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21화 (321/400)

321화.  < 무간도(無間道). (3) >

5.

천마 소백향(舊白香)에겐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었다.

바로, 봐주었다는 것이다.

남궁운을. 무림맹주를. 강호에서 제일가는 백도, 남궁세가에서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우며, 젊은 날부터 협행과 기행으로 명성을 드높인 그 사람. 그 남자를.

‘이 정도인가.’

스승님은 봐주었다.

"......! ......!"

눈이 내렸다.

흔낱리는 눈발을 헤치며 남궁운이 돌파해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더라도, 남궁운의 주변에만 가면 그만 녹아버렸다. 맹렬한 내공이 남궁운의 근육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로구나.’

눈이 내렸다.

스승님의 흘기어진 눈동자에는 세상에 눈이 내리는 광경, 한 점의 눈발이 무림맹주의 이마에 붙었다가 사르륵 녹아 흐르는 모습, 차앙! 차아앙! 수천수만의 정파와 마교가 어우러져 칼부림으로 노나는 풍경이 다 비추었다.

정마대전(正魔大戰).

모두가 세계의 멸망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전력을 쏟아부은 이 전쟁터에서, 오직 한 사람.

스승님만은.

나만은 숨이 차지 않았다.

‘이 몸을 이기려 이토록 애쓰고 있건만.’

까아앙!

남궁운이 내지른 도끼를 받아치면서 나는 안타까워했다.

‘지고지순하다. 올곧다. 순수히, 나를 이기기 위해 무공을 휘두르고 있다. 그의 도끼에선 나에 대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알고 있었다.

만일 천마 소백향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남궁운은 천하제일인으로 우뚝 섰을 것이다. 고금제일인이라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무림맹주 남궁운은, 내가 맞이할 수 있는 적수 중에서 가히 최고였다.

그 이상을 바래서는 과욕일 만큼.

‘아아.’

끝내고 싶지 않다.

‘어찌하여 가만히 있어도 하늘을 베어넘길 재능은 안 되면서, 노력하면 누구에게도 따라잡히지 않을 재주만은 있는가.’

끝나고 싶지 않다.

‘어디에도 없는 게냐.’

내가 욕심을 부려도 되는 상대는.

‘남궁운. 부월선아. 네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냐.’

당신이 한 뼘만 더 강했더라면.

나, 기꺼이 당신에게 일생을 주었을 텐데.

‘너에게 거짓말을 해 승부를 위장할 담력도 없고.’

눈이 내렸다.

‘나에게 거짓말을 해 인생을 만족시킬 요량도 없다.’

째깍.

‘아무에게도, 단 한 번이라도 거짓을 고하지 못하였으니, 어느 누가 나와 어울릴 수 있겠는가.’

무료하다.

‘아니.’

그런가.

‘고독하구나.’

째깍.

그 날, 천마 소백향은 무림맹주 남궁운을 베지 않았다. 베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와 정마대전에 응한 자의 목을 스승님은 칠 수 없었다. 정작, 자신이라는 길을 걷지는 못한 자에게, 스승님은 자신의 목을 내어줄 수도 없었다.

어찌할 수도 없는 삶.

스승님은, 정마대전의 첫날이 다만 유예되었을 때, 이 겨울이 영원같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예감했을지 모른다.

[스킬 대상자의 이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허나.

[스킬 대상자의 진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한 생이라지만.

[스킬 대상자의 외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공자야.

네가 나를 데리러 오겠지.

스승님, 스승님, 이라고.

[재현 실패.]

꽃이 피는 웃음과 함께.

[구현에 필요한 자료를 대체합니다.]

째깍.

6.

“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왔냐?”

깜빡이자, 눈앞에는 배후령.

내가 알던 모습보다는 조금 더 머리카락이 길고, 조금 더 살이 빠진 검제가 책상다리를 한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검제 양반?”

나는 살짝 당황했다.

“오냐.”

“어. 트라우마에도 나오게 된 거예요? 제 말은, 원래부터 나오긴 했지만 B급 되고 나서부터는 도통……. 어라? 나, 몸 가지고 있네?"

나는 내 몸을 더듬거렸다.

라비엘의 몸이 아니었다. 스승님의 몸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몸도 아니어서, 나는 내게 익숙했을 터인 이 몸을 마치 수십 년 만에 처음 만져보는 것처럼 더듬거렸다.

“끌끌.”

그런 내 모습을 배후령은 재밌다는 듯 지켜봤다.

“꼴깝 떨고 있네.”

“아, 왜요. 저 진짜 느낌으로는 20년 넘게 산 거 같다고요. 자아를 유지한 것만 해도 엄청 대단한 일이라니까요. 그보다 여긴 어디야?”

“글쎄.”

배후령이 실실 웃었다.

“아마 여전히 네 스킬이 발동되는 도중이겠지. 넌 계속 트라우마를 보고 있을 테고.”

“……? 그럼 이게 댁의 트라우마란 뜻입니까?”

