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 층층. (2) >
4.
결국 퇴원하는 데 열흘이나 걸렸다.
열흘이라는 기간도 사실 상당히 무리한 것이다.
“공자 씨. 이 세상에 완치(完治)란 건 없어요.”
약제사는 내 붕대를 체크하며 말했다.
“다 나은 것처럼 보일 뿐이지 몸은 뭔가를 잃어요…. 항상. 뭔가를.”
“이젠 완전 팔팔한 기분인데요?”
“그게 바로 착각이라는 거예요….”
약제사가 한숨을 쉬었다.
“가령, 공자 씨는 근육이랑 혈액순환에 오러를 쓰지요. 덕분에 근육이 어마어마한 효율성을 자랑하게 되어서 좋은 점밖에 없어 보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오러를 쓰지 못하게 될 때 엄청나게 약해진단 뜻이에요.”
"뭐. 딱히 상관없지 않을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전 오러에 아주 능숙합니다.”
“여기가 바깥세상이었으면 즉사했을 거예요. 공자 씨.”
“바깥에는 오러도 마나도 없으니까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약제사는 표정 변화 없이 붕대를 스윽 감았다.
“예. 어차피 저희는 바깥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지요. 하지만 이젠 설사 돌아간다하더라도 살 수 없어요. 알겠지요? 공자씨의 몸은 좋은 점만 얻은 게 아니에요…. 특정한 환경에 맞추어져서 그 환경에서만, 생존하게 된 거예요.”
"......."
“응. 다 됐어요.”
약제사는 붕대를 꽉 맸다.
“싸움은 낭만이 아니고 상처는 훈장이 아니에요. 적어도 저 같은 사람들이 보기엔…. 되도록 몸이 아니라 말로 난관을 해결해주세요.”
“앞으로 또 다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은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말했다.
“되도록 말로 해결하라는 조언은 유념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퇴원하자마자 다섯 개의 첨탑, 마탑 본부 앞에 선 것이다.
말로 풀기 위해서.
5.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위이이잉-
당분간 오러를 자제하라는 약제사의 권고에 따라 전음(傳音)은 쓰지 않았다. 대신 마법 아이템인 음성 확장기를 입술에 갖다댔다. 전음만큼 깨끗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꽤 괜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아. 마탑에 계신 여러분 잘 들리십니까-?”
-.......
묵묵부답.
첨탑엔 창문이 없었다.
흑요석처럼 표면이 새까맣게 반들거릴 뿐.
하지만 모습이 안 보일지라도 거미들은 다 귀를 쫑긋 세웠을 거다. 물론 우리편, 반마맹(反魔盟)의 신도들 또한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러분에겐 이제 승산이 없습니다-.”
수천의 거미와 수천의 신도가 대치한 한복판에서 나는 한가로이 말했다.
“잿빛 거미는 저에게 패배해서 잡혔습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을 유격대도, 저희 세계를 공략하긴커녕 역으로 전부 포로가 되었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여러분에겐 승산이 제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짓했다.
“우고르.”
뒤쪽에서 대기타고 있던 우부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부르카는 미리 준비한 포대기를 가져와 차곡차곡 첨탑 앞에 쌓았다.
이불로 돌돌 말려진 마탑의 거미.
우리 세계를 침범했다가 사로잡힌 포로들이었다.
“제기랄!”
“이거 풀어! 풀라고, 개새꺄! 풀어!”
“소리치지 마…. 괜히 더 쪽팔려……."
거미들이 이불 밖으로 머리만 내민 채 바동바동거렸다. 멀리서 보면 도통이벌레처럼 생겼겠지.
나는 포로들의 몸 위에 편하게 앉았다.
“끼악!”
“무거워?!”
“보시다시피- 여러분이 자랑하는 유격대 지휘관들은 모두 잡혔습니다-. 여기에 데려오지만 않았지 수백 명의 일반 거미들도 다 잡혔고요-. 에, 말하자면 여러분의 희망은 개박살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항복하겠사옵니다아!
다섯 채의 첨탑 가운데 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마탑 제5본부는 예전부터 사왕님을 흠모해왔나이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항복하자 항복하자 내부에서 논의됐는데 이제 와서 말씀드리게 되었사옵니다!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선처해주시옵소서, 사왕 전하! 대가리 박으라면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대가리로 콩콩 뛰어가겠습니다! 개처럼 구르라면 구르겠나이다! 아니, 소신들은 이미 개가 되었습니다아! 왕! 와앙! 사왕 만세!
음.
굉장하군.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야 없는데…."
-야 이 5본부 씨이바알놈들아!!
우우웅!
