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 별자리들의 경매. (2) >
2.
[68층 스테이지가 매물로 나옵니다.]
[69층 스테이지가 매물로 나옵니다.]
나는 멍하니 머릿속에서 연달아 울리는 메세지를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실제로 내 얼굴은 물고기 얼굴, 붕어빵 면상처럼 될 지경......
아니. 이 말장난은 좀 아니로군.
그냥 계속 멍하니 지켜보자.
[70층 스테이지가 매물로 나옵니다.]
“그만.”
마침내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스테이지 가운데 맨 마지막 층까지 매물로 나왔다.
탑의 기둥, [태고의 지팡이]는 지팡이를 가로그었다.
“그 너머부터는 내가 관장하는 영토가 아니야. 당신들도 사왕한테서 도망치고 싶으면 다른 기둥을 찾아보렴. 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성좌도. 기둥이란 존재를 아예 처음 들어본 성좌도 있겠지만, 이번이 특별 케이스라고 보시고......."
메세지가 끊어지고 사방이 적막해졌다.
“그럼 이제, 매물이 올라왔으니 사갈 사람을 구해볼까?”
오래는 아니었다.
“경매의 요지를 설명하겠어.”
딱, 태고의 지팡이가 지팡이 끝으로 허공을 짚었다.
“알다시피 사왕은 [헌터], 다시 말해 일백층 [천공극점(天孔極點)]을 향해 탑을 오르는 도전자야. 아직 완전히 개화하진 않았지만 [비명을 모으는 하늘]이란 이름을 받은 성좌이기도 하고.”
과연.
헌터는 탑에서도 탑을 오르는 자를 뜻하는 말인가.
“그러니 이제부터는 시험을 내리는 선생과 시험받는 학생 간의 싸움이 아니라, 전사와 전사 간의 정정당당한 결투라고 볼 수 있겠네.”
마법사의 목소리는 음도가 낮았고 온도 또한 낮았다.
겨울날 야외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처럼.
탑 위에 거처한, 수많은 별자리들은 일순 관객이 되어 마법사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모든 전사가 결투에서 도망칠 권리가 있다고 봐.”
마법사의 눈은 은색이었다.
“검이란 들고 싶은 자만 들어야 결투에 쓰이는 법이니까.”
칼날의 색을 닮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여, 누가 기꺼이 사왕과 결투하길 원하지?”
"......."
“무수한 별자리들 중에 아직 승리의 기쁨을 잊어버리지 못한 짐승은 누구일까. 하늘에 올라서도 땅바닥에 비늘이 쓸리는 쾌락을 떨어 트리지 못한 뱀은 누구려나. 탑주의 품에 안기고 나서도 주인으로 모시길 거부한 별은 지금 어떠한 빛을 흩뿌리는가.”
딱, 하고.
마법사는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64층. 경매 개시.”
[‘불을 태우는 새’가 입찰합니다.]
마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메세지를 발신한 자가 있었다.
[‘불을 태우는 새’는 뒈지기 싫으면 자기보다 상회입찰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법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그런 말투를 쓰면 오히려 독이 올라서 달려들 애들이 한둘이 아닐걸?”
[‘불을 태우는 새’는 사망하기 싫으면 다음 스테이지부터 경매에 참여할 것을 조언합니다.]
“좋아. 훨씬 나아졌네.”
나는 두 문장 간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마법사의 귀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감지되었나 보다.
얼굴 모를 성좌가 연거푸 메세지를 쏟아냈다.
[‘불을 태우는 새’는 경매의 방식에 관해 의견을 제시합니다.]
[‘불을 태우는 새’는 지금 한번에 70층까지 관리자를 정하는 것보다, 사왕이 스테이지를 하나 격파할 때마다 그다음 층을 경매에 올리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불은 태우는 새’는 왜냐하면 사왕이 64층에서 패배할 경우, 기껏 65층을 입찰한 성좌만 새가 되기 때문이라고 매우 논리적으로 강변합니다.]
“흐음….”
마법사는 왼눈을 감았다.
“맞는 말이군.”
[‘불을 태우는 새’는 자신이 언제나 옳은 말만 함을 일깨웁니다.]
“그렇다고 칠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어.”
마법사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입찰가는? 얼마에 관리자 자격을 사고자 하지?”
[‘불을 태우는 새’가 대답합니다.]
[자신의 전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네. 64층의 관리자를 ‘공명정대한 구미호’에서 ‘불을 태우는 새’로 변경하겠어."
