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 별빛. (2) >
3.
한껏 고요해진 콜로세움의 밑바닥에서 나는 한가롭게 흥얼거렸다.
“자꾸 저를 부르면서 어린 아해야, 인간아, 라고 강조하던 게 오히려 독이 됐습니다. 당신은 성좌이고 저는 인간에 불과하다. 무의식 중에 그런 인식을 심어주려 했던 모양입니다만…. 말장난 갖고 볶아먹기엔 제가 워낙 기름이 없는 남자라서.”
“네놈.”
무티아의 이빨에서 무서운 소리가 울렸다.
“네까짓 것이 별자리의 말미를 차지한다 하여 뭐가 달라질 성싶더냐!? 권능조차 갖지 못한 종자 주제에, 감히,”
“많은 것이 달라지지.”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계약을 지켜줘야겠어.”
콜로세움에 쓰러진 이백 명의 사도 중 어느 누가 낸 목소리도 아니었다. 배후령이나 성검, 여우님이 흘린 목소리가 아니었으며, 당연하게도 무티아의 목소리 또한 아니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바로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다.
반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티아는 곧장 알았나 보다.
“요술쟁이 놈……."
하늘을 올려보며 황금의 성좌는 이를 갈았다.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요청한 선수(先手) 공격의 시간은, 여전히 유효할 터!”
“그 유효 기한은 [시간]으로 정해지지 않았어.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탑의 모든 높으신 분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소 씨, 당신이 시간으로 장난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말이야.”
상공.
지하에서 올려다보면, 구멍이 뚫린 듯 동그랗게 오려진 하늘.
그 한복판에 품이 낙낙한 옷을 입은 자가 부유한 채,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당신의 기습이 인정받는 건 어디까지나 [사왕이 자신의 승천(昇天)을 깨닫지 못하는 동안]. 자신이 성좌가 된 걸 자각한 지금, 더 이상 당신들이 누릴 수 있는 이점 따윈 없어.”
목소리의 주인은 얇디 얇은, 비정상적으로 기다란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중지와 약지, 소지로 가볍게.
마법사인 걸까.
힘을 톡 주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지팡이였지만 마법사는 능숙하게도 휘저었다.
[여섯 번째 기둥. ‘태고의 지팡이’가 현현합니다.]
아.
메세지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어디서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명백하게 깨달았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와 똑같은 존재. 이 탑을 관리하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회의를 소집하여 의논하는 자들. 탑주의 여섯 수하. 기둥이었다.
“흐음.”
마법사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오랜만이구나. 야비야.”
“……야비요? 절 말하는 겁니까?”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을 시절부터 야비한 수작을 부려 우리를 소집시켰잖니. 야비하니까 야비. 나는 너를 욕해서 기분 좋고, 너도 의외로 귀여운 발음으로 욕을 먹어서 기분이 좋지 않니? 일거양득, 상호이득의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지.”
“예? 어? 아니요……."
나한테 그런 취향은 없다고 생각한다.
“너와는 나눌 이야기가 꽤 있겠지만.”
[지팡이]가 중얼거렸다.
연필에서 심이 빠진 양 헐렁한 목소리.
어떠한 적의도 악의도 담기지 않았으며, 그저 시간과 다를 바 없고 맹물과 다를 것 없는 어조로 [지팡이]는 말하였다.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일부터 하자꾸나.”
[지팡이]의 지팡이가 허공을 툭, 건드렸다.
쩌저저저적-
하늘이 유리장처럼 갈라진 것은 그때였다.
“안 된다!”
무티아가 소리쳤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계약에 이의를 신청한다! 회의를! 논의를 열어라! 나,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요청하나니 지금 즉시 의제(議 題)를 올려 이에 대한 처우를----."
“기각이야.”
쩌저저적!
“이미, 이제 갓 승천한 아이한테 너무 많은 불이익을 허용했단다. 무티아. 히시미트 크리츠. 당신들의 요청 때문에.”
일찍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요란히 깨졌다. 허공은 산산이 조각나서 수억 송이의 파편으로 튀었다. 마침 바람이 불러 붉은 조각들을 휘몰아치자, 꼭, 하늘이 피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권능이 정지합니다.]
