미. (1) >
1.
살면서 한번도 시원한 바람을 쐬본 적 없는 것 같다.
가을에 단풍잎의 향기는 고왔다. 아무런 향기도 없었으므로. 봄은 싱그러웠다. 여름에선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 있어서, 어느 것이든 역겨웠다.
‘잿빛 거미’는 가을이면 죽고 싶었다.
-마녀족.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마녀(魔女)란 단순히 마법을 부리는 마술사를 뜻하지 않았다. 이곳 세계의 언어에서 Niglus-Kukulu, 마(魔)는 온갖 혐오와 경멸의 뉘앙스를 품었다. [버림받은], [신성모독적인], [23번째의], [저주스러운].
여(女)는 성별만 의미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곳에선 성별이 네 종류가 넘었다. 남녀의 이분법은 통용되지 않았다. Mirgal. 그나마 적절한 번역어를 찾으라면 [회색]이다.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삼원색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운데 [회색]은 다른 성별의 씨앗을 받아야만 후계를 생산할 수 있었다.
[저주받은 회색의 종족].
마녀족.
‘잿빛 거미’가 태어난 계절은 가을이었다.
-불쌍한 것.
아마 어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을 거다.
-이런 세상에 뭣하러 태어나서….
어미는 막 태어난 아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어미가 중얼거린 말이 전부 아이에게 이해되리라는 것. 아이는, 천성적으로 축복을 받고 태어나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 이미 태내에서부터 많은 걸 들었고 많은 걸 느꼈다는 것.
어미는 천재를 낳았으나 그 사실을 미처 몰랐다.
-불쌍한 것…….
한줌의 물기.
조금의 핏기.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과 이마를 넘겨주는 손길. 사랑을 가장한 동정, 위로를 흉내낸 체념, 삶으로 위장된 죽음. 냄새. 엄마의 냄새.
가을의 냄새.
-뭣하러 이런 곳에…….
잿빛 거미는 세상이 싫어졌다.
2.
-나는 장로에게 별 감정이 없다.
배후령이 말했다.
-나한테 감정이란 건 행동이야. 좀비야.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지, 그것도 행위다.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껴질 뿐 아니냐고? 글쎄? 살아지는 대로 사는 놈들은 그러겠지. 난 아니야.
배후령이 팔짱을 끼었다.
-내가 장로를 신경쓰지 않기로 한 건 전적으로 내 결정이다. 만약 나랑 같이 탑을 오르자고 권유했으면, 그야 그놈은 나를 따라왔겠지. 친구가 되자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정했어. 장로뿐만이 아니야! 나는 단 한 명의 동료도 만들지 않았지.
나는 물었다. 왜 그랬냐고.
-이 세상에는 동료를 얻을 기회조차 없는 사람이 무수하니까.
배후령은 마탑(魔塔)을 올려보았다.
-친구란 행운이다. 연인조차 우연이야. 김좀비. 네가 수많은 동료를 얻고, 친구와 사귀고, 스승을 섬겨,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건 모조리 행운에 빚져 있다. 네가 노력해서 거머쥔 보물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지.
뚜벅.
마지막 계단을 밟아 동굴을 나왔다.
-그런 행운이 누구한테나 허락된다고 생각하진 마라.
나는, 이미 배후령이 앞서 바라보던 첨탑을 뒤따라 올려보았다.
-곁에 아무도 없는 인생이 있다. 끝까지, 죽을 때까지 행운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 기대했다가 배신당할 뿐인 삶이 무수하다. 그런 놈들은 결국 포기해버려. 단념해버리고. 더 이상 바득바득 살아야 할 이유,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마탑은 실로 마(魔)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건물이었다.
건물이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거점이다. 문이 있고 창문이 있어서, 세상으로 나가고 바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마탑은 문을 두지 않았다. 꼭대기부터 지하까지 오직 흑(黑)으로 물들었다. 해를 반사하는 흑빛이 아니라 햇살마저 집어삼키는 흑색.
