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16화 (316/400)

316화.  < 팬입니다. (3) >

4.

혈마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방불케 했다.

5.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응......?"

뭐지. 방금.

영겁의 시간이 흐른 같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만 지난 것 같기도 하다.

인간에게 시간을 헤아리는 감각이 있다면 그곳이 잠깐 마비된 느낌. 굳이 예를 들자면 약제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수면마취를 받았을 때가 꼭 이런 느낌이었다.

“사왕님. 사왕님! 정신 차리세요, 사왕님!”

어느덧 나는 누워 있었다. 언제부터, 왜, 어디에, 내가 누워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눈앞에서 울먹이고 있는 사람의 얼굴. 소년이, 너무나도 익숙한 소년이 내 양손을 붙잡은 채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매달리고 있다.

“괜찮으신가요? 정신 좀 드세요?”

“여긴……."

“사왕님께선 혈마와 싸우면서 상처를 입으셨어요. 비겁하게도 1대 1로 싸우던 도중에 혈마교의 정예들이 합류해오는 바람에….”

소년은 내 옷소매에 눈물을 훔쳤다. 과장 좀 보태 눈의 억제기가 고장나버린 것 같았다.

정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서, 보고 있는 내가 걱정스러워졌다.

“싸움…. 상처……."

“아, 함부로 움직이시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소년이 다급하게 말렸다.

“내상이 심하세요, 사왕님! 지금은 푹 쉬셔야만 합니다! 온몸이 엉망진창이라… 뼈들이 부숴지고 내장이 너덜너덜해져서…. 좀 전만 해도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으시는 거 아닐까 두려웠을 정도인걸요!”

그 순간이었다.

“---우욱?!”

소년이 말한 대로 전신에 격통이 몰려왔다. 오러를 돌려 몸 상태를 확인하려 했지만, 으드득! 기도(氣道)가 뒤틀렸다. 콰즉! 가시 달린 곤봉이 혈관 안쪽을 쑤셔 대는 고통.

“욱, 크흑……! 으……."

“아. 어쩌지? 어,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지.”

아파. 죽을 것 같아. 눈시울이 척척해진다. 뺨이 서늘해. 손끝에서 감각이 증발했다. 고통. 고통만이 남았다. 누군가가 귤 껍질을 까듯이 내 살갗을 한장, 한장, 발라내는 것 같은 느낌.

이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 따윈 없을 거다.

오직 죽을 만큼 죽어본 나이기에.

“아아.”

순간적으로.

의식의 저 너머에서 들뜬 숨소리가 어른거렸다.

“정말로, 어쩌면 좋지……?"

암전(暗轉).

"......."

눈을 떴다.

역시, 한참이 흐른 것도 같았고, 그저, 한숨만 쉬고 만 것도 같았다.

정신을 잃기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래도 정신이 어느 정도 맑아졌다는 것. 그리고 소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쟁반에 죽을 담고 오는 도중이라는 것일까.

“아, 해주세요. 공자님.”

“아."

성좌는 빈 그릇에 보이지 않는 수저를 떠다가 내게 먹여주었다.

소년은 죽 그릇에 나무로 만든 수저를 떠다가 내게 먹여주었다.

"......."

응?

“맛이 어떠세요?”

성좌가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소녀가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모처럼… 공자님이 제일 좋아하는 죽을 끓여봤는데."

성좌가소곤소곤거렸다.

소년이 우물쭈물거렸다.

“맛이 괜찮으신가요?”

"......."

입안에서 멸치 향이 물씬 풍겼다.

어릴 때 감기에 걸릴 때면 원장님은 사과를 갉아 주셨다. 그리고는 작은 멸치를 넣어 흰 쌀죽을 끓여주었는데, 갉아낸 사과의 맛이 평소 먹던 사과의 맛과 다르듯 그 쌀죽의 맛도 평소와는 달랐다. 묽게 부풀어오른 멸치는 맛없었지만 계속 씹으면 오독거리기도 했고, 은근히 고소한 맛이 나기도 했다.

“예. 맛있네요.”

“하아, 다행이다.”

성좌가 입가를 들어올려 웃었다.

소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이었어요. 저는 단순히 공자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이 나타나길 바랐을 뿐인데, 난데없이 강대한 적이 출현해서요. 공자님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으면 [자신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무의식의 저변에서부터 생각하시는 거로군요.”

“예?”

"네?"

성좌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소년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방금 저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요, 공자님?”

"......."