[당신의 성장을 강제적으로 고정하고 있던 ‘시간 사슬’이 해제됩니다!]
한 번 더, 하늘이 탈피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의 권능이 정지합니다.]
[당신에게 전달되는 메세지 일부를 가로막던 ‘정보 왜곡’이 해제됩니다!]
껍질이 벗겨진 하늘은 흑색(黑色)의 무궁.
태양도 반달도, 은하수도 없어, 오직 새까맣기만 한 어둠이 그곳에서 아가리를 벌렸다.
흑빛 일색의 상공엔, 온몸이 푸른 비늘로 뒤덮인 구렁이가 숨어 있었다.
“제기랄!”
스르륵.
밤바다에 파도가 치듯 검푸른 비늘이 물결쳤다.
뱀은 족히 하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은하수가 부재한 하늘에 혼자서 바다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내 이럴 줄 알았거늘!”
구렁이의 눈은 역삼각형 모양이었다.
하얀 눈자위에 눈동자를 가진 인간과 달리, 거대한 뱀은 검은색 눈자위에 새파란 눈동자를 빛냈다.
“아직 성좌임을 각성하기 전에 치면 승산이 있다더니! 소대가리 새끼의 말에 넘어간 내 잘못이로구나!”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히시미트 크리츠다.
배후령이 입가를 비틀며 팔짱을 꼈다.
-이명은 [미궁에 거하는 눈]. 정보 왜곡, 조작, 폭로, 수수께끼와 모순, 미궁과 비밀을 관장하는 성좌지. 좀비 너한테 관심 있는 것처럼 굴더니 페이크였구만?
“아하….”
그제야 나는 이번 전투의 진상을 깨달았다.
“성좌 두 분이서 짜고 저를 공격했군요? 제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전에. 아직 성좌의 권능이니 뭐니 각성하지 못한 틈을 노려, 단번에 꺾어버리려고.”
칠흑의 밤에 달빛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내 입술로 반달을 그렸다.
“한 분은 시간을 조종하는 성좌. 다른 한 분은 정보를 통제하는 성좌. 두 사람이 합심한 덕에 저는 성좌가 되었다는 메세지조차 듣지 못하였다, 라. 찰떡 궁합이네요.”
“……크읏!”
역안(逆眼)의 구렁이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거꾸로 뒤집힌 눈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쏟아내며 무티아를 휙 노려보았다.
“네가 호언장담해서 네가 그르친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여라!”
“뭣."
“나는 모르는 일이다!”
푸르디 푸른 불꽃이 뱀의 몸을 휘감았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자신의 세계로 도주합니다!]
말 그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이다.
“저, 어리석은 것!!”
땅밑에 홀로 남겨진 무티아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외쳤다.
“이 몸이 정벌되면 그다음 표적은 바로 네놈이다! 네놈의 차례란 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승부를 봐야 하거늘, 네가 도망쳐봤자 여섯 날이라도 더 살 것 같은가! 하루라도 더 권세를 누릴 것 같더냐! 이, 죽어도 낫지 못할 천치가!”
“뭐. 까짓거 제가 하루만 쉬었다가 올라가죠.”
"......."
무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루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일주일 꽉 채워서 쉬어드릴까요? 그래도 저 하나 잡자고 동맹까지 맺으신 사이인데. 두 분이 의가 상하면 안 되잖아요. 섭섭하지 않게 배려해드릴게요.”
"으......."
“여러분이 무슨 이유로 의기투합해서 저를 공격한 건지야, 앞으로 차차 듣거나……. 음. 나중에 알아내면 될 일이고."
당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미궁에 거하는 눈]을 잡아서 족치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하였고, 무티아도 그런 뜻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양손으로 쥔 망치가 주춤거린 것이다.
“투항하십시오.”
"......."
“아무런 징벌도 없이 항복을 받아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받아내야 할 것들을 받아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눈과 귀를 가로 막은 채 기습했다는 것에 감정을 끼얹혀서 벌의 무게를 곱절로 늘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하지요.”
무티아의 눈빛에서 머뭇거림이 감돌았다.
나 한 명을 공략하기 위해 다섯 가지 수, 여섯 가지 수를 마련해온 무티아였으나 이제는 정말로 패가 떨어졌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이상, 무티아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겠지. 나의 항복 권고는 그 얼마 없는 선택지들마저 한 가지로 줄여버렸다.