그러기에 마탑은, 건물이 아니라 몸을 닮아 있었다. 세상의 연장선이 아니라 세상을 거부하기 위한 의지로, 손가락처럼 생긴 탑은 땅에서 솟아 하늘로 뻗어 있었다.
-나는 그런 놈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그 손가락을, 나는 고개를 들어 노려보았다.
-동료 따윈 없어도 좋다.
마음속으로 초를 세었다.
-네 인생을 바칠 사랑을 만나지 못해도 좋다.
23초, 22초, 21초…….
-운명이 너에게 행운을 허락하지 않아도, 여전히 좋은 것이다.
18초.
-그럼에도 여전히 너는 위로 올라갈 수 있다.
15초.
-보아라! 나는 검제다. 홀로 이 세상의 정점에 올랐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올랐는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야.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간 놈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 엿이나 쳐먹으라지!
5초.
-나에게 없는 자. 아무도 없는 자. 바로 너희에게 보여주기 위해, [증명]해주기 위하여 나는 탑에 올랐다! 어느 누구도 너희에게 의미가 되어주지 못했지만.
1초.
-너희는 이미 내게 의미가 되어준 것이다.
삐이이익.
머릿속에서 잡음이 튀었다. 누군가가 전음(傳音)을 쏘려 하고 있었다. 마탑이었다.
그저 23초 넘게 바라만 봐도 마탑에선 반응한다. 시스템이다. 우리를 쳐다보지 말고, 지켜보지 말고, 감히 넘겨보지도 말라는 경고다. 회귀에 먹혀 사라진 시간선에서 나는 이 불문율을 이용한 적 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으. 거기 누구신데 꼬라봅니까?」
예상대로 마탑의 대변인은 전음을 보내왔다.
「좋은 말로 할 때 눈깔 까십쇼. 저희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거든요오? 정신병자들이랑 일일이 놀아줄 시간도 없다 이겁니다. 저어는, 물론 미친 또라이들을 좋아하고, 그놈들을 잡아다 고문해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운 좋게도 저희가 바빠서…… 응? 뭐야?」
잠에 찌든 목소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보조작가랑 같이 있잖아? 야, 씨, 저 개 같은 탈옥수가!」
삐익!
전음의 파장이 거세졌다. 마탑 대변인이 말한 대로 내 옆엔 보조작가가 서 있었다.
마탑을 올려다본 사람. 23초(禁忌)의 금기를 범한 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조작가 역시 나와 함께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쭉 마탑을 노려봤다.
「댁은, 너언, 죽었습니다! 어디서 뻔뻔하게 대가리를 들이밉니까? 어? 그럼 작가 새끼랑 같이 있는 건? 네가 사왕인가 뭔가 하는 그 놈입니까? 이런 잡놈들을 봤나. 야! 무릎양말! 당장 거미님들한테 가서 보고해!」
또한.
우리 둘뿐만도 아니었다.
「......?」
삐이익!
「......얼씨구? 미친놈이 한둘이 아닐세?」
전음의 파장이 다시 한 번 울렁거렸다. 처음엔 나 한 명을 대상으로 목소리를 쏘아보낸 대변인은, 다음으로 보조작가를, 그다음으로 어딘가의 누군가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전음을 보냈다.
「오냐.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다 이거지? 좋습니다. 하, 재밌다 이겁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나올까봐 이미 정성스럽게 토벌대를 준비해뒀죠!」
삐이이익.
「다른 탑에서 근무 뛰던 식민지 주둔군까지 불러줬습니다! 하핫! ‘뼈가시의 후작’이라고 들어나 봤는지? 300년 만에 본부로 불려나와서 아주아주 전의가 충실하더군요! 당신들 몸속에 미세혈관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삐이익.
삐익! 삐이이익.
