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20화 (320/400)

320화.  < 무간도(無間道). (2) >

3.

째깍.

시계의 하얀 살에 바늘이 스친다.

상처 입을 것이 예정된 곳에 상처를 놓듯.

"......."

“그러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나. 금사매 영애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오해다! 오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깜빡이자, 눈앞에서는 금발의 황태자가 화를 내고 있었다. 접견실엔 나와 황태자밖에 없으니 아마 나한테 분노하는 것이리라.

“영애는 완전히 나라는 인간을 착각하고 있어!”

"......."

긴 시간이 흐른 것도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만 흐른 것도.

시간을 헤아리는 감각이 망가진 것일까? 꼭, 미지근한 온수에 머리카락이 낱낱이 녹아버린 듯하다. 내가 라비엘의 꿈에서 수영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라비엘이 나의 시간을 유영하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나는 부채를 펼쳐 부쳤다.

‘딱히 상관없겠지.’

우리 두 사람을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자는 점점 언성을 높여갔다.

“아주 불쾌해! 그대의 말투는 뭐랄까, 마치, 내가 그대를 놔두고 바람이라도 피는 것 같다는 식이다. 제국의 국본인 나를 두고 말이야!”

나는 황태자의 금발 너머를 쳐다보았다.

째깍.

째깍.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박의 벽시계가 자기 살을 좀먹으며 시간을 버렸다.

“……잠깐. 영애. 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어디 딴곳을 보는가?”

“송구하옵니다. 시계를 보고 있었나이다.”

“시계? 설마 나와는 대화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이건가!”

“아닙니다. 그저, 시계는 자기가 지나쳤던 곳을 계속 지나치지요. 마치 예전에 왔던 곳임을 모르는 것처럼. 어쩌면 영원의 조건은 망각일지도 모릅니다.”

“뭐? ……무슨 소리야?”

“어제도 소리쳤다. 어제 소리친 걸 잊는다. 어제도 잔소리를 들었다. 어제 들은 걸 잊는다. 그저께, 그그저께, 일주일, 한 달, 일 년. 잊고 또 잊어, 버리고 또 버린다.”

"......."

“분명 어제 지나쳐온 풍경. 어제 내 손길이 머물렀던 곳. 헌데, 마치 새로운 광경인 양 생경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영원을 사는 것이겠지요. 영원히.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정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황태자는 미간을 좁혔다.

“그대가 금사매 영애와 나의 관계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전하.”

나는 부채를 지폈다.

“이 역사에서 사랑을 배신한 뒤 변명한 자는 전하가 처음이 아니옵고, 마지막도 아닐 것입니다.”

"......."

“오해라며, 착각이라고 변명한 다음 하루를 모면한 자 또한 전하가 최초는 아닙니다. 그들은 다 각자의 결말을 맞아 무덤에 죽어 있습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사려해주소서. 오늘 하루를 넘어간들 예정된 파국이 달라지겠나이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말하였노라!”

“금사매 영애는 전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황태자가 멈칫했다.

“뭐라?”

“그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

“태자 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이야 있겠으나, 금사매가 진실로 흥겨워하는 것은 [태자 전하와 몰래 사랑을 나누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나는 담담히 말했다.

“사랑을 나누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옵니다. 그런 자와 사랑을 나누려면, 전하께서 종(從)이 되어야 합니다. 금사매 영애의 사랑을 애절히 간구하고 졸라서, 마치 자비를 내려받듯, 그녀의 총애를 하사받는 것입니다. 오직 그런 관계만이 태자 전하와 그녀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해주겠지요.”

"......."

“하오나 전하께선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가장 높이 서야 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한낱 남작가 영애에게 고개를 조아리겠나이까? 전하께서 고개를 조아리면 신하들이 따라서 허리를 숙일 것이요, 신민들이 따라 절을 올릴 것인데, 허면 온 나라의 주인은 전하가 아니라 영애가 되겠습니다. 태자 전하.”

나의 약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녕 나라를 들어다 영애의 가문에 갖다바칠 작정이옵니까?”

촤아악!

"......."

뚝. 뚜욱.

옆머리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눈앞엔, 금발의 남자가 텅 빈 물잔을 든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넌 최악의 인간이다.”

무의미한 저주.

그러나 설령,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자가 토해낸 욕설이고 할퀴어낸 상처라 하더라도, 내가 입은 상처는 여전히 상처여서, 마음의 표면이 따끔거렸다.

