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잿빛 거미. (2) >
3.
피가 튀었다.
-커, 헉!
‘잿빛 거미’는 무심하게 시체를 내려보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유독 여린 누군가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모습이 재미있지 않은가.
‘잿빛 거미’는 미소를 지었다.
-떨어?
-힉, 아…… 히익…….
-왜 떨어?
‘잿빛 거미’는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사로잡힌 듯 누군가는 ‘잿빛 거미’의 코앞까지 끌어 당겨졌다.
-히, 이이익!
-신(神)이라며. 신이 떨면 안 되지. 떨고 있으니까, 신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잖아. 열심히 너희 모시던 종족들이 보면 실망하겠다.
아.
‘잿빛 거미’는 이제야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였다.
-별로 실망하진 않겠구나. 다 죽어서.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응. 난 그 말이 좋아. 언제 들어도 식상하지 않는 말이란 게 있고 그런 순간이 있는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 살려달라 비는 순간이 그런 거 같아. 지금 네 귀에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들리겠지? 살려줄 건지. 죽일 건지. 온힘을 다해서 내 말에 집중하고 있을 거야.
‘잿빛 거미’는 이번엔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진작 좀 그러지.
피가 튀었다.
-아아아아아악!!
-얘. 네 동료한테 들었어. 너희 신들이 사는 세계가 따로 있다며? 우리 입장에선 신계(神界)라고 불러야 하나. 거기 놀러가고 싶은데 가는 방법을 몰래 알려주면 안 될까?
-아, 으, 우윽…! 아아아, 살려, 살려주세요…!
-얘도 참. 칠칠맞게 울기는.
‘잿빛 마녀’는 자신이 손에 쥔 것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지금 알려주고 있잖니.
-....... ......, .......
-어서.
-스테이지…. 스, 스테이지…… [전송]…….
눈앞이 새하얀 빛에 감싸였다.
촉수처럼 감겨오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잿빛 거미’는 아하, 웃었다.
-이런 거였구나?
그 날 한 세계의 탑이 불타올랐다.
학살은 쉬웠다. [신족]은 극소수의 전사들한테 공략을 일임하고 있었다. 몇 명의 적을 제외하면 오러를 쓰지 못했고, 마법에 능숙하지도 않았다.
‘잿빛 마녀’는 솔직히 김이 빠졌다. 시시했다. 이래서야 [신족]보다 그들이 다스리던 다섯 종족을 멸하는 게 더 어려웠을 정도 아닌가.
-전대미문이네 다스림을 받던 종족이 정반대로 반역을 일으켜, 다스리는 종족을 멸망시키다니.
폴짝.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그곳엔 백금발의 아이가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라고 해. 간단히 공녀라고만 불러.
-이름을 물은 건 아닌데.
-음. 저 아이들의 안내자 같은 역할.
공녀는 손가락을 들어 산 아래를 가리켰다.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불가마였다. 마법으로 만든 흙벽이 도시의 외곽을 감싸 안았고, 그 속에서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구워졌다.
-하지만 다 죽거나 그보다 못하게 되었네. 뭐, 어쩔 수 없으려나.
공녀는 빙그레 웃었다.
-축하해! 이제부터는 너희가 이 탑의 지배자야!
-.......
-예상외의 사태지만 규격 외의 사태는 아니야. 규칙을 어긴 건 더더욱 아니지. 너희 마녀족도 정당하게 40층 스테이지에 참가한 종족이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금은 50층에 올라갈 자격이 있어.
‘잿빛 거미’는 침묵했다.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몰려들어와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그동안 [신의 종족]을 학살하면서 얻은 정보, 방금 공녀가 말한 정보를 종합하자, ‘잿빛 거미’는 어렵지 않게 진상에 도달했다.
-흐음.
다만 혼자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어 물었다.
-우리 말고도 사역되는 종족들이 있어?
-응.
-스테이지를 오른다는 것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50층에 가니? 자신들을 신으로 모시게 하고. 미천한 종족들을 부려서.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다 그러더라.
-그러니까 50층에 도착한 인간은 하나같이 신으로 대접받은 것들이구나?
-응. 적어도 지금까진 그래.
과연.
입가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왜?
‘잿빛 거미’는 대답했다.
-방금,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
4.
서로가 강적(强敵)이라는 사실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모두. 아무리 같이 합을 맞추는 게 수십 년 만이라지만, 설마 이제 50층에 올라온 애송이 하나 잡지 못할 정도로 감이 떨어지진 않았지?”
“감으로 싸우기엔 너무 늙었어. 다들 전음으로 작전을 주고받자.”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된다.”
거미들은 쇄도해오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전원이 오러를 써서 가속된 시간선상을 질주하고 있었다. 칠흑의 망토가 한번 팔락거리기도 전에 거미들은 수많은 문장을 말했고, 들었으며, 반문했다.
“왜?”
“저 사왕이라는 놈. 지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
도시 북쪽에서 수십 명의 거미가 동시에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동쪽에선 한 부대가 아예 성벽을 뛰어넘었다. 아마도 은신마법을 쓴 다음 빙 돌아, 내 뒤를 기습하려는 것이겠지.