“난 트라우마 같은 거 안 키웠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후령의 말대로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마치 스테이지에 진입하기 전 잠시 머무르는 대기실과 같은 허허벌판. 하얀색 도화지를 끝없이 펼쳐놓은 듯한 공간. 그곳에, 한복판이랄 것도 없는 어느 장소에, 배후령은 오직 한 자루의 검을 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

“왜? 뭘 봐?”

“아니요…. 그게. 댁, 다리가.”

나는 배후령의 다리를 가리켰다.

평소엔 살짝 흐릿했던 다리가 지금은 뚜렷한 형체를 띄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그냥 몸 전체가… 생생하네요. 목소리도 그렇고요.”

“흐음.”

“뭘까요?”

“뭐긴. 간단하구만.”

배후령은 칼자루를 건들건들 흔들었다.

“아마 네 트라우마 속에선 살아 있는 내 모습이 재생되는 거겠지. 다만, 말했다시피 내겐 [트라우마였던 것이 없어서] 말이야.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재현될 거 아닐까 싶다만.”

“헤에.”

“구체적으로는 네가 웬 변태 성좌한테 세뇌당해서 신님! 신님! 하고 쫓아다니는 거까진 기억나는데. 요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기억이 애매해. 넌 어떠냐? [지랄이 풍년이라 금년도 대박일세] 기억나냐?”

“……그런 일도 있었죠.”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왔다.

그래.

나는 트라우마가 시작되면서 라비엘의 반생과 스승님의 반생을 한 번씩 거쳤다. 너무 오랫동안 꿈을 꾼 것처럼.

“이번엔 댁의 트라우마를 보는가 했는데……."

“오. 기대했냐? 미안, 미안. 난 인생을 즐긴 놈이라서 말이지. 네 살 때 만두 훔치다가 점소이한테 걸려서 뒤지도록 쳐맞은 적은 있지만, 그때도 난 만두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맞았거든. 날 때려봤자 위장에 들어간 만두가 다시 상품으로 재진열될 리는 없잖냐? 결과적으로 나의 승리라 볼 수 있지. 난 네 살부터 승리밖에 몰랐어.”

“당신…… 아니. 됐다. 말을 말지.”

“그래서? [테러야 물럿거라 죽음아 멀리가라]까지 속삭여준 기억은 있는데. 어떻게 됐냐? 인마, 얘기 좀 해봐. 그래야 상담을 해주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나는 여태껏 겪은 일을 얘기해주었다.

“흐음.”

배후령은 눈웃음을 짓고 내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삐딱하니 턱을 괸 자세.

“좀비야.”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툭, 배후령이 말했다.

“넌 마천신공(魔天神功)을 어떻게 쓰냐?”

“예?”

“마천신공. 네 사이비 교단의 마공 말이다. 그거, 너 어떻게 써?”

사이비라니.

“어떻게 쓰긴. 그냥 쓰죠.”

“그래? 신기하네. 굶주림은 사람마다 다 다르잖냐. 가령 아사유검(餓死流劍)이라 치자. 누구는 좁쌀밥을 못 먹어서 굶주려. 누구는 햄버거를 못 먹어서 굶주리고. 둘이 같냐? 농부의 굶주림은? 어른과 어린아이의 굶주림은? 어떻게 넌, 그냥 굶주림을 통틀어서 아사유검을 써?”

“같죠.”

나는 즉답했다.

마천신공을 막 깨우치려던 때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저런 질문에 놀아날 짬밥이 아니었다.

“같다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맥락만 같으면 돼요. [무언가를 먹지 못했기에 고통스럽다.] 여기서, [무언가]는 좁쌀밥이든 루꼴라 피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맞아.”

배후령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래?”

“예."

“지금 네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야.”

"......."

째깍.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 그건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상황,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 다른 시간이고 다른 장소인데도, 여전히 같은 일일 때. 그것이 이해(理解)다.”

배후령이 흥얼거렸다.

“넌 ■■■■ ■■ ■■■의 과거를 못 봐. 왜? 이름이 없으니까. 좌표도 없고. 심지어 외형도 잃어버렸다매. 누구한테서도 불리지 못하고, 누구한테서도 보이지 못하는 놈의 일생을 원수로 엿볼 건데?”

"......."

“하지만 우리는 그놈이 실패했다는 걸 안다. 그놈의 일생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을 거야. [우주홍황] 스킬을 보면 알 수 있지. 1번. 2번. 녀석은 너가 아닌 누군가에게 [우주홍황]을 썼지만, 지금 그놈의 곁에는 아무도 없어.”

배후령이 속삭였다.

“배신당한 거다.”

검제의 입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꼭,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것만 같았다.

“공자야. ■■■■ ■■ ■■■이 누구한테,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배신당했는지를 꼭 알아야 할까. 그래야만 비로소 너는 놈의 트라우마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냐?”

“배신은 배신이다. 실망은 실망이지. 그래서 너의 배신은 나의 배신일 수 있고, 너가 너이고 내가 나인데도 여전히 그것을 이해라 부를 수도 있다.”

옳다.

본디, 그것이 마천의 가르침.

“네 스승도 그리 말했었다. 안 그러냐?”