“참. 그보다 왜 혈마한테 그토록 화를 내셨나요? 습격을 당해도 점잖으시던 분이 갑자기 혈마교라는 말을 들으니까 흥분하시어서. 사실, 조금 놀랐어요.”

“어."

정신이 몽롱했다.

“왜냐면 제가 마교(魔敎)란 곳의 소교주라서……."

“아하.”

“저는, 마교 두 글자에 의미를 두고 있거든요.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시정잡배가 함부로 마교 비슷한 단체를 운운한다 생각하니 열이 확 뻗쳐올라서.”

“과연. 과연.”

성좌가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녀가 주의 깊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공자님의 역린이로군요…?”

음.

“마교란 곳에 대해서 궁금하네요. 그다지도 큰 의미를 품고 계시다면 분명히 소중한 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공자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겠어요.”

.......

“아하. 스승이 계셨군요. 성함은 소백향(舊白香)이라. 쓸쓸하지만, 맑아서, 코끝에 감도는 향일 것 같아요.”

.......

“라비엘 이반시아라는 분을 사랑하시는군요. 헤에, 그렇게 아름다우세요? 아아. 과연. 그래서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미인계 쪽으로는 넘어오지 않았던 건가요. 곤란하여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손쉽고 강력한 길인데. 이 정도까지 심장에 깊이 인이 박힌 존재라면, 비틀어도 역효과가 날 뿐이겠지요. 무서워라. 두려워라. 조심해야지.”

어라.

“……지금 제가 뭔가 말했나요?”

“네? 아니요.”

성좌는 내 뺨을 매만졌다.

소년은 빙긋 미소 지었다.

"공자님께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계신걸요?”

그런가.

그랬지.

“하지만 검제의 존재는, 좀 방해되네요. 배후령이라니. 그런 것이 붙어 있으니까 제 권능에 사로잡히기까지 오래 시간이 걸린 거겠지요. 어떡한다…? 없애면 지금의 공자님과 너무 멀어지는데. 어쩔 수 없지. 네. 조금 피곤하지만 두 분을 같이 만져 드릴게요.”

휘익!

눈앞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야, 김좀비! 뭐하냐!

배후령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싸움 중에 한눈 팔다니 네가 벌써 뭐 하늘을 씹어먹을 쌉고수라서 방심이나 하고 쳐앉았냐!?

아.

그렇지.

지금은 혈마교의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적을 소탕하는 도중이었지.

왜냐하면…… 어쩌다가 내가 여기를 공격하게 되었냐면.

“공자님!”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예요!”

소녀.

보름 전에 우연히 숲 속에 마주쳤고, 한때 성좌였지만 지금은 모든 힘을 다 잃어서, 십삼거악을 비롯해 60층에 웅거하는 마교들. 이 스테이지에는, 혈마교뿐만 아니라, 신마교(神魔敎), 백마교(白魔敎), 광마교(狂魔敎), 이른바 사마(四魔)라 불리우는 세력들이 있어서.

있어서.

그들이 하나같이 저 소년을 납치해다가 악용하려는 것인데.

마탑처럼.

나는 며칠 전 병상에 누워 있던 바람에 소녀가 납치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므로.

“도와주세요……!”

소년의 비명에 눈이 확 뜨였다. 그렇다. 망설일 게 무엇이 있는가? 저 요새의 깊숙한 심처에 소녀가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수천 년을 살았든 성좌였든 간에, 지금 저 아이는 여리다. 여린 존재다. 누군가가 지켜주어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었을 뿐.

“예. 당신은 그런 식으로 각성하여요.”

머릿속 저편. 아니, 의식의 밑바닥. 어쩌면 가장 높은 상공에서 아련히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부터 당신은 어쩔 것인가요?”

“소년을 구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답했다? 아니다. 요새와 같은 성채에서 무수하게 화살이 날아왔고, 나는 그것을 한대한대 힘겹게 쳐냈다. 왜냐하면, 어, 왜냐하면 ….

“당신은 아직 혈마와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정말로 소년을 구할 생각인가요?”

“예."

“그렇다면 혈마가 나와서 이렇게 물어요. [그런 넝마짝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우리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군. 죽음을 바라는 것이냐?] 혈마도 지난번의 혈투로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저런…. 그의 주변엔 믿음직스러운 수하가 수백 명이나 즐비하네요….”

"......."

“아. 이럴 수가. 결국에 화살 하나가 당신의 허벅지에 날아와 박힙니다."

욱씬.

고통이 허벅지에서 치솟았다. 아팠다. 그만 무릎을 꿇을 뻔했다.

“어쩌나요? 다시 검을 휘두르나요?”

