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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자살헌터-343화 (343/400)

343화.  < 절대음악(絶對音樂)편. (4) >

아이들의 심장이 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게 재밌는 걸까?’

나는 건반 위로 바삐 손가락을 움직였다.

점점 더 빠르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왜, 그저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혹되는 걸까?’

이 세상에 호흡은 한정된 것이었다. 연주자와 관객은 이미 정해진 숨의 총량을 나눠 가졌다. 내 손가락이 가빠질수록 아이들의 숨은 느려졌으며, 내 손가락이 느긋하게 유영하면 아이들은 비로소 숨을 놓았다.

‘어디까지?’

건반을 두드렸다.

"■■......."

"■■■? ■■■?"

대계단을 오가는 행인들이 한두 명씩 발을 멈추었다.

나는 오러를 확장시켰다. 여섯 명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방금 멈춰버린 청년을, 눈밑에 새까만 그물이 드리운 여인을, 그들의 심장이 박동하는 리듬을 감지했다.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곧, 생각이 희미해졌다.

‘냄새.’

나는 세계수 아래에 흐르는 냄새를 맡았다. 킁, 하고. 비록 소리가 안 들릴지언정 오러에 의해 강화된 후각은 제일 잡스러운 냄새와 가장 천박한 냄새까지 잡았다.

콧구멍의 깊은 속까지 초록색으로 물들어버렸다.

‘동물들의 냄새……. 짐승의 냄새.’

대계단에 머뭇거리며 내 연주를 듣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었다. 짐승들도.

세계수의 나지막한 나뭇가지에 올빼미, 종달새, 쏘쩍새, 고블린처럼 귀가 길게 자라난 새, 하마처럼 두꺼운 입술을 가진 새, 공룡처럼 퇴화된 앞발이 달린 새, 내가 국적을 몰라 이름으로 불러줄 수 없는 새들이 고개를 쭉 내밀어 떨구었다. 새들의 부리가 떨어지려는 그 아래쪽에서 나는 연주하고 있었다.

'......생명의 냄새.’

세계수에서 눈을 끔뻑거리며 내 피아노를 쳐다보는 것은 짐승만이 아니었다. 꽃들도.

산사꽃, 수국, 상사화, 산수국, 불국화, 벚꽃, 배꽃, 하양을 아름드리 눈알에 박은 꽃들, 잘게 깎은 손톱들을 꽃잎으로 피어낸 아이들, 손가락을 오므려 한줌의 하늘을 꼭 붙잡은 것들, 이름을 가지기 전에 색을 먼저 가진 생(生)들이 나를 내려보았다.

‘오러의 냄새.’

그러니까 이곳은 하나의 천국이었다.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꽃잎 한 점에도 오러가 서려 있었다. 누가 선물한 것일까. 악천(樂天)의 세계에서, 꽃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빗물을 마실 줄 아는 것처럼 오러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킬을 썼다. [찢어진 여신의 구원]. 구원검. 내가 기억을 버리는 대가로 일시적으로 오러를 증폭해주는 기술.

함부로 쓰지 않고자 마음먹었던 스킬이지만,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발동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많이.’

성좌에 도달한 지금의 나조차 세계수 그늘에 잠긴 아이들, 행인, 짐승, 꽃들을 모두 감지하려면 오러가 부족했다.

나는 다만 내 연주에 귀 기울이는 모든 자들의 심장을 갖고 싶었다.

‘더.’

3초 전에 연주한 기억을 놓쳐서 그다음 이어질 3초의 연주를 잡았다.

오러는, 자기 자신을 버릴수록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내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연주자로 태어났더라도, 색을 보지 못하는 화가로 태어났을지라도, 무엇이 시인지 모르는 시인으로 태어났더라도, 나는 분명히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어, 나도 듣지 못하는 곡을 썼을 테고, 나도 보지 못하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며, 나도 모르는 시를 썼을 것이다.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좋아.’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소리를 내림받아, 무엇이 화음이고 무엇이 음악인지 알아서, 그저 자신이 아는 대로 곡을 적어내리는 자에 비하면 못난 인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응, 좋아.’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것이 좋았다.

‘다들…… 예뻐라.’

사천 번이 넘도록 목숨을 버려서 깨달은 것이라면 그것이었다. 나는 사는 것이 좋았다.

깨져 부수어지는 삶만이 허락된 돌멩이였다면 부서지는 일마저 좋아했을 것이고, 겨울이 되면 봄부터 키워온 하얀색을 버려야 하는 꽃이었다면 꽃잎을 떨어트릴 적의 감촉을 사랑했을 것이다.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눈을 뜹니다.]

깜빡.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바람이 흔들렸다.

스스로 난 바람이 아니었다. 나뭇가지가 슬며시 꿈틀거렸고, 날개에 달린 깃털처럼 무수한 나뭇잎이 사라락 움직였다. 세계수. 이곳의 하늘을 뒤덮은 나무가 작게 고개짓하자, 선한 바람이 불었다.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뭇결 사이로 바람이 흐르는 속도가 그 나무의 심장 박동이고,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혀 우거지는 소리가 그 나무의 체온임을 알았다.

피어오르는 꽃은 그 나무의 시선이었다.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당신의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툭.