그림자의 교리.

“……그렇네요.”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왜 ■■■■ ■■ ■■■의 과거를 엿볼 수 없었는지, 왜 하필이면 라비엘과 스승님의 반생을 지켜봐야 했는지, 이해되었다.

“그 성좌가 겪은 트라우마와 [제일 비슷한 경우]들이 재현된 거예요.”

틀림없다.

“■■■■ ■■ ■■■은 맨 처음에 누군가를 믿었겠지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우주홍황]을 써서 충분히 즐거운 퀘스트와 행복한 스토리를 만들어줄 거라고, 아니. 적어도 신선한 세계를 상상해줄 거라고 기대했어요.”

하지만 배신당했다.

라비엘이 황태자표 라면사리한테 배반당한 것처럼.

『무료하다.』

■■■■ ■■ ■■■과 라비엘은 서로 다른 사람이고,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으며, 서로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살았으나, 처음 배신당했을 때 입은 상처의 깊이와 각도는 똑같았다.

그러기에.

『무료하다.』

■■■■ ■■ ■■■의 과거는 라비엘의 과거로 대체되었다.

“그다음에도, 성좌는 누군가를 믿었습니다.”

두 번째 계약자.

“첫 배신을 겪고 성좌도 조금 성장했지요. 이번엔 무턱대고 [이 사람이면 신선할 것 같아]라는 이유로 계약자를 고르지 않았어요. 누가 봐도 당대 제일. 누가 봐도 지금 시대에 제일 재능이 넘치며… 상상력이 월등하고. 이 사람과 함께하면, 정말로 즐거운 퀘스트의 나날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며.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부족했다.

무림맹주 남궁운이 스승님께, 한뼘, 부족했던 것처럼.

『고독하다.』

두 번째 계약자는 분명히 뛰어났을 것이다. [우주홍황]의 효과 아래, 계약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겠지. 마치 내가 했던 것처럼 그곳에 마을이 있다 상상하면 마을이 생기고, 적이 필요하면 적이 나타났을 거다.

그럼에도.

『고독하다.』

그가 펼쳐내는 상상에 ■■■■ ■■ ■■■은 완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아니. 대부분이, 죽음을 겪어본 적 없지요.”

나는 왠지 모르게 성좌가 채워지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다를 상상할수는 있어요. 정교하든 흐릿하든 간에. 하지만,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에, 허우적거리면서… 숨이 가빠져, 해수가 목구멍에 쳐 밀고 들어오는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 감촉. 그 고통을?”

대답은 간단하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마 저 말고 다른 계약자들은…… 자기 자신의 위기. 자신의 죽음,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잘]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어쩜, 이리도.』

『이리도, 고통을 잘 상상하실 수 있지요?』

■■■■ ■■ ■■■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실감나게 상상해내실 수 있나요?』

『뼈가 녹아보신 적이 있나요? 핏줄이 다 타버린 적이 있나요?』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고통을 아셔서, 이렇게, 저의 권능 아래 재현하시는 건가요?』

말했었으니까.

"......."

배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거다.

첫 번째 계약자의 배신.

두 번째 계약자의 실망.

그리하여 ■■■■ ■■ ■■■는 마침내 세 번째 계약자, [우주홍황]의 마지막 시전자,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면서까지 동반하고자 하는 최후의 신도로, 다름 아니라 나를 선택했다.

“그러면 이제 수수께끼는 하나밖에 안 남았군요.”

“뭐가?”

“당신입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검제 양반.”

"......."

내 두 눈이 똑바로, 배후령을.

살아있는 모습으로 구현된 검제를 바라보았다.

“저를 제외하고 [우주홍황]은 두 번밖에 안 쓰였어요. 그건 두 명의 트라우마로 대체되었고요. 하지만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왜 [세 번째] 트라우마의 대체자로 당신이 여기에,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지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검제는 입가를 올렸다.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니. 내가 볼 때는 충분히 많다만.”

검제의 눈동자에는 흑발의 청년이 비추고 있었다.

“너가 있잖냐. 김공자.”

"......."

“바로 너가 세 번째 트라우마가 된 것이겠지.”

째깍.

“나는 너한테 얹힌 귀신 같은 거니까 덤으로 구현된 걸 테고. 아니. 내가 너와 둘이서 작전을 짜 ■■■■ ■■ ■■■을 엿먹였으니, 그거까지 감안해서 함께 구현된 걸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곳에는 너가 있다.”

째깍.

“너의 사랑이 너를 기다렸고, 너의 스승이 너를 기다렸던 것처럼, 김공자. 이 성좌가 세 번째로 그리는 상처는 너에 대한 기다림일 거다. 어쩌면 오직 그것만이 상처일 수도 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야.”

째각.“

이제 하루가 돌아가면 나도 모르고, 성좌도 모르며, 오직 너만 아는 상처가 남아 있겠지."

“가라.’’

[트라우마 구현 완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다. 파트너.”

[피대상자의 자아가 유지된 것을 확인.]

“어떻게 살 건지, 더 고민해보라고.”

[페널티를 종료합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산산히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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