그 즉시 다른 첨탑에서 성난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가 사람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네? 방금 못 들었습니까아? 저흰 사람이 아니라 개입니다. 개. 멍멍이라면 얼마든지 이럴 수 있습죠.
-이, 이런 개새끼들을 봤나! 장로께 받은 은혜를 벌써 잊은 거냐! 심지어 넌 총괄 대변인까지 맡았잖아!
-그 장로님이 사로잡히지 않았습니까아. 더 이상의 항전 따윈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대변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거 원래 2본부에서 5본부까지 일주일씩 번갈아서 맡기로 한 직책이거든요? 근데 너희들이 500년 전부터 은근슬쩍 저한테 짬처리시키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500년짜리 짬처리를 당해본 기분을 압니까아 이 개새끼들아?
-지,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럼 지금 하지 언제 할까요? 니들이 전부 뒈져서 무덤 아래서 퍼잘 때 할까요오? 잘 있어라, 쓰레기들아. 만나서 서러웠고 살아서 씨발이었다. 난 탈주한다!
음.
역시 굉장하잖아.
‘가만히 듣고만 있긴 아까울 정도인데.’
내심 감탄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반대편 첨탑에서 위이잉, 음성이 퍼지기 시작했다.
-근데 5본부까지 나가리 되면 마지막 승산도 없어진 거 아니야…? 항복하자. 그냥.
-아니 너희까지 왜 이래!?
-유격대랑 끝까지 연락을 담당하던 곳이 우리니까 잘 알거든…. 쟤네 세계 장난 아니래. 살천성급 헌터만 두 명이 넘는다더라. 진짜 살천성이 보인 거 같다는 보고도 있었고….
-당연히 구라겠지! 그걸 믿냐!
-아냐. 난 촉이 좋아…. 검제한테 6본부 털릴 때도 딱 이런 기분이었어. 여기서 더 농성하면 국물도 챙기지 못할 거라고 내 촉이 얘기 해준다….
-촉은 뭔 놈의 촉! 와, 답답해 죽겠네!
-응? 뭐야? 지금 5본부에 3본부까지 투항 쪽으로 기운 거야? 그럼 더 볼것도 없네. 안녕하세요! 제2본부입니다! 저희도 이만 항복하겠습니다! 근데 지금 백기 들면 목숨은 살려주시나요?
-아, 사왕 전하! 제일 먼저 항복한 곳이 어디인지 부디 잊지 말아주소서! 5본부! 손가락 쫙 펴서 숫자 다섯! 5본부를 기억해주시면 성은이 망극하겠나이다!
오케이. 드디어 알겠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잠깐 기다려주세요.”
나는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바로 지난 열흘 동안 임시 치료소로 쓰인 건물이었다.
벌커덩.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니 그곳의 방구석에서, 잿빛 거미가 쭈구려 머리를 잡고 있었다.
“뭐야……?"
잿빛 거미는 내가 들어온 모습을 보고 얼굴을 들었다. 오늘 아침에 비해 인상이 퍽 초췌했다.
“갑자기 여긴 왜 왔어?”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고화질 스마트폰을 꺼내 잿빛 거미를 찍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의 장면을 찍어놓으면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여 장로님을 놀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쪽팔려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돌아왔다는 거냐? 하필 지금? 내 아이들이랑 항복 협상을 하는 이 와중에? 단순히 날 놀려 먹으러?”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죠?”
“이 미친 또라-----."
쿵.
나는 도로 문을 닫은 뒤 농성장에 돌아왔다. 건물을 나가던 순간, 등 뒤로 잿빛 거미가 뭐라 소리치긴 했다. 하지만 미처 들어줄 틈이 없었다. 이래 봬도 치열하게 협상을 벌이는 도중 아닌가? 딴짓을 할 겨를 따윈 없지.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예, 잘 알겠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항복은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당연히 여러분의 목숨을 보장하겠습니다. 원한다면 여러분이 앞으로 거주할 지역도 따로 제공해드리죠. 다만 그간 50층에서 누린 독점적 지위는 포기해야 하며, 여러분이 식민지로 삼은 이세계들도 해방해주십시오.”
바로 반응이 왔다.
-전하아! 매우 합리적인 조건이옵니다! 드디어 오랜 세월이 져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나니 모두 찬양하여라! 사왕 만세! 만세! 제 5본부입니다!
-개소리 집어쳐!
-그건 우리가 아니라 장로가 결정할 일이지만…. 협력은 할게….
-응. 목숨만 살면 됐지.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들은 고스란히 결과로 나왔다.
이후 반나절에 거쳐 항복이 이어졌다.
“마탑 제5본부. 다섯 번째 그물, 구망(權網). 휘하 사백팔십일인. 전원, 사왕 전하께 투항하옵니다!”
