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 절대음악(絶對音樂)편. (1) >
1.
[당신의 요망에 따라 70층으로 즉시 전송됩니다.]
나는 주저할 것 없이 모래바람에 휩싸였다.
[당신은 70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태곳적부터 햇살로 달구어진 모래의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태양의 냄새.
어린 시절, 조약한 놀이터에서 놀다가 문득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나른하게 풍기었던 내음이 있었다. 향기로운 사토(沙土). 조금 전까지 결전을 벌이느라 가열되었던 몸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들려온 메세지도 있었다.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당신의 등정을 축복합니다.]
어디선가 내 싸움을 지켜보았던 걸까?
왠지 모르게 공녀라면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뜯어먹으며 구경할 거 같노라고 상상하자, 미소가 지어졌다.
“여유롭구나. 표정부터 달라.”
그런 내 앞에 또 다른 기둥.
[태고의 지팡이]는 앉아 있었다.
“내가 관리하는 로비에 도전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꽤 오랜만이란다. 너의 뒤를 받쳐준 자. 검제도, 이곳에 올라왔을 때는 너처럼 태연한……."
마법사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 너보다 더 태평한 표정을 지었지. 결국 그런 이들이 등정에 성공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궁금해지네요. 어떤 얼굴이었는데요?”
“여긴 손님한테 술도 대접해주지 않냐 하는 얼굴이었구나.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고 말이야. 물론 말할 때 참으로 참신한 비속어들도 곁들였는데 그거까지 알려주진 않을게.”
나는 혀를 쯧쯧 차고 배후령을 돌아봤다. 배후령은 뭐? 하는 눈빛을 선보였다.
-나 그런 기억 없어. 물론 여기 들어서자마자 별볼일 없다는 생각이, 뭐 얻어먹을 게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거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만 아무튼 그런 적 없다.
“물론 검제 본인은 떠올릴 수 없을 거야.”
마법사가 마치 배후령의 볼멘소리를 들은 것처럼 말했다. 정말로 들리진 않았을 거다. 귀에 들리지 않는 것들을 머리로 미리 예측할 만큼의 지능을, 그저 당연하다는 듯 지녔을 뿐이다.
“검제만 기억이 벗겨진 게 아니란다. 우리 기둥들을 탑에서 처음으로 만난 자들은 모두 기억을 잃지. 방금 스테이지 경매가 열렸었다는 기억조차 빠르게 잊히고 있어.”
"......."
“그래. 사왕. 당신을 제외하면.”
마법사는 기나긴 지팡이를 어깨에 기대었다.
70층은, 산천초목이 없어 하얀 세상이었다. 다만 공녀가 머물렀던 [하얗기만 한 대기실]과는 달랐다. 스르륵…. 크고 작은 정육면체들이 마치 루빅스 큐브처럼 돌아갔다.
어떤 큐브는 달만큼이나 거대했다. 또 다른 큐브는 주먹보다 작았다.
스륵. 끊임없이 맞물려 작동하는 톱니바퀴와 같이 큐브들이 움직였다. 입방체들은 새하얀 배경과 동화되었고, 곧 튀어나와서 모난 각을 세웠으며, 다시 하얗게 사라졌다.
그것. 단지 잠시 동안 모였다가 되돌아가는 것. 단순한 순환을 영원토록 반복하는 그것이 이 세상의 천체(天體)이자 물체였다.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망각을 바란 장본인은 탑주야.”
마법사는 동쪽에서 달려든 질문을 서쪽부터 더듬었다.
“탑주는, 자수정은, 탑이 온전히 너희의 것이 되길 원했지. 적어도 그렇다고 착각하길 원했어. 관리자의 자취는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다는 거야.”
“그런 것치고는 스테이지를 오를 때마다 저희를 축복해주는 메세지를 건네주던데요.”
마법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기적이지? 당신들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공작님이라서. 당신들이 필요로 할 때만 존재하고 싶어하는 신이란 그런 법이지.”
마법사의 등 뒤에서 큐브들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탑주를 구할 수 없어.”
"......."
“기둥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그래. 말하자면, 당신에게 있어 살천성과 같은 자가 탑주에겐 우리들인 셈이야. 빚을 졌지. 삶을 기대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탑주를 돕는 거야. 즈라쿠아…… 탑주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 왕국인은 모두 주박에 걸렸단다.”
마법사는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외부에서 온 사람이면 다르다는 거군요.”
나는 마법사의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검제와 같이. 저와 같이.”
“바로 그거야.”
은빛 눈동자가 침잠했다.