그걸로 끝이 난 것이다.
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사왕. 다음 무대에 오르렴.”
"......."
내 목에 똬리를 튼 여우님이 삐약, 울었다.
여우님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그래요. 저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실뱀, 히시미트 크리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실뱀이 나지막하게 끼에에엑 울부짖는 걸 가볍게 씹으며 턱을 끄덕였다.
“솔직히, 이 뱀은 베어도 손맛이 부족했거든요. 신님. 부탁드립니다.”
“삐약.”
내 말에 여우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선언했다.
[퀘스트 클리어!]
[63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당신만을 위한 오르골’은 이후, 64층부터 69층까지 모두 이전 스테이지와 동일한 퀘스트를 당신에게 부여합니다.]
[당신의 요망에 따라 64층으로 즉시 전송됩니다.]
모래바람이, 눈앞을 휘감았다.
3.
-좀비야.
사막을 건너온 향기가 코끝을 감싸고 전신에 소용돌이칠 동안, 그 짧은 찰나에, 배후령은 내 의식에 직접 말을 건넸다.
-나는 아흔아홉 번째 층까지 올랐지만 기둥이란 걸 몰랐어. 생각해보면 기둥을 만나본 적이 없는 건 아닐 거다. 만났는데 까먹은 거겠지.
'.......'
-기둥인지 뭐시기 하는 놈들한테는, ‘자신들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는 권한’이 있을 거다.
그렇다.
분명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이 짓거리가 끝나고 나면, 그러니까 네가 70층까지 오르고 나면 기억이 몽땅 사라질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배후령이 말했다.
-넌 탑주(塔主)를 만났다. 제아무리 기둥들이 잘난 녀석들이라도 탑주가 의미를 부여한 시간을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
그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아쉬움에 젖어 있었다.
-너와 나는 걸어온 길이 다르니까.
검제가 말했다.
-그 길을 가라.
마침내 모래바람은 나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이제 너를 약하다고 깔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눈을 떴다.
[당신은 64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눈을 뜨자, 그곳은 회색.
오직 잿빛만이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대지였다.
[‘불을 태우는 새’가 현현합니다!]
그 세상의 한복판에 온몸이 불타오르는 새, 한 마리의 불사조(不死鳥)가, 광활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4.
“----원통하였다.”
강렬한 냄새가 코의 점막에 들러붙었다.
탄내였다.
전신이 타오르는 새는 자신의 두 날개로 능히 세상을 감쌌다. 하늘과 땅 사이를 날개가 거닐었으며, 불타는 날개 덕에 상하의 구분이 없었다.
올려다봐도 내려다봐도 모든 것이 불탄 재였다.
“검제가 우후죽순의 기세로 탑을 오를 적에 나는 그를 무시했다. 괄시했다. 그렇기에, 탑이 세워진 이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무사와 자웅을 겨룰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렸지. 원통하고 또 원통하였다.”
나는 칼자루를 쥐었다.
“당신이 왜 경매에 참여했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불사조의 눈이 이쪽을 내려보았다. 사실, 저것에 눈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불사조는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불길이 집어삼키지 못한 부위가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불새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혼의 눈으로 나를 노려봤을 것이다.
“너는 검제의 후인이라 들었다. 사실인가.”
“불에 타는 귀로도 맞는 말만 골라 들었군요.”
“좋다. 좋은 기회다. 두 번의 원통함을 나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는 법.”
불사조가 날개를 펄럭였다.
온 세상에 내려앉은 잿가루가 요동치며, 날개짓에 휩쓸렸다.
회색의 눈이 흩날려 내 뺨에도 스쳤다.
“나는 불을 태우는 불. 흉조(凶比)이자 흉조(凶鳥)요. 곧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를 원하는 불이다.”
“사왕입니다.”
나는 뺨에 묻은 재를 닦았다. 입이 텁텁했다. 잿가루가 밀려들어와 목구멍을 메웠다. 불이 남긴 흔적을 기꺼이 씹어 마시며 결투의 예를 표했다.
“검을 부러트리길 원하는 검이지요.”
더 이상 대화를 나눈들 무의미.
어느덧 나를 따라 스테이지에 올라온 심판자, [태고의 지팡이]가 우리 둘 사이에 섰다.
마법사가 기나긴 지팡이를 들어 땅바닥을 툭, 쳤다.
그 자그마한 신호를 신호로 삼아 나는 잿더미를 밟고 달려들었다.
“히시미트 크리츠. 약속을 이행하십시오.”
