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 별빛. (3) >
4.
“예?”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당신들이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제작했다고요?”
“……그렇다.”
무티아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도중 빠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가 끼었으므로 정확한 발음은 ‘그드득렇다’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패배자에게도 관대한 남자였다. 기꺼이 듣지 못한 척해주었다. 사실 무티아가 이를 갈든 말든 내겐 궁금한 걸 물어볼 권리가 있었다.
“제 스킬은 염제한테서 받아온 겁니다. 그리고 염제는, 제가 알기로,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한테 스킬을 받았고요. 당신이 제작에 관여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요.”
“영화와 같다.”
“네?”
“너희가 즐겨 보는 영화와 같다고 말하였노라.”
황금의 성좌는 나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올려봤다. 시선의 각도가 저러한 까닭은 무티아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음. 내게는 패배자에게 계속 무릎을 지면에 접촉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거든.
“영화를 만들려거든 감독이 있어야 하고, 프로듀서가 있어야 하며, 스폰서도 있어야 하지. EX급 스킬이란 너희로 따지면 블록버스터 대작이나 다름없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는 그 영화의 감독…… 혹은, 프로듀서에 가깝다.”
“헤에.”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정말로 미안해! 사왕!」
「옛날에 염제한테 스킬을 준 기둥이 바로 나야!」
언젠가 공녀가 내게 머리를 박으며 얘기했던 것이다.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공녀 혼자서 스킬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그럼 당신들의 역할은 뭐였습니까?”
“……승자의 질문에 패자가 답함은 결투의 예법인지라 따르고 있다만. 슬슬 일어서서 대답해도 괜찮겠는가. 아이들한테 보이기에 민망하구나.”
“에이.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게 편하잖아요. 그대로 말씀하시죠.”
“빌어먹을 놈.”
무티아는 손톱을 세워 땅바닥을 긁었다.
“어느 날, 공녀가 내게 와서 말했노라. 회귀 스킬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회귀는 나의 권능이므로, 일단 내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지.”
“영역 싸움?”
“비슷한 거다. 나는 처음에 거절했으나 예외적으로, [겨우 하루밖에 회귀하지 못하는 수준]의 스킬이라면 괜찮다고 허락했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페널티가 동반될 경우에 한해서만 허락해주겠다는 얘기였다.”
페널티.
“그러자 마침 옆에 있었던 뱀새끼가 참견해왔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그렇다. 뱀새끼가.”
무티아는 자기한테 배신자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 권리가 있다 생각하는 듯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로군. 나는 그 권리를 존중해주었다.
황금의 성좌가 말했다.
“오직 죽임을 당할 때만 스킬이 발동하는 건 어떠냐, 라고. 뱀새끼가 제안했지.”
"......."
“나는 재미있는 페널티라 여겨 승락했노라.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뱀새끼는 비밀과 미궁을 관장하는 성좌. 녀석은 죽음이 단순히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발동되는 미궁] 또한 있기를 원했다.”
미궁. 미로. 혹은 함정.
나는 [회귀자의 태엽시계]의 스킬 카드를 꺼내어, 한번 내려봤다.
+
[회귀자의 태엽시계]
랭크: EX
효과: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죽은 순간에서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회귀해도 기억과 능력치는 보존됩니다.
※단, 헌터 랭크가 높아질수록 강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헌터 유수하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그 미궁이 바로 트라우마였군요?”
“그래.”
무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뱀새끼가 말하더군. [사람의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된다. 먼 길을 걸어왔다는 식으로. 하지만 그 길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볼 때는 참으로 구불구불하여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다. 타인의 삶. 과거. 길. 나는 그것이야말로 미로 중의 미로라고 여긴다.]”
거대한 뱀은 말했다고 한다.
「인간은 비천한 존재다.」
「하지만 각자의 심장에 미로를 하나씩은 감춰둔 궁전.」
「즉 미궁(空宮)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뱀의 말을 들려주면서 무티아는 어금니를 씹었다.
“실로 녀석다운 제안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네 스킬에 죽음의 미궁을 설치하기로 한 거다."
"......."
“아마 우리 둘만 관여한 것도 아닐 테지. 탑주……."
무티아는 얘기를 이어나가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허공을 올려봤다. 푸른색이 벗겨져 칠흑으로 변해버린 하늘엔, 기둥 중 한 명, [태고의 지팡이]가 떠 있었다.
“……여기까지 얘기해도 괜찮느냐?”
“응? 아, 딱히 상관없어.”
얇고 긴 지팡이를 쥔 마법사는 권태로운 듯 하품했다.