“그래? 완전 초보는 아니라는 뜻이네. 나 지금 속도 올렸어.”
“더 올려봐. 저 새끼, 우리들을 눈으로 쫓고 있어.”
“더 올려?”
“더."
“그만.”
“지금은 어때? 여기서 전음을 더 압축해버리면 우리 중에 못 듣는 사람이 나오는데.”
“소용없군. 여전히 우리를 [듣고] 있다.”
거미 중 누군가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저 거미가 임시적으로 지휘권을 가진 모양이다. 지휘관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관제탑 역할을 맡은 건 분명했다.
“게다가 여유롭기까지 하다. 우리보다 시간의 유속이 빠르다.”
“엑, 거짓말. 말도 안 돼!”
“아무런 동작도 없잖아. 가만히 서 있다고. 그냥 듣는 척 시늉하는 거 아냐?”
“아니다. 저건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았다.
“……! 지휘권을, [뼈가시의 후작]한테 양도한다!”
관제탑이 다급하게 소리친 찰나였다. 나는 기억의 한 조각을 버려, 오러를 벼려내어, 관제탑의 목소리가 위치한 장소를 향해 쏘았다.
콰아아아앙!
관제탑이 지휘권을 양도한다 외친 것과 동시에 그녀가 숨어 있던 자리가 베였다. 그곳은 허름하여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았던 3층 집단주택 발코니였다.
"------."
거미들이 숨을 멈춘 기척이 일순, 내 감각에는 뚜렷이 잡혔다.
“주목. 내가 [뼈가시의 후작]이야.”
성마른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관제탑을 맡았던 거미와는 또다른 인물이었다. 중얼거리는 어투에서, 나에 대한 격노를 억누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지휘권을 행사하지. 자작급 이하의 거미들에겐 전음을 불허하겠어.”
“……시발. 미친.”
“동의.”
“방금 세레나가 한 방에 떨어진 거야!?”
“죽지는 않았어. 이게 좋은 소식인진 모르겠지만.”
“아, 제발. 저 놈이 우리를 봐주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줘. 갑자기 싸우기 싫어지니까.”
“단계화.”
“병신들아! 전음을 두 단계로 나눠! 자작급 이상만 알아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속도를 높여! 나머지 명령은 각 지휘관이 부대한테 다시 한 번 전파하면 돼!”
“준비.”
“채용하지. 그리고 낙천자들은 폭격을 준비해.”
“속도 올려! 더! 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긴장해!”
“아니, 잠깐만. 모두 기다려봐. 조금 전 일격은 살천성의……."
찾았다.
“......!?"
최초의 관제탑은 최대한 나한테서 멀리 떨어진 거미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 거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수가 읽혔다.
나는 관제탑을 쓰러트린 직후 곧바로 도시의 북쪽에 신경을 집중했다. 물론, 가까운 곳에서 성마른 목소리가 ‘전음을 불허하겠어’라거나 ‘폭격을 준비해’ 등등을 말하며 마치 자신이 지휘관인 척 흉내내긴 했다.
페이크였다.
성마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뼈가시의 후작]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뼈가시의 후작]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휘관은 아니었다.
진정한 지휘관은 조금 전부터 [동의], [단계화], [준비]라고 짧게 짧게 지시를 내리던 자.
일부러 말이 툭툭 튀는 거미한테 지휘권이 넘어간 척하고, 진짜 지휘관은 암호와 같은 문구를 툭툭 뱉어내며 명령을 내렸다. 제법 정교한 페이크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저들끼리 미리 합의해둔 사안이었을 거다.
속지 않았지만.
“경고!”
나는 어깨를 젖혔다.
휘둘렀다.
장전된 일격이 쏘아졌다. 이번엔 더 강하게. 하늘을 베어 가른 검격은 그대로 도시의 북벽(北壁)을 싹둑 찢으며, 성벽 안에 매복하고 있던 어느 말 짧은 거미를 베었다. 자신이 무력화되기 직전. 그녀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회피 기동을 펼치는 대신, 동료들을 위해 소리 치는 것을 선택했다.
“타겟, 살천성급! 경고! 타겟----."
그리고 소리는 끊어졌다.
"......."
"......."
거미줄이 침묵에 휩싸였다.
우드득.
누군가가 이를 갈았다. 칫,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렸으며 퉷, 침을 뱉은 소리가 미끄러졌다. 하지만 정작 누구도 문장을 발음하진 않았다.
아무도.
나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신나게 떠들었던 게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수천의 정예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좋은 선택이에요.”
그러는 사이에도 공방은 이어졌다.
“지휘관이 있어 봤자 저격 당할 뿐이지요. 차라리 각자가 따로 놀면서 저를 공격하는 편이 낫습니다. 음. 기껏 수천 명의 대인원이 집결한 의미가 퇴색하긴 하겠지만요.”
“다만 제가 살천성급이라는 얘기는 잘못됐네요.”
북쪽에서 거미들이 쏘아올린 마법 폭격이 나를 덮쳤다. 쾅! 콰아아앙! 나는 푸른색의 마포(魔砲)들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눈여겨보며, 한발, 한발, 스텝을 밟아 피했다.