「……해주죠! 뭐야, 씨발? 진짜 뭔데. 야! 야! 아주 작정을……. 음, 이게 아니라. 어, 즐거운 소식을 알려드리죠. 지난 며칠 새 저희가 자랑하는 정예부대가 속속들이 소집됐걸랑요? 이렇게 대부대가 집결한 건 수백 년 만이라고요! 아하하! 좋아! 자아자아, 보십쇼오! 지금 낙천자(落天者)들이 출전 준비를 마쳤다고 저한테 보고가 들어왔습니---- .」
삐이이이이익!
삐이이익! 삑, 삐이익!
「다…….」
삐익, 삐이이익! 삑!
삐이이이이이익.
삑, 삐이이익! 삐이이익! 삐이익!
「.....…….」
수십.
「어…….」
수백.
「자,」
수천.
「장로님을 부르십쇼! 당장!!」
우리와 함께 반마맹(反魔盟)을 결의한 전원.
수십 갈래의 출입구로 동굴을 걸어나온 피신자들이, 노천주점에서 아무런 말 없이 술잔을 잡고 있는 헌터들이, 길거리를 거니며 평소와 같이 돗자리 상인과 흥정하던 신도들이.
[사랑과 정욕의 화신이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황야에 마지막 남은 검이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외로운 구도자가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망자를 울리는 방울이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마탑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역천(逆天)의 검을 들어올렸다.
시선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권력.
50층에 하나의 영원을 차려놓은 마의 둥지.
우리의 선전포고는, 그곳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난 아무런 후회가 없어.
배후령은 웃었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앞으로 수없이 태어날 불운아들, 불행아들을 위해 보여줬지. 올라라! 지금 너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 우연 따윈 뒈져버리라고 중지를 들어올려, 나처럼 올라가라. 위로. 더 위로! 더 위로!
더 이상 대변인은 내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우왕좌왕, 혼란에 빠져 허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뿐.
-뭐. 내가 미처 챙기지 않은 현생의 인간들이 신경 쓰인다면.
그리고.
-그놈들은 네가 챙겨봐라. 김공자.
끼이이이이이익!
그것은 울부짖는 비명이었다.
소리가 되길 거부한 소음이었다. 절규였다. 쇠가 쇠에 긁혀, 다섯 개의 첨탑이 일제히 진동했으며, 다섯 손가락이 손톱을 세워 어두운 하늘을 찢었다.
온몸이 갈갈이 물어뜯기는 것만 같았다.
“[탑의 통곡]이야.”
보조작가가 중얼거렸다.
수백 년 만이구나, 라고 그녀는 침을 삼켰다.
“……하나의 탑이 울면 [비웃음]. 도시 하나를 토벌할 만한 전력이 요구될 때 울리는 경고지. 두 개의 탑이 울 때는 [발길질]. 스테이지 하나를 정벌할 수 있는 전력이야. 세 개의 탑이 울리는 것은 오직 다른 세계 하나를 토벌할 때만. 네 개의 탑이 울리면 여러 곳…… 복수의 세계를 무릎 꿇리고자 할 때라는 뜻이야.”
“다섯 개의 탑이 전부 울렸군요. 지금은.”
“응.”
보조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다. 죽어라. 반드시 멸하리라].”
다섯 개의 탑 위로 그늘이 뒤덮였다.
누군가가 하늘에 돌멩이를 집어던진 걸까. 우중충한 하늘로 잔물결이 퍼졌다. 다만 그 물결은 새까맣고 또 새까매서, 50층의 먹구름도, 그나마 새어나오던 몇 줄기 햇빛도, 전부 집어삼켰다.
-좋다.
거꾸로 뒤집힌 그림자에서 하나, 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전쟁이 고픈 시절도 있는 법이지.
검은색 유성우.