“사왕은 탑주랑 직접 만나보기도 했거든. 사실상 최상급 보안등급을 가진 거로 취급받고 있어. 아마 쟤한텐 본산세계의 언어도 번역 돼서 들릴걸.”
“뭣이? 탑주와 직접?”
무티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나를 돌아봤다.
무슨 이런 녀석이 다 있냐는 눈빛이었다.
“넌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글쎄요. 어떤 놈인지는 잘 모르겠어도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무릎을 꿇고 얘기해야 되는 놈인 거 같긴 합니다.”
“이런 아가리를 찢어버릴……. 아니, 됐다. 말을 말자꾸나.”
무티아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공녀는 탑주의 딸이기도 하니까. 나와 뱀새끼만이 아니라 다른 성좌의 권능도 가져다 써먹었을지 모른다. 탑주한테 부탁해서 말이다.”
“음.”
“그러니 네놈은 실로 곤란한 존재인 것이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네놈으로 인해서 나도 뱀새끼도 위험에 처했다.”
“예?”
“네가 멀쩡히 건재한 이상 나는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다. 아니. 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흔들릴 정도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 스킬이 만들어지게 된 자초지종을 다 들었지만 여전히 무티아와 히시미트 크리츠의 적의는 이해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고요? 왜요?”
“네가 그 은백합인지 뭔지 하는 것이랑 시간을 연결하지 않았더냐!”
무티아가 으르렁거렸다.
“회귀란 독점적인 것이어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회귀의 가치란, 오직 나만이 과거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데 성립한다. 나 이외에 다른 놈도 시간이 돌려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 순간 회귀의 가치는, 나의 권능은, 삽시간에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하거늘! 네놈과 은백합은 둘이서 짬짜미 쳐서 [시간의 선]을 그어버렸다!”
“……시간의 선?”
“네놈이 회귀하면 은백합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은백합이 회귀하면 네놈이 사실을 알게 되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놈들 중 한 명은 [시간이 되돌려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
“설마…. [어느 회귀자의 사랑]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무티아는 분에 휩싸여 소리쳤다.
“설령 내가 신도의 소원을 들어주어 회귀시켜 주더라도 그 신도는 더 이상 독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다! 너희 둘 때문에 말이다! 알겠는가. 나는 더 이상 시간에 관하여 절대적인 권능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권능이 훼손된 것이다!”
무티아가 아득바득 울부짖는 와중에, 나는 머릿속으로 라비엘의 스킬을 되짚었다.
+
[어느 회귀자의 사랑]
랭크: EX
효과: 회귀자에게 사랑은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이 사랑하는 자와 시간을 나눌 수 없으므로. 그러자, 어떤 회귀자는 염원했습니다. ‘제 연인의 기억을 지켜주세요.’ 그 염원은 탑에 닿아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연인과 시간선을 공유합니다. 연인이 하루를 돌아가면, 당신도 하루를 돌아갑니다. 당신이 하루를 돌아가면, 연인도 하루를 돌아갑니다. 이것은 반지의 맹약. 이것은 시간의 결혼.
두 사람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단, 당신과 연인이 서로 사랑할 때만 발동합니다.
+
“과연.”
나는 사태의 진상을 이해했다.
“만일 저 혼자만 회귀자라면 상관없겠군요. 라비엘 혼자서 회귀자라 해도, 상관없을 거고요. 하지만 저희 둘은 서로의 시간선을 공유하는 바람에……."
서로 이어진 일종의 선(線).
앞으로는 이 세상에 새로운 회귀자가 탄생한다 하더라도, 우리 둘이 쳐놓은 시간의 붉은 선을 무시할 수 없다.
새로운 회귀자가 과거로 돌아가면 그 즉시 라비엘과 나는 ‘세계가 되감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이상, 시간을 홀로 독차지하는 회귀자 따윈 불가능해진 것이다.
라비엘과 나. 우리 둘을 제외하면.
“왜 그 스킬이 EX등급씩이나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등급이 최상위로 매겨진 이유가 있었군요.”
“너희들 때문에 성좌로서의 나의 가치는 수직하락하였다!”
“예에. 당신이 절 적대한 이유도 알겠고요.”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라비엘이 상관할 바는 더욱더 아니었다.
“그러게 누가 [회귀자의 태엽시계] 같은 걸 만들래요? 전부 자업자득이네.”
“웃기지 마라! 만들고 싶다 말을 꺼낸 건 내가 아니라 공녀였노라!”
“안 웃기고요. 어쨌든 트라우마 페널티를 붙인 건 여러분이잖아요? 라비엘이 [어느 회귀자의 사랑]을 가지게 된 건 따지고 보면 트라우마 페널티 덕분이에요. 음. 좀 미안한데…. 이건 시종일관 댁이 자초한 일입니다.”