“사왕. 나는 너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 게 아니야. 지우지 못하는 거지. 너는 그런 지위와 권한을 스스로 얻어냈어. 천 년을 기다리고 만 년을 기다리면, 백만이 쇠하고 천만이 영락할 정도로 기다리면, 99층에 오를 인간은 도래하겠지. 얼마든지. 언젠가는 100층도 깨질 거야. 몇 번이든. 하지만, 당신과 같은 입장을 손에 넣는 존재는 언제 다시 허락될지 몰라.”
"......."
“당신은 기적이야. 공녀가 만들어낸 빈틈에서, 무티아와 히시미트 크리츠를 엮어서 벌여낸 틈새로, 하무스트라가 빗물을 뿌려주어, 당신이 피었어. 탑주가 짜놓은 거미줄의 허점을 당신은 잡아버린 거야. 그리고 나는 우주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기적을 다시 한 번 기다려 줄 생각이 없어.”
나는 물었다. 재차.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오직, 당신이 바라게 될 것과 똑같은 것을.”
그 순간이었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치켜들어 허공을 건드렸다. 하얀 배경으로부터 툭 튀어나온 큐브의 모서리를, 지팡이가 건드렸다.
“지금까지 당신은 [전문] 분야로 싸워왔어.”
큐브가 색으로 물들었다.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큐브는 각진 모서리가 닳아버렸다. 아니, 녹아버렸다. 꼭 비늘에 찔린 풍선에서 물감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단지 풍선과 달리 큐브의 용량은 무한했다.
“이제부터는 [비전문] 분야들에서 분투해야 할 거야.”
노란 물감이 녹아내려 바닥을 적셨다.
처음엔 마법사의 발치를.
다음으로 나의 그림자를.
“당신이 이제껏 관심을 별로 안 준 곳들이지.”
그리고 지평선을.
발밑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그 노란색은 황금보다 온순했고 밀밭처럼 부드러웠다.
“무(武)의 성좌라고 해서 오로지 전사만 그를 섬기는 건 아니란다.”
밀알의 색을 밟으며 마법사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평생 무예와 담을 쌓고 살아온 상인조차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강도와 싸움이 붙을 수 있어. 사랑을 쫓는 연주자가 연적과 결투를 벌일 때도 있어. 음악, 의업, 마법, 학업, 농업, 상업, 항해……."
노란 물결에 인간 군상이 비추었다. 누군가는 땅을 향해 곡괭이를 내리찍었으며, 누군가는 이름 모를 바다로 뱃머리를 틀고 있었다. 띠잉! 바이올린처럼 생긴 악기의 현을 뜯는 남자도 있었다.
“당신이 성좌가 되려거든 기꺼이 손길을 뻗칠 줄 알아야 하는 업(業)들이구나.”
“뭐. 거창하게 말해서 그런 거고. 간단히 말해서 당신한테 있어선 비전문. 아마추어 분야들이야.”
마법사의 입가가 미모사 잎처럼 찔끔거렸다.
나는 좀 뒤늦게야 그게 미소라는 걸 알아챘다.
“그러니 당신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는지 안 했는진, 당연히 [전문가]를 따로 불러서 심판을 맡겨야겠지?”
마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화아악!
빛이 뿜어지면서 그 속에 어렴풋한 형상이 맺혔다.
"흠?"
사람의 형태였다.
“어? 흐음? 어어어----."
아마도 식사를 하던 도중 아니었을까. 마법사에 의해 소환된 누군가는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소환되었고, 철커덩! 쇳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찧었다.
“아이코! 이런, 이런. 흑룡주인가? 아니면 이단심문관? 초대장도 없이 이렇게 불러내면 곤란하다만.”
인상적인 부분은 낙법이 굉장히 안정적이었다는 점이다. 갑자기 소환되었으며, 전혀 예비치 못한 동작으로 넘어졌음에도, 그 사람은 바로 바닥을 굴러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다.
“오?”
"엑."
상대방도 나도 서로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
“뭐냐, 김공자. 네가 불렀던 것인가. 소환술까지 배우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반들반들 닦인 갑주가 반짝였다.
일상생활에서 갑옷을 입고 다니는 지인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파트리시아?”
“그렇다. 괜히 걱정했군. 난 또 무슨 비상사태가 벌어져서 급히 불려나온 것인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바로 성기사였다.
“참고로 김공자 너는 내 본명을 알고 나서도 유일하게 파트라슈 드립을 치지 않은 친구다.”
“어,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대화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볼게요. 그게 뭡니까?”
“뭐… 라고…? 파트라슈를 모른다고?”
성기사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인가?”
