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 다음 세계. (3) >
6.
보름 동안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자학자에 내리는 채찍’이 별자리를 되찾습니다.]
[‘해를 거머쥔 권무’가 233년 만에 새로운 신도를 모집합니다!]
[‘남동을 수호하는 성문지기’가 봉인에서 풀려납니다.]
[‘밤하늘을 할퀴는 손톱’이 봉인에서 풀려납니다.]
[‘실패한 독백’이 봉인에서 풀려납니다.]
우선 마탑이 봉인해둔 다섯 자리의 성좌가 해방되었다.
모든 성좌가 [광전사]처럼 기특한 신도를 가지는 행운을 누리진 못했다.
길게는 900년, 짧게는 200년, 그야말로 유구한 시간 동안 성좌들은 봉인되어 있었다. 한때 영광을 자랑했을지도 모를 별자리는 쇠퇴하여 단 한 명의 신도조차 남지 않은 자 또한, 있었다.
“나를 모시던 맨 마지막 신도는 302년 전에 죽었더구나.”
한 성좌가 중얼거렸다.
흑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성좌였다. 머리카락이 어찌나 긴지 방 전체의 카펫에 흘러내렸다. [밤하늘을 할퀴는 손톱]은, 그 이명대로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로 허공을 올려보았다.
“하긴 원래부터 마이너한 성좌였지. 나는.”
“어떤 권능을 관장하시는데요?”
“권능이랄 것도 없단다. 만일 네가 살면서, 방의 침대에 누워, 침대가 아닌 곳에 누워, 단 한 번이라도 밤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뒤 손톱으로 할퀴려 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지지.”
"......."
“어떠니?”
밤하늘의 성좌가 소리없이 미소 지었다.
“마이너하지 않니?”
“아니요. 멋진데요. 아니, 신 행세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런 성좌를 잿빛 거미는 대체 왜 못 박았답니까?”
“글쎄. 그 아이만의 이유가 있었겠지.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나에 대한 메시지가 뜨는 것이 짜증났을지도. 그래도 성좌이니 내 힘이 탐난 것일 지도. 어쩌면 나를 살려 주기 위한 것일 지도.”
“네?”
“어느 쪽이든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지 않는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심장에 대못이 박혀 수백 년 동안 마력을 뽑아 먹힌 성좌는 어딘지 그늘에 잠긴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증오는 강렬한 에너지야. 발신하는 자도 수신하는 자도 존재가 한층 뚜렷해지게 마련이지. 사랑만큼이나, 탐욕만큼이나, 희망만큼이나, 죽어야 할 누군가를 살아가게 해준단다. 사왕. 우리의 구세주야. 너는 나의 말을 이해하겠니?”
“예."
나는 4000일의 영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씀인지 압니다.”
밤하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잘 알지요.”
"......."
여러 일이 있었다.
거미들은 첨탑을 잃었다. 대신 산더미 같은 결투장을 얻었고, 덤으로 사자세계로의 이주권을 얻었다. 산와족이 예의 건축 실력을 발휘하여 거미들이 살아갈 거주구를 만들어냈다.
이주지는 다양했다. 신대륙에서 살길 원하는 자, 라비엘의 제국에서 살길 원하는 자, 바빌론에서 살아가길 원하는 자 등등.
“대부분이 백 년 이상을 산 마법사들이라니! 완전 고급 인재잖아!”
사시사철 인력부족 인재난에 시달리던 흑룡주는 환희했다.
“이 사람들 우리가 마음대로 영입해도 괜찮지? 응?”
“딱히 상관은 없는데요. 누가 결투 신청하거든 막지 마세요.”
“응? 그게 뭔 소리야?”
나는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흑룡주가 한탄했다.
“왜 어떤 세계를 가든 인성이랑 능력 둘 다 갖춘 애들은 없을까?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지.”
“제가 있잖아요.”
“그래. 니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야.”
흑룡주는 엎드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거듭 말하지만 내가 누구 평가할 처지는 아니지…. 어쨌든 고생 많았어.”
“여긴 별 문제 없어요?”
“네 문제나 신경써. 여기 문제는 우리가 막으면 되니까. 그거 아니? 하무스트라 말이 언제 우리들 활약을 모아서 스핀오프를 내자더구나.”
“아니 그게 뭔….”
“나는 먹방 장르에 입후보했어. 제목은 블랙 드래곤 푸드 파이터가 어떨까 싶은데. 내가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걸 먹을 뿐인 이야기야. 팔리겠지?”