“개같은 탑! 개같은 공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현현합니다.]
“혹시 누가 나 불렀어?”
“아무도 안 불렀다! 저리 꺼져라! 역신놈!”
“너무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꺼집니다.]
잠시 6초 동안 누군가가 땅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바로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아무도 그 사건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뭐. 당신이 저를 공격한 사유야 그랬다 치고….”
나는 공녀가 사라진 지면을 힐끗하며 말했다.
“히시미트 크리츠는요? 그 성좌는 뭐가 불안해서 당신이랑 동맹을 맺었대요?”
“흥. 그건 네가 배신자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러더냐.”
무티아는 고개를 휙 돌렸다.
“너로 인하여 내 권능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더는 새로운 회귀자를 만들어낼 수도 없을 테고, 설사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네놈들의 동의를 구한 다음 만들어야겠지. 그런 건 이미 번듯한 성좌라 할 수 없다. ……원통하구나.”
“무티아님!”
“저희에겐 무티아 님밖에 없어요! 다른 성좌를 모시는 일 따윈, 결코 없을 거예요!”
“세상이 끝장나는 그날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이백 명의 사도 중에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이 엉엉 울었다. 무티아는 그들을 둘러보며 하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튼 히시미트 크리츠의 사정은 본인한테 직접 얻어내거라. 나는 패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를 다하였다. 이 이상 나를 모욕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구나.”
"하긴."
회귀의 영역에 있어 나는 무티아보다 강하다는 걸 입증했다.
이번 결투를 통해서.
이 탑에 흐르는 시간들을 역사책으로 치자면, 오로지 나와 라비엘의 시간이 본기(本紀)가 되었다. 무티아가 자아내는 시간들은 지류 技流)로 격하된 것이다.
‘무티아한테 얻어낼 건 다 얻었다. 그럼 이제는…….'
나는 눈을 돌렸다.
허공.
승자와 패자의 대화를 지켜보던 [태고의 지팡이]가 그곳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기둥이시여.”
“듣고 있어.”
“저보다 한참 선배인 성좌가 둘이나 담합하여 기습했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 어떠한 경고도 미리 받지 못했고요. 심지어 성좌가 되었다는 것조차 스스로 깨우쳐야 했지요. 다른 건 몰라도 후자는 부당한 일 아닙니까?”
“[미궁에 거하는 뱀]이 자신의 권능을 써서, [폐허를 추수하는 소]와 합작하여 이루어낸 일이지.”
“하지만 부당하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 바로 그래서 내가 심판으로 나타난 거기도 하고.”
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보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렴. 합당하다 싶으면 들어줄게.”
“옙. 저도 이제 성좌급이나 되었는데요. 뭐, 어리광을 부리진 않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62층이지요?”
“응. 너와 나의 기억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 아니라면.”
“제가 원하는 보상은 매우 간단합니다.”
활짝.
나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다음 63층 스테이지의 관리자로 [미궁에 거하는 눈]을 지정해주십쇼.”
“호오.”
[태고의 지팡이]가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보상치고는 꽤 재밌는걸. 어째서?”
“전투 도중에 도망친 것이 괘씸하잖아요.”
“현명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잖니?”
“함께하기로 약속한 동료를 배신한 것이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역시 현명한 일이라고 볼 여지가 있어.”
“무엇보다 저한테 싸움을 걸었으니 저한테는 마무리를 지을 권리가 있습니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결자해지의 측면에서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세상이 권리대로 흘러간다면 탑이 지어질 필요도 없었겠다만.”
[태고의 지팡이]는 자신의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여기는 탑이지. 좋아. 들어주마.”
그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몰래 지켜보는 성좌가 경악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합니다!]
몸은 도망쳤어도 눈과 귀는 여기에 열어두고 있었던 건가.
항의 메세지가 빗발쳤지만 [태고의 지팡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기가 편할 때만 눈을 깜빡였다.
“별로 부당하지 않은데.”
[‘미궁에 거하는 눈’이 이럴 순 없다고 격하게 외칩니다!]
“나 기둥이야. 이럴 수 있어.”
[‘미궁에 거하는 눈’은 이번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않는 게 아니라 잊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
오케이.
“여우님.”
“삐약?”
“스테이지 클리어 선언해주세요. 바로 가죠.”
목도리가 되어 내 목을 감싸고 있던 여우님이 한차례 꼬리를 살랑거렸다.
[퀘스트 클리어!]
[62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당신의 요망에 따라 63층으로 즉시 전송됩니다.]
그러자 거의 비명에 가까운 메세지가 울렸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칩니다!]
물론 내가 들려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돼."
그리고 모래바람이 내 눈앞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