성좌가 천천히, 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소년이 울먹이며, 내 목소리를 부르짖었다.

“……예에.”

“정말요? 이대로는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성좌는 키득거렸다.

소년은 울어버렸다.

“화살이 계속해서, 하늘을 뒤덮으며 당신한테 내리꽂혀요.”

“피합니다.”

“예, 당신은 강합니다. 당신의 오러는 능히 하늘을 뒤덮어서 화살비를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당신이 입었던 내상이 다시 격통에 시달립니다.”

우지끈!

뼈가 갈갈이 찢기는 통증이 전신에 올라왔다.

“크윽."

“아픈가요?”

“큽. 으으옥! 젠, 장……!”

“다시 물을게요. 아픈가요?”

“빌어먹을…… 이, 새끼들이. 건방지게. 활 질이야.”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사왕님.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가요? 대답해주세요. 대답해주시면 기쁘겠어요.”

괴롭다.

“몸이.”

탈 것처럼, 아니.

실제로도 불타고 있다.

이제는 쉬어서 한동안 정양해야만 하는 몸인데, 혈맥이고 기도인데, 한계를 뛰어넘어 오러를 끌어올리고, 혹사시켜서, 내 몸이 내 오러에 의해 타오르고 있다. 원래라면 오러로 1차적으로 뼈와 혈도, 근육, 신경을 보호한 다음에야 오러를 운용해야 하건만. 지금 상황에선 나를 보호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읏......."

핏줄이 불끈거리며 터졌다. 터지면서, 용암이 흘러나온 것처럼 온 근육을 태웠다. 혈도에 오러가 고이면서 뼈가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세상에.”

성좌가 내 고통을 보고 환희하였다.

소녀가 내 고통을 보며 울부짖었다.

“어쩜, 이리도….”

숨결이 독했다.

“이리도, [고통]을 잘 상상하실 수 있지요?”

“욱, 흐읍. 크읏……, 으윽.”

“저는 그저 화살에 맞았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어요? 공자님. 저는 단순히, 제가 납치당하고, 저를 구하러 올 경우, 당신께서 맞이하시게 될 상황을 제시해드렸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실감나게 상상해내실 수 있나요?”

굉장해요, 라고 누군가가 중얼거린 것만 같았다.

“대단해. 이러면 마치, 마치, 정말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어보신 것 같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상상하실 수 있는 거지요? 뼈가 녹아보신 적이 있나요? 핏줄이 다 타버린 적이 있나요?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고통을 아셔서, 이렇게, 저의 권능 아래 재현하시는 건가요…?”

나는 고통을 무릅쓰고 전진했다.

화살들이 날아와서 어깨와 팔뚝에 박혔다. 하지만 무시했다. 한계가 터지도록 오러를 끌어올려, 발을 내디뎌, 저 기둥에 아이를 묶어 놓은 혈마교의 무리들을 베어넘겼다.

“틀림없어요….”

성좌는 양손을 뻗어 나의 뺨을 잡았다.

소년은 기둥에 꽈악 묶힌 채 오열했다.

“당신이야말로 제가 수천 년을 기다려온 사람.”

조금만 더.

“만난 지 고작 며칠도 안 된 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마주하고, 말로 그럴 뿐만도 아니고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닌, 죽음과 고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끝끝내 전진하는 자……."

조금만 더.

“당신이라면, 제가 어떤 퀘스트를 내려도 상상할수 있겠지요. 바다 한복판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노라고 말하면, 당신은 정말 바다에 빠질 거예요. 익사할 거예요. 어중이떠중이 헌터들에게 아양을 떠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당신은, 정말로 모든 위기와, 모든 고통과, 모든 죽음을, 있는 그대로 상상하시겠지요. 저는 오직 당신 같은 사람이 올라오기를 기다렸어요.”

마침내.

나의 칼날이 혈마를 베었다.

피가 튀었다.

“당신이, 저의 세 번째 신도예요.”

[■■■■ ■■ ■■■■ ■■■ ■■■■■.]

“당신을 위해 퀘스트를 만들게요. 캠페인을 이어갈게요. 당신이 성취감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드리겠어요. 당신만을 위한 신이 되겠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저를, 믿어주시는 거예요. 공자님.”

핏물이 튄 저편에서 환한 미소가 밝혀졌다.

“저를 믿어주실래요?”

[■■■■ ■■ ■■■이 당신에게 신앙을 권유합니다.]

[■■■■ ■■ ■■■을 당신의 성좌로 모시겠습니까?]

눈앞에 어둠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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