지난 스테이지의 패배자가 내 명령에 반응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꿈틀.
주머니 속에서 실뱀이 기어나와 내 손목에 감겼다. 팔찌와 같이. 뱀은 앞으로 탑 공략을 도와주겠노라고 맹세했으며 이에 약조를 이행한 것이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적의 정보를 폭로합니다.]
오러의 흐름 속에서 시간은 느려졌고, 더디어진 유속 속에서 문자들이 눈앞에 새겨졌다.
나는 적의 진명을 볼 수 있었다.
불을 태우는 새不死鳥.
도철響醫.
뒤이어, 불사조의 근원이 허공을 수놓았다.
일필휘지.
히시미트 크리츠의 글씨는 그 자신의 몸처럼 구불구불하면서도 역안의 안광처럼 선명하여 읽기 쉬웠다.
+
도철은 불입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정도(正道)라면 불은 거꾸로 거스르는 역심(逆心). 도철의 불은 다름아니라 감정을 나타냅니다.
불은 타인을 집어삼키며 자기 자신을 키웁니다. 그것에 세상을 내다보는 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철이 관장하는 영역은 감정 중에서도 오로지 맹목된 것. [증오], [혐오]이며, 무엇보다 자신을 과시하는 데서 녹아내리는 [쾌락]입니다.
그것은 당장에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지만 영원히 죽지 아니하며, 기실, 오로지 타인만을 죽입니다.
제가 타인을 관음하는 쾌락에 빠졌다면, 도철은 오직 자신을 전시하는 데 중독된 자.
자신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나 그 실체는, 주변에 태울 것이 없다면 스스로 타오를 수조차 없는 존재이니.
그의 이름은 [불을 태우는 불], [자신을 먹는 자신], [맹목].
다만 눈이 멀어버린 불입니다.
+
과연.
나는 한순간에 불사조의 정체를 꿰뚫었다.
“검제와 싸우지 못했다는 것에 한이 맺힌 게 아니로군요.”
성좌의 날개가 펄럭였다.
달리 말해, 불사조는 눈을 치켜떴다.
인간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외관을 지니고 있었으나 나는 [불의 표정]을 읽는 것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성좌를 휘감은 불꽃이 구부러지는 각도, 불길이 갈라지는 결, 불씨가 타오르는 조짐을 보고 그것의 심리를 보았다.
“당신은 그저 검제라는 한 명의 ‘이벤트’에 참여하지 못했던 게 원통했을 뿐이에요. 전사와 전사의 결투 따윈 관심사가 아닐 겁니다."
"......."
“그래도 내가 검제와 한번 붙었다. 나, 사왕이라는 사람과 검을 나누어봤다. 그 명함이 고플 뿐. 운 좋게 그 명함을 가졌던 과거의 성좌들이 질투나고, 저에게 패배한 성좌들의 모습이 부러워서, 저와 진정으로 겨룰 수 있었던 별자리들의 진심이 샘이 나서, 당신도 한 자리 끼어보려 나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전음(傳音)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당신의 머릿속엔 지금쯤, 저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대한 그럴듯한 광경을 연출하여 자신을 다른 성좌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지만 연구하고 있겠군요.”
"......!"
불사조는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할 시간이 없어서였다.
내가 오러를 끌어올려 가속시킨 시간의 속도를 저 성좌는 전혀 따라오지 못했다. 저 자가 한마디를 내뱉으려 할 때 나는 열두 마디를 쏟았으니, 성좌에겐 반박할 차례마저 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그러한데 검의 속도는 어떠하겠는가.
“아마 유수하에게 화염 스킬을 선사한 성좌도 당신이었을 테지요.”
검제가 평하길, 가을비의 마왕 에스델이 D급 성좌였다고 했던가.
순수하게 가진 힘만 따져본다 해도, 이 불새 또한 딱 그 정도. D+급에서 C-급이리라.
“저와 승부를 벌일 생각도 없는 자를 길게 상대해줄 시간 따윈 없습니다.”
일섬.
나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아서 고했다.
“꺼지십시오.”
그리고 유수하의 신이 될 수도 있었을 성좌를 베었다.
비명이 이어졌다.
가을비의 마왕을 베기 위해 수 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이번에는 수 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예순네 번째 층. 결투 종료. 승자는 사왕.”
싸움의 자초지종을 지켜본 [태고의 지팡이]가 선언했다.
티가 되어 날리는 잿더미 한복판에 목소리가 나직이 가라앉았다.
“그럼 바로 65층의 경매를 개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