-배고픈 애새끼들이 울어대는 데 그냥 넘어갈 정도로 우리 마탑은 박하지 않다. 울어라. 울고 싶으면 울어라.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떨어지는 유성 하나하나가 다 인영(人影)이었다. 온몸을 흑색 망토로 두른 마법사들, 마녀들, 거미라 불리는 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하늘을 뒤덮은 그림자가 거대한 소환진이란 걸 깨달았다.
마탑 또한, 전운이 드리웠음을 알고 미리 소환을 준비해둔 것이었다.
-너희에게 오늘은 천 년 만에 도래한 하루일지도 몰라.
콰앙!
유성을 품은 마녀들이 도시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쿠우웅! 노천주점이 박살났다. 허름한 판자집이 부서졌다. 쿠웅! 콰아앙! 셀 수도 없는 유성우가 길거리를 파괴했다. 비명이 울려퍼졌다.
온 도시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우리에겐 천 년에 더해지는 또다른 하루에 불과하단다.
터벅.
먼지구름 너머로 흑색의 거미들이 걸어나왔다.
어떤 이는 왼손에 수급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잘려나간 팔을 툭, 툭, 농구공처럼 가지고 놀며 싱긋 웃는 자도 있었다. 거미들이 걸어나온 먼지구름 저편에선 비명도 신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 따위가 끼기긱 울릴 뿐.
“사왕(死王)이라고?”
거미들이 중얼거렸다.
“우리 사냥감의 이름이 정말로 사왕이야? 탑도 정말 센스가 없어.”
“언제나 그랬지.”
“언제나 그럴 테고.”
거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는 도시의 서쪽 성문을 깨부셨다. 누군가는 북쪽의 술집. 또 누군가는 중앙 광장의 석상을.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은 그야말로 도시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옹기종기 곁에 모여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조금 더 멋진 이명일지도 몰라. 번역이 잘못됐을 수 있지. 사실은 저승을 거두는 낫이라거나, 망령을 위로하는 사제라거나, 좀 더 그럴싸한 이름일지 누가 아니?”
“좀 더 구린 이름을 잘못 말한 거겠지.”
“고마워. 반가워. 90년 만에 보는구나. 90년이 지나도 너의 재수없음이 한결같아서 참 다행이야.”
“원래 내가 같이 있는 사람들 마음을 평화롭게 달래준다고 정평이 났지.”
“인정하기 싫지만 말해주마. 제군! 너희의 개소리가 그리웠다!”
“네가 사실 개라서 그래.”
“이제 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인걸.”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서로 전음을 주고받았다.
거리 따윈 상관없었다. 도시 하나 정도의 간격은 무의미했다.
그들이 발하는 오러가 도시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향했다. 다시, 전음을 받은 거미는 또다른 동료에게 오러를 쏘았다. 내 감각에는 수 천 명의 거미들이 주고받는 오러가 선명히 느껴졌다.
만일 이 광경을 하늘에서 내려본다면. 마치.
“거미줄 같네.”
내가 툭 말한 순간이었다.
도시를 뒤덮은 거미줄이 멈추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들이 느껴졌다.
-----네가 사왕이니?---------
일제히. 수천 갈래의 혓바닥이 속삭였다.
누군가의 입술이 움직였다. 오러가 흘렀다. 그것은, 말하자면 숫자의 폭력이었다. 그다지 적의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딱히 저주를 담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수천 명의 거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는 것만으로 일순, 나의 머릿속이 흔들렸다.
‘그래.’
머리에 피가 돌았다.
‘이게, 검제가 상대한 자들.’
심장이 피를 펌프질했다.
‘도시의 지배자들.’
나는 칼자루를 쥐었다. 반짝이, 아니, [수호의 여신] 휘야가 진동했다. 한 마리의 나비가 거미줄에 투신할 적에 그것을 자살이라 부를지 아닐지는, 오직 나비의 날개짓이 결정한 일이리라.
“사람 잘 봤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사왕. 검제의 후인입니다."
그 순간, 수천의 거미들이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