백상아리의 이빨처럼 다물려져 있던 첨탑 정문이 차례차례 열렸다.
철문이 열리는 순간에도 반마맹의 신도들은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긴장한 채 투항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마탑 제3본부…. 애망(哀網)의 둥지. 일천삼백삼십삼인. 모두 항복하겠습니다….”
거미들은 열을 맞추어 나에게. 그리고 내 뒤에 선 신도들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제2본부. 소속 마탑. 노망(怒網)의 둥지. 칠백삼십육인. 얌전히 투항할 테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툭. 로브를 뒤집어쓴 일반 거미들은 로브를 벗었다. 툭. 고깔모자를 쓴 지휘관들은 모자를 벗어, 무릎 꿇은 자리 앞에 공손히 내려놨다. 툭.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들고 있는 수천 자루의 지팡이가 땅에 놓였다.
툭.
툭.
"......."
툭.
아무런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항복한 거미들 또한, 있었다.
천년마탑의 지배가 바야흐로 종결을 고한 것이었다.
"......."
내 등 뒤에 도열한 신도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침묵했다.
때때로 이빨을 드러내며 거미들에게 분노를 토하려는 자, 항복한 포로를 해코지하려는 자가 없지는 않았다.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랑과 정욕의 화신’은 포로의 처분을 사왕에게 양도합니다.]
다만 신도들을 막아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는 포로의 처분을 사왕에게 양도합니다.]
[‘망자를 울리는 방울’이 포로의 처분을 사왕에게 양도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포로의 처분을 사왕에게 양도합니다.]
[‘외로운 구도자’가 포로의 처분을 사왕에게 양도합니다.]
이외에도 이번 전쟁에 참가한 성좌 전원. 내게 포로에 대한 권리를 일체 양보하였다.
그것이 내가 성좌들한테 요구한 ‘퀘스트 보상’이었기에.
나는 이번 전쟁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웠다. 누가 봐도 제일 큰 공훈을. 성좌들에게 거의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며, 고로, 모든 포로들의 생사결정권을 넘겨받았다.
“……이 자들을 어떻게 살려둔단 말인가.”
“조용히 해.”
[영원한 평야의 군마]의 사도가 분에 이기지 못해 얘기를 꺼내자, [사랑과 정욕의 화신]의 사도가 담담히 말을 가로막았다.
“별들께서 바라시는 바야.”
"......."
“그리고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고. 우리한테 처분이 맡겨지면 그 뒤에 기다리는 건 지옥도밖에 없어. 고문. 심문. 모욕. 온갖 분풀이. 피의 축제가 개막하겠지. 차라리, 사왕 같은 외부인한테 맡기는 게 마음 편해.”
사도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마음속 깊이 이번 결정을 납득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안 한다.
그래서, 나는 아예 거미들을 사자세계로 데려갈 계획이다.
지정족이 패자가 된 대륙으로.
‘거리가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
지금까지와 달라질 건 별로 없다.
모든 종족이 참여한 화하평의회(火河評議會)에 마녀족이라는 새 종족이 하나 더 들어올 뿐.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땅에 물들일 뻔한 핏빛이 하늘에 대신 옮아, 노을이 졌다.
“결국 제1본부는 항복하지 않았네.”
[보조작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 거야, 사왕?”
"......."
마탑 최후의 보루는 투항하길 거부했다. 다섯 첨탑 가운데 네 채가 항복했건만,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외치며 철문을 걸어잠근 것이다.
흑요석 같은 탑 표면에 붉은 노을이 비추었다.
“어쩌면 희생양이 한 곳쯤 필요할지도 몰라. 네 뒤를 봐. 다들 아무런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을걸.”
[보조작가]의 말이 맞았다.
"......."
"......."
사도들을 포함해서 일반 신도들은, 항복하지 않은 마지막 첨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낯빛에서 아직 해갈되지 않은 원망. 아마 앞으로도 풀릴 길이 없는 분노가 고개를 드민 채 으르렁거렸다.
이미 항복한 거미들도 그 공기를 읽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50층에 자리한 모든 세력은 지금 바로 이때, 학살을 묵인한 것이다.
“당신은 영웅이야.”
[보조작가]가 말했다.
“50층을 해방한 영웅. 하지만, 영웅이란 무엇보다 누구 편을 들을지 먼저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해. 당신이 이제 와서 실수하지 않기를 바랄게.”
"......."
내가 입을 열어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우고르.”
툭.
거대한 손이 내 어깨 전체를 덮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올려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애비여. 상황은 이해되었다.”
우부르카.
“나를 저 첨탑에 보내다오.”
나의 아들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씨익 웃었다.
“아마도, 나라면 저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