“아니 진짜 뭔… 아나스타샤한테 힐링이 필요하다는 건 잘 알겠네요. 좀 쉬어가며 하세요. 저 갑니다.”
그래서 블랙 드래곤 푸드 파이터가 만들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마녀족들에 대한 영입 경쟁은 확실하게 벌어졌다.
이따금 거부할 수 없는 생사결 신청이 들어온다는 것을 감안해도, 마법사들은 분명 귀한 인재였으니까.
“자네가 지금까지 받은 제안이 무엇이든 그것의 2배를 연봉으로 제시해주겠네.”
그 경쟁의 최종 승자는 백작이었다.
“심지어 우리 상련에는 요정족이라는, 종족이 통째로 상재에 밝은 인재풀이 있다네. 다스릴 맛이 있는 부하들이 즐비한 셈이지. 흑룡, 만신전, 다 좋은 곳이고 명분이 있네만. 가서 책임감이라는 미명 아래 개고생할 이유는 없잖은가?”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와앙! 왕!”
“옳지, 옳지. 말귀를 알아듣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고양이처럼 울어주게나.”
“냐앙! 냥! 덤으로 제 목숨도 좀 지켜주시면 안 될까요? 결투 같은 거 진짜 하기 싫은데….”
“그건 불가능하네만.”
“빌어먹냥.”
그리하여 일부 거미들은 본래 마탑에 충성을 맹세했다가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였고 다시 상련에 충성을 맹세했다. 불과 보름 안에. 인생사의 본보기 아닌가?
하지만 어디에도 적(籍)을 두지 않은 거미 역시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니.”
당연하다면 당연, 구(舊) 마탑의 수장, 잿빛 거미였다.
“뭔가 계획 있으세요?”
“책임을 져야지.”
잿빛 거미는 종이컵에 담긴 맹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내 앞으로 온 결투장들 봤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무가 부족한 50층의 생태계가 진지하게 걱정될 정도로 많은 양의 종이를 떠올리면서.
“많더라고요.”
“응. 지금도 계속 오고 있을 테고…. 받아야지. 매듭을 지어야지. 그래야 좀 나아갈 수 있지 않겠니. 무슨 말인지 알겠니?”
잿빛 거미의 말은 중의적인 것이었다.
결투장을 보낸 사람들 중에는, 분명 그런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잿빛 거미의 피륙을 찢지 않고서는 내장이 쑤셔서 잠들 수 없는 사람들. 잿빛 거미의 시체를 볼 때까지 냉수조차 입 안이 탈 만큼 뜨겁게 느껴질 이들. 어떤 식으로든 잿빛 거미와 결판을 내지 않는 이상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예."
거듭, 나는 4000일의 영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씀인지 압니다.”
그리하여 잿빛 거미는 텅 빈 황야를 자신의 새로운 둥지로 삼았다. 잿빛 거미에게 원한을 가진 자는 누구든 그곳으로 와서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녀가 혼자서 보내는 날은 거의 없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때가 온다면.
1000년이 다시 1000번을 흘러도 요원하겠지만, 정말로 언젠가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드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 날이 오면. 늘어진 정오의 햇살 속에서 한 모금의 물을 한 시간 동안 마실 수 있는 호사가 허락되는 그런 날이 온다면.
비로소 잿빛 거미도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천 년 동안 머물렀던 곳에서 일어나, 마침내 다음 세계를 향해서.
내가 물었다.
“그때가 오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잿빛 거미는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서, 더 이상 허세도 부리지 않고 안타까움도 느끼지 않는 웃음이었다. 완전한 수용이 낳는 하이얀 밝음이 그 웃음에는 있었다.
“글쎄다. 그만큼 내가 운이 좋다면.”
잿빛 거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밤이었고, 그녀가 머무르기로 결정한 곳에는 천장이 없었으므로, 그곳에는 별 깔린 밤이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잿빛 거미는 그 곳을 향해 마른 손가락을 뻗었다.
“그렇게 운이 좋다면, 탑을 오를 수 있겠지.”
탑.
“다시 도전하시게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거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잿빛 거미도 더 말하지 않았다.
우리 세 명은 다만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7.
순리대로 흘러간 보름.
하무스트라의 신도들에게 ‘카페 플라네타리움’에 알바 자리를 알선해주는 걸 끝으로 나의 일은 마무리되었다. 카페 종업원 옷을 입은 하무스트라를 보고 보조작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보고 싶었어요, 도서관장님! 꺄악! 이게 웬일이야!?”