“제가 개보다 쎕니다.”
도시 외곽을 빙 돌았던 유격대가 나의 뒤를 쳤다.
총원 24인. 암살을 전문적으로 행하는 부대였는지, 스물네 명은 얼굴의 하관을 마스크로 가렸다. 그들이 검을 휘둘렀다. 동시다발적인 합공. 비록 진법(陳法)의 격에 도달하진 못했더라도 가히 완벽에 가까운 진형(陳形)이었다.
“아깝네요.”
나는 그들에게 경의를 담아 성검을 움직였다.
“40층에 오르기 이전의 저였다면 이걸로 죽었을 겁니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一式.
아사유검 韻死流劍.
주위가 삽시간에 혼란해졌다. 내 그림자에서 망령과 같은 손길들이 치솟은 것이다. 손길들은 거미들의 손목, 발목, 목, 세 군데의 목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커억!” “흑!” 거미들의 숨소리가 가로막혔다
“여러분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림자의 손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백 갈래의 손짓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들은, 건물의 외벽을 기어올랐으며 창문의 문틈에 스며들었다. “아,” "크읍!?” "말도 안……” 건물 안에서 여태껏 기척을 죽인 채 매복하고 있던 거미들이 쓰러졌다.
“마녀족.”
사방이 불타올랐다.
“어느 세계든 50층에 오르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거쳐야 하는 스테이지. 즉, 신이 되어 각자의 종족을 다스린다는 과제. 여러분은 원래 40층의 세계에서 발원하여 살아가던 종족…. 요컨대 헌터들에게 인도되는 입장의 피지배 종족이었다지요.”
“틀렸어!”
내 마천의 반경에 들어와 있던 한 명의 거미가 외쳤다. 실력이 높아,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손길들을 다섯 차례나 격퇴한 강자였다.
“우리가 잘못 판단했어! 저놈이 성좌들을 끌어들인 건, 우리에게 이기기 위해 성좌들의 힘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야! 반대야,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그러면, 젠장! 우리가 서로를 염려해서 공격 범위에 제약이 생기니까……!”
“하지만 여러분을 지배하던 헌터들은 실수를 저질렀어요.”
퍽.
다섯 차례의 공방은 여섯 번째로 이어지지 않았다. 손길이 그녀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거미는 기절했고, 혈도가 짚여 깊은 잠에 빠졌다.
“시발! 이거 침묵이 의미 있어?!”
“바로 여러분을 희생양으로 점찍었다는 거지요. 다섯 종족을 정성스럽게 보살핀다. 대신, 마녀족만은 모든 종족에게 미움을 사는 역할로 만들어, 신들에게로 향할 분노와 지탄을 대신 받게 한다.”
“맞다! 입 다물고 있어봤자 당할 뿐이다!”
“머릿수로 밀어붙여!”
“그건 좋은 전략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마침내 다섯 종족을 멸해버리고, 신으로 추앙받던 헌터들까지 섬멸해버릴 정도가 되어버린다는 가능성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요.”
“괴물이잖아……."
“폭격! 폭격! 폭격부터 먼저 하고 돌입해!”
“낙천자!”
거미줄이 요동쳤다. 거미들이 한 마디를 내뱉었고, 내가 다섯 마디를 중얼거렸다. 가속된 시간선상에 놓였다는 것은 똑같았으나 저들과 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류가 흐르고 있었다.
“저 미친놈을 통째로 지워버려!”
그다음에 벌어진 일들은 다음과 같다.
낙천자(落天者)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온몸에 특수한 마법을 두른 채 저 높은 상공에서 낙하했다. 그것이 자살 공격인지 아닌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뭐----."
땅을 박차, 탓, 곧바로 상공에 뛰어올랐다. 막 하늘에서 추락을 감행하던 거미들과 눈이 마주쳤다. 코앞이었다. 눈썹이 흔들리는 진도까지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 나는, 제일 먼저 낙하하고 있던 거미의 이마를 건드려 기절시켰다.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삼식第三式.
익사만검潮死滿劍.
다 합쳐서 일곱 명. 낙천의 부대를 오러의 격류로 집어삼켰다. 리더가 당한 모습에 단 1초라도 당황했던 것이 그들의 실착이었다. 낙천자들은 정신을 잃어 하염없이 추락하였다.
“언제나 가능성을 고려해야지요.”
나는 먼저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타앗! 차례대로 떨어지는 낙천자를 한 명씩 캐치하여, 땅바닥에 정중히 내려놓았다. 이미 기절해 있던 그들은 악몽에 시달리듯 신음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사실은 자신들보다 강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요.”
나는 양손을 툭, 툭, 털었다.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뿐이에요. 다 그렇게 서로 실수하고, 배우고, 가능하면 단점을 고쳐주면서 사는 거죠. 자고로 인생이란 그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분명히 저희도 서로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내 주변으로는 수백 갈래의 불길.
오러에 의해 형상화된 손길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왕……."
누군가가 중얼거린 것 같았다.
“아니, 대마왕이야……."
음.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선동과 날조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