“……무엇을, 바라느냐?”
“금사매. 실비아 에비나일의 신원을 저한테 완전히 양도하십시오.”
나는 가장 당연한 조건부터 고했다.
“다시는 실비아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마세요. 실비아가 제 가문에 소속했다는 사실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지도 마세요."
"......."
무티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 아니다, 어느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첫 번째 요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았다.
“……그리고?”
“[미궁에 거하는 눈]을 공략하는 데 당신도 도움을 주어야겠습니다. 그 성좌가 어떤 세계에 사는가. 어떡해야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는가. 당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푸십시오.”
여전히, 무티아의 입술은 긍정도 부정도 발음하지 않았다.
두 번째 요구사항도 퍽 쉬웠기 때문이다.
히시미트 크리츠가 먼저 무티아를 배신했다. 자신을 배신한 자를 배신하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바로 그러기에, 너무나도 쉬운 요구였기에, 무티아는 아직 더 무거운 조건이 남아 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또, 있는가?”
“무릎을 꿇으세요."
"......."
“사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가 당신보다 강하다는 것, 제가 당신을 이겼다는 것, 당신이 저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똑똑히 보이십시오."
주르륵.
무티아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입술을 물어뜯어 난 피는 아니었다. 이빨이 이빨을 짓이겨서, 차마 잇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진하게 깨물어, 송곳니와 어금니 사이에서 상처가 터진 것이었다.
“당신 같은 성좌에겐 미학이 있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말했다.
“법칙이랄지. 일종의 자기 규율이 있어요. 평범한 인간처럼 지금 비록 내 몸은 무릎을 꿇지만 내 마음은 굳건하다든가, 그런 식의 변명이 안 통합니다.”
자존심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성좌는, 권능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어쩌면 권능이야말로 성좌가 존재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심장과 같은 핵(核).
회귀 스킬을 가진 나에게 [회귀의 성좌]인 무티아가무릎을 꿇는다는 건, 장수가 다른 장수에게 패배하듯, 음악가가 다른 음악에게 굴복하듯, 똑같은 권역에서 내가 더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연 배후령이 다른 검사한테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무릎을 꿇고 나서도, 배후령은 여전히 고금제일인을 자칭하는 검의 제왕일 수 있겠는가?
내가 무티아에게 들이민 조건은 천금의 무게를 머금고 있었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정확히 목숨의 무게를 지닌 것이기도 했다.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당신의 나머지 뿔도 거두겠습니다.”
"......."
“3분을 드리지요.”
3분이 흘렀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지옥의 저변에 고였다.
약 160초가지나기 직전에 단한번 울린 소음은, 정적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권능을 발현합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나는 무티아가 무엇을 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의 정지를 시도한 것이다.
무티아는 도저히 180초 안에 마음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고민할 여유가 필요했다.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억지로 늘리려 했으며, 여우님에 의해 좌절되었다.
"......."
그리하여.
“……나, 무티아는.”
갈무리되지 않은 마음이 무티아의 양손으로 새어나왔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는.”
쿠웅.
무티아가 무릎을 꿇은 자리에 금이 갔고, 손을 내린 땅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따라 구멍이 파였다.
“사왕에게,”
피가 떨어졌다.
입가에서 흘러 턱선을 타고 뚝, 뚝, 떨어진 피는 무티아의 손가락들이 파고든 구멍으로 스며들었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에게……, 투항,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마로 지면을 누르고 있는 성좌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묻겠습니다. 무티아.”
“어째서 히시미트 크리츠와 결탁하여 저를 공격했습니까?”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손가락들이 파고든 구멍이 좀 더 깊어지고 구멍에 흘러든 피가 좀 더 많아져서, 땅이 조금 더 붉어질 즈음에 무티아는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와 연(緣)이 있다.”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만."
“그러나 너의 시작부터 우리는 얽혔다고 말할 수 있노라.”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지요?”
“[회귀자의 태엽시계].”
무티아는 대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과 함께.
“네가 가진 그 회귀의 스킬을 제작한 장본인이, 다름아니라, 나와 히시미트 크리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