“왜 제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심각하군. 세상이 멸망할 징조다. 김공자, 너는 대체 아는 게 무엇인가? 무엇을 알기 위해 태어났는가? 그러고도 우리 탑을 대표하는 헌터라고 자칭할 수 있겠나? 자신의 삶을 깊이 반성해볼 것을 권한다. 다 반성한 뒤엔 [플랜더스의 개]를 찾아 보고 울어라. 너에게 눈물샘이란 기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러기 위해서다.”
“오케이. 이젠 지금 상황에서 주고받을 대화가 아니란 걸 확실히 알겠습니다.”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고 제정신이냐 묻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는 360% 친구였다.
왜 하필 360%냐면, 음. 한 바퀴 돌았다고.
"사왕."
파트리시아와 내가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태고의 지팡이]가 입을 열었다.
“70층부터 해결해야 할 퀘스트를 알려줄게.”
우리 두 사람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을 너의 신도(信徒)로 만들렴.”
"......."
“71층부터 79층까지. 한 스테이지마다 한 명씩. 다 합쳐서 최소한 9인의 신자를 포섭하는 것. 그게, 성좌로서 네가 이루어야 할 최초의 임무야.”
마법사가 입가를 움직였다.
이번에는, 명백한 미소였다.
“신도가 없는 성좌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2.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과연. 알겠다! 모든 걸 완벽히 깨달았다!
달리 말해 사람이 아닌 귀신은 좀 시끄러웠다.
-왜 나한테 검제교(劍帝敎) 같은 애들이 따라붙었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 응? 만약 나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종교가 생기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쳐들어가서 박살냈을 거란 말이지. 새끼들아, 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제삿상에 올려서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냐, 라고.
‘당신 귀신 맞잖아요.’
-아니거든? 아니었거든?
배후령이 콧방귀를 뀌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 싶었어. 그냥 내가 너무 잘난 나머지 가만히 있는데도 알아서 모시는 것들이 생겼구나, 넘어갔는데. 쯧. 이제 보니까 나도 70층부터 80층까지 깨면서 이 퀘스트를 뛰었던 거구만.
‘어라?’
-그래, 그래. 저 기둥인지 뭐신지가 말했잖냐. [기억을 없앤다]고. 나는 스테이지들을 깬 다음 묘하게 기억이 왜곡된 거지. 결과적으로 신도들을 만드는 데 성공해서 검제교가 생겼지만, 과정 자체는 스리슬쩍 잊어버린 거다.
제법 그럴싸했다.
의도치 않게 검제교의 탄생 비화가 밝혀지는 와중에 [태고의 지팡이]는 입술을 열었다.
“원래라면 70층부터 80층은 험하디 험한 난관이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도전자와 똑같은 탑의 헌터들이 시험관으로 선택되는데, 보통 도전자는 그 헌터들이랑 사이가 안 좋아. 어떻게든 떨어트리려고 혈안이 되더라?”
“헤에….”
“아무리 실력이 빼어난 헌터라도 보통 여기서 떨어져. 아니면, 수백 년이 넘도록 여기서 헤매든가. 하지만 어쩌면 사왕한테는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과연.
마법사는 성기사에게도 스테이지의 기믹을 알려줬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성기사였지만, 금세 상황의 전말을 알아들었다.
“요컨대 내가 김공자를 신으로 모시면 간단히 71층이 클리어 된다는 얘기로군.”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아이야.”
“성좌를 모시는 데 별다른 조건이 필요한가? 예를 들어 마음속 깊이, 진심의 진심으로 모셔야 한다거나, 영혼을 갖다 바쳐야 한다거나, 그런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모신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아니. 사왕이 71층에서 발버둥을 치고, 네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인정하면 그걸로 끝이야.”
“좋군.”
성기사는 나를 돌아보았다.
“공자여.”
“네."
“나의 얼굴을 잘 보아둬라.”
평소와 같이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내 이름은 파트리시아. 바로…, 너를 신으로 만들 인간이다.”
“감사히 여기도록.”
뭐지.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71층에 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아니, 숨만 쉬어도 좋다. 숨을 쉬는 것 정도라면 누구든 실패하지 않겠지. 괜찮다. 내가, 너를, 신으로 만들어주겠다.”
어째서 표정도 말투도 세상 진지한데 이렇게… 뭔가, 좀. 심장을 꾹꾹 찌르고 당장 아웅다웅 드잡이 쌈박질을 시전하고 싶어질까.
“설령 네가 병신짓을 하더라도… 나는 너를 신으로 받아줄 것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신이니까 말이다.”
“댁이랑 내가 진짜 친구를 먹긴 먹었구나?”
첫 번째 신도 후보부터 범상치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