“왜 단 한 번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거냐? 나도 힘들다. 힘들어! 재상은 허구한 날 뭐라뭐라 쪼지 않나, 익숙하지도 않은 자리에 끌려나가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대는 물론 저 위대한 이반시아 가문의 핏줄을 그야말로 뼛속 깊이 타고난 사람이니 잘 모르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무표정하게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이옵니까?”

갈아치울까.

"......."

당금의 황상께선 성군이시다.

그러나 성군이 승하한 이후 곧바로 폭군이 즉위하여 나라를 망친 사례 따위 수없이 많다. 제국의 명운이 앞으로 1대밖에 남지 않았다면, 아예 당대부터 밑준비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최후의 수단이지만.

이 확실한 최후를 위해, 전국 곳곳에 간자를 뿌려놓고 장애물들을 미리 암살해두며, 때가 왔을 때 단번에 역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해두자.

“전하.”

머뭇.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제가 전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는 전하를 사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이 사랑이 보잘것없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의 최선입니다. 제 마음속에선, 이보다 더 큰 촛불을 키울 수 없습니다.”

"......."

“금사매 영애를 내치십시오. 그것이 전하를 위한 길이고, 나라를 위한 길......."

“괴물."

황태자가 문고리를 잡았다

“괴물 같으니.”

그리고, 도망쳤다.

"......."

째깍.

시간이 흐른다.

"......."

째깍.

머리를 적신 물방울이 초침 소리에 얹혀 뚝, 떨어진다.

"......."

문득 깨달았다.

내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아아."

무료하다.

[스킬 대상자의 이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무료함에, 분노가 조금은 응어리졌다.

[스킬 대상자의 진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째깍.

하지만.

무료하고 무료한 생이라지만.

[스킬 대상자의 외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째깍.

분명히.

[재현 실패.]

공자여,

나는 그대를.

[구현에 필요한 자료를 대체합니다.]

째각.

4.

무료하다.

"......."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깜빡이자, 나는---본인은 스스로가 가부좌를 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잠깐 빠졌다가, 깨달음을 붙잡지 못하여 고스란히 빠져나온 것인가.

“천마님.”

세상의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움찔.

시선이 마주치니 흑의(黑衣)의 청년이 어깨를 떨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귀혼염마로구나.”

“소, 송구합니다.”

귀혼염마가 부복했다.

“저 같은 것들이 감히 지존의 수행을 방해하다니….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야단스럽긴. 깨달음이란 조용하여서 무엇이 건드려도 깨지지 않을 평온이라 들었다. 방해받아서 깨질 것이라면 애당초 깨달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잠결에서 깬 듯하구나. 본좌는 깨달음을 망친 것보다 오히려 기분 좋은 낮잠을 방해받은 것에 관해 사과를 받고 싶다.”

“응…. 어……. 소, 송구하옵니다…?”

쯧.

“놀리는 재미가 없는 부하로다. 거기서 대가리나 박고 있거라.”

“아! 네!”

귀혼염마는 차라리 그게 훨씬 쉽다는 듯 즉답했다.

“그럼 보고드립니다!”

“듣겠다.”

“우선 천하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귀혼염마가 거꾸로 대가리를 박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머리가 온몸을 지탱하는데도 흔들림이 없어 굳건하여, 과연 제대로 수행한 본교의 정예임을 알겠다.

“하늘에서 벌이 내려 괴질이 돈다는 말을 믿지 않는 백성도 많아, 설득에 난항을 겪었으나, 이미 전염병에 당해버린 자를 꽁꽁 묶어다 순시하여 보여주니, 아무리 의심 많은 자라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더이다!”

"......."

그런가.

강호에 원인 모를 괴질이 돌기 시작한 지 어언 수개월.

이곳은 아직 내가, 스승님이, 하얀 종막을 맞이하기 이전의 세계다.

“수고하였다.”

“황송합니다!”

“허나 피신해본들 어찌 움직이는 병마를 피하랴. 바다 아래 움막을 지을 수 없고, 구름 위에 천막을 칠 수 없다. 하늘 밑의 바다 변두리가 백성들에겐 마지막 피신처가 될 것이다.”

"......."

“다만 인간에 대한 예를 다했을 뿐. 본좌는, 섬으로 피해 하루를 더 살수도 있었을 시간에, 하루를 바쳐 백성을 위무한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귀혼염마가 자세를 똑바로 고쳐 부복했다.

“충(忠)!"

그 너머에서 수백 명의 정예들이 부복했다.

“마도천하(魔道天下)!”

다시 저편에서, 수만의 신도들이 무릎을 굽혔다.