“정말로 이게 웬일인가 싶구려……."
하무스트라는 썩은 눈으로 나를 원망하듯 쳐다봤다. 원망할 이유가 다소 충분하다 할 수 있는데, 열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일제히 하무스트라를 붙잡아 그 뺨에 열렬히 부비부비를 시전했거든.
하무스트라의 작은 체구를 생각해보면 현재 상황을 소파 틈새에 낀 햄스터라 표현해도 무방하겠지.
“공자여. 이들이 내 스토커나 다름없거나 그보다 좀 더 무시무시한 존재란 걸 말해준 적 없소?”
뺨이 쫙쫙 늘어지며 햄스터가 토로했다.
“본인의 인연이 닿은 자들이니 구해준 거야 고맙소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데려와달라 부탁한 적은……."
“이제부터 절대로 놓치지 않을게요, 관장님!”
“영원히 함께예요.”
“여기 알바생으로 일생을 마감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산다는 건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소……."
잘 됐네. 잘 됐어.
물론 잘 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하무스트라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마호스 군 사령관이 보조작가에게 물었다.
“어, 잠깐만. 보조작가. 그대는 나와 함께 51층에 오르기로 하지 않았나?”
“응? 좆까.”
보조작가의 뇌보다 혀가 먼저 대답했다.
마호스 군 사령관이 좌절했다. 보조작가는 그런 마호스 군 사령관을 바라보면서 쩔쩔맸다.
“아니 그게… 음. 있지. 인생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게 뭐지?”
“덕질이야.”
플라네타리움에 썩은 눈을 가진 자가 하나 늘었다.
보조작가는 도리어 성을 냈다.
“아, 뭐! 이건 진짜 리얼 주인공만 할 수 있는 대사거든?”
부디 행복한 덕질하세요.
하늘 아래의 인간들이 각자 손을 뻗어 세상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자신이 기댈 곳, 잠시 서 있을 곳, 스쳐 지나갈 곳을 조심히 건드려보는 동안. 하늘의 별자리들은 나를 찾아왔다.
“너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건지 많이 고민했단다.”
[밤하늘을 할퀴는 손톱]이 성좌들의 대표격으로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고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열두 성좌들과 함께 의논했지. 한 명의 헌터에게. 그것도 이제 막 50층에 올라온 아이한테, 무엇을 보상으로 내릴지 여러 성좌들이 함께 고민한 건……. 유례가 없구나.”
“당신 덕분에 제 귀여운 꼬맹이랑 재회했으니까요….”
[자학자에 내리는 채찍]이 말을 덧대었다. 그녀는 바닥에 퍼진 밤하늘의 머리카락을 만질만질거렸다.
“굉장히 좋은 무기라도 선물할까 싶었는데, 이미, 당신 허리춤에 차인 성검이 더 굉장해 보이고….”
“솔직히 별로 물욕이 없는 타입 같아서 곤란했단다.”
하지만, 이라고 [밤하늘을 할퀴는 손톱]이 말했다.
“너는 검제의 후인을 자처하는 헌터니까. 만약 검제라면 어떤 선물을 그나마 반길 것인지는, 다행히 우리 중 몇몇은 알고 있었다.”
밤하늘이 양손을 모았다.
“이게 너의 정답이길 비마.”
화아아아.
연한 빛이 내 몸을 감쌌다.
[‘밤하늘을 할퀴는 손톱’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시선이 점점 새하얘지는 가운데.
“언젠가 당신만을 위해 퀘스트를 지어 자아내는 성좌가 나타나길 빌게요…. 사왕. 저희는 비록 당신의 전담 성좌가 아니지만. 그런 별자리가 존재한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이라고 해요….”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학자에 내리는 채찍’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1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이어졌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2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반마맹에 참여한 별자리들.
[‘망자를 울리는 방울’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3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하나 하나, 헌터가 다음층에 올라갈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권리를 지닌 이들.
[‘황야에 마지막 남은 검’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4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줄의 목소리를 이루어 나에게 고했다.
[‘해를 거머쥔 권무’가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남동을 수호하는 성문지기’가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6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실패한 독백’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7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외로운 구도자’가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8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사랑과 정욕의 화신’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59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합니다.]
[6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사왕의 레벨이 성장합니다.]
[스킬 슬롯이 확장됩니다.]
다음 세계가 눈앞을 물들였다.
[이제 당신의 헌터 랭크는 S급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