“민초독존(民草獨存)!”

마도의 본산에 고고한 메아리가 울렸다.

나는 석단에 올라앉아 고개를 수그렸다.

당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룩한, 절정의 꼭지점에 다다른 마교의 풍광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

무료하다.

세계가 멸망에 처했거늘, 이 무서우리 만치 잔잔한 무료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시함이 아니다. 따분함이 아니다. 시시하게 여겨도 될 정도로 좁은 세상에서 살지 않았으며, 따분하게 여겨도 될 만큼 한가로운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목숨이 발랑 까인 채 사시사철을 주야불사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였는가.’

그렇다.

‘책임질 것을 책임졌는가.’

그렇다.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을 또한 짊어졌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검을 잡아서, 좋았는가.’

아마도.

‘행복했는가.’

모른다.

"......."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 개의 질문에 그러하노라 대답할 수 있다.’

마도천하의 모든 신도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오직 하늘만이 보아 알았을 터. 고로, 나는 하얀 하늘을 거울로 삼아 나 자신에게 턱짓한 것이었다.

‘오직 두 가지 질문만이 [아마도], [모른다]고 대답하여 지금의 나를 무료하게 하는구나.’

알고 싶다.

“남궁운.”

나는 입술을 열었다.

귀혼염마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예?”

“무림맹주 남궁운에게 서신을 보내거라.”

"......."

귀혼염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단지 지필묵을 가져와 대령하였다.

나는 까닥, 손가락을 휘저었다.

지紙.

종이가 허공에 떠올라 빳빳해졌다.

어검술을 터득한 이래 이 몸은 도구에 얽매임이 적어졌다. 귀혼염마가 작게 탄성을 삼키는 가운데, 나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저었다.

필筆.

나의 손가락이 붓대가 되었다. 손톱 끝에 맺힌 내공은 붓촉이 되었다. 일점에 먹물을 모아 휘어갈기니, 종이와 나 사이에 한 허공이 놓여도 글씨를 씀에 거칠 것이 없었다.

묵墨.

하여, 검은색 글씨가 갑자의 공력을 머금은 채 적히니.

“태워라.”

나는 손을 내려놓았다.

“제가 감히, 어찌.”

“괴질이 창궐해도 세상은 남고, 잠이 깨어도 삶은 남아 있다. 이것은 나의 뜻이다. 뜻이라면 태워도 남을 것이다."

"......."

귀혼염마는 어깨를 떨며 내 종이에 불을 놓았다.

촛불에서 옮겨 붙은 불더미는 순식간에 종이의 변두리를 갉아먹었다. 붉게 한입, 다시 붉게 한입, 지나간 자리를 검게 태우며 화마는 번졌다.

“아."

그러나 글자들은 불길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타올랐다.

먹물에 담겨진 내공이 그대로 글씨를 붙잡았다. 글씨는 불씨가 되었다. 고정되어서, 설령 화마에 의해 매달릴 바탕이 태워지고 또 태워지더라도, 나의 불씨는 허공에서 형형하게 타올랐다.

세상에 병이 돌아 고칠 수 없다지만

인간의 병이야 인간이 못 달래느냐.

살아온 백년, 죽음의 일초에 달렸나니

오거라. 武林이여.

나의 백년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귀혼염마가 입술을 떨고 엎드렸다.

나는, 지금 허공에 새긴 내 경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나를 더 적어줄 테니 그것을 무림맹주 놈한테 보내거라. 네가 직접 가져가서 남궁운이 보는 앞에서, 무림맹의 잡것들이 보는 앞에서 손수 태워라. 그놈들 얼굴을 내 구경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예……, 천마이시여.”

귀혼염마의 목소리가 버벅거렸다.

나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불씨가 먹을 다하여 재로 다하는 순간, 너희가 정마대전에 응하지 않은 줄 알겠다.”

신도들은 허공에 각인된 나의 글씨를 보고 경원했다. 그들은 그것이 기적이라 여겼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꽃이 피는 일과 다를 바 없으나, 하늘과 땅 사이에 맺어진 불씨는 그들에게 하나의 증거, 자신들이 여전히 천하에 살아남아도 좋다는 허락처럼 보였나 보다.

그들이 외쳤다.

“魔道天下!”

툭.

무언가가 코끝에 내려앉아 올려보았다.

“民草獨存!”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魔道天下!”

그래, 남궁운.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겠지.

다만.

“民草獨存!”

내가 너로 하여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였으며, 문제이고, 문제이겠구나.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