피아노의 하얀 건반 위로 그보다 더 하얀 꽃이 떨어졌다.

툭, 꽃잎은 먼 곳에서 떨어졌다. 아무 먼 위쪽에서. 하늘에서. 세계수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자신의 손끝에 매달린 꽃을 떨구었다. 툭. 하늘색의 속도와 초록색의 중력으로 흰 꽃은 떨어졌으며, 떨어지면서, 건반을 눌렀다.

또다시 꽃이 떨어졌다.

꽃은 떨어질 때마다 건반을 두들겼다. 연주였다. 내가 왼편으로 몸이 기울어져 피아노의 왼쪽에서 치달으면 꽃들은 오른편에 후두둑 떨어졌다. 세계수는, 자신의 꽃을 피아노 건반으로 떨어트려 반주하는 것이었다.

"......."

빗물이 흘러내리듯 건반 위로 꽃잎이 흐드러졌다.

나는 손가락을 놀렸다. 백건(白鏡)에 백화(白花)가 피었다. 건반을 누르면, 이미 그곳에 누군가가 떨어트려 놓은 꽃을 나도 모르게 짓눌렀다. 짓누르게 되었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꽃잎에 지문이 남겨졌다. 손가락과 건반 사이에서 눌러지며, 꽃은 조금 문드러졌다. 뭉개졌다. 으깨어졌다. 꽃잎에서 즙 같은 물기가 흘렀다. 아주 약간. 약간의 향, 아주 조금의, 향, 향…… 향.

뭉개지는 향기가 그 나무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흰 건반에, 하얀 꽃잎과, 하이얀 냄새가 흘렀고 눈치 채보면 사방이 만발한 꽃 무더기였다.

누군가가 눌러주기 전에는 물기를 흘릴 줄도 모르는 꽃잎이었으며, 물을 게워낼 때조차 악취가 아니라 향취를 흘리는 하얀색이었다.

천국에는 그런 나무가 한 그루 피어 있었다.

‘예뻐라.’

여기에 처음 나무를 심어놓은 누군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

"■■......."

아이와 행인과 짐승이 입을 열었다. 아마 그들도 꽃을 따라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내 귀엔 세계가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정말로, 상관없는 것이다.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히든 스테이지 클리어.]

떨어져 내리는 꽃의 무더기 한복판에서.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70층으로 전송됩니다.]

[‘천국을 노래하는 악장’이 당신을 배웅합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나는 눈을 떴다.

5.

눈을 뜬 곳은 70층 로비였다.

"......."

파트리시아가 말없이 선 채 나를 바라보았다. 파트리시아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무엇을 첫마디로 말할까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마침내 장고가 끝났는지 “음”, 하고 파트리시아가 말했다.

“김공자.”

“예."

“오러는 치사한 사기이므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체 왜 첫마디를 고민했던 겁니까? 네?”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건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 너를 칭찬하기 위해서 내가 부끄러움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건 너의 이기심이고 오만이며 자만일 것이다.”

“저 아무런 말도 안 했거든요!?”

“하아.”

파트리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었다. 말하지 않았나.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기꺼이 스테이지 클리어를 인정해주겠노라고. 실제로도, 네가 형편없이 첫 번째 연주를 망쳤을 때도 나는 바로 클리어를 때려주었다.”

“댁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심한 말을 하는구만……?”

“너의 마지막 연주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파트리시아는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까지 너라는 인간과 같이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군……. 네 마지막 연주를 들었을 때는 너와 함께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게 더 쑥스러운 말 아닌가? 압도적으로?

너의 미묘한 감성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친구야.

“응. 첫 단추를 푸는 작업으로써 훌륭했어.”

내가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릴 때 [태고의 지팡이]가 끼어들어 말했다.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데도 멋진 활약이었어. 성좌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신도를 얻은 걸 축하해.”

[당신은 신도를 구합니다!]

[성기사가 당신의 신도가 됩니다.]

[현재는 신도에게 내릴 수 있는 가호가 없습니다.]

[현재는 신도에게 내릴 수 있는 권능이 없습니다.]

메세지가 연달아 들려왔지만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다. 가호라거나. 권능이라거나. 79층까지 격파한 다음에야, 성좌로서 입지가 완전해진 뒤에 비로소 뭔가가 가능해지겠지.

설령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파트리시아한테 신으로 행사할 생각은 없거니와, 신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더 없지만.

“그럼 수고해라. 김공자……. 힘내라.”

파트리시아의 발목이 하얀 빛에 휘감겼다.

심판자로서의 역할이 끝나 1층으로 귀환되려는 것이다.

잘 보면, 파트리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자에게 설명을 들었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군."

"......."

“기억은 사람마다 가진 섬이다. 너를 외딴 섬에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심란하다만, 너라면 바다 따윈 마음대로 헤엄쳐서 멋대로 오갈 것이라 믿는다.”

“파트리시아.”

“음.”

“저를 암살하려면 17가지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론 부족할 겁니다.”

"......."

파트리시아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1초 동안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파트리시아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표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다시 쪼개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고민하는 기색이 눈빛에 서린 것이다.

그리고 선택했다.

“……과연.”

파트리시아가 택한 건 [허가 찔린 표정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였다.

“실망했는가…?”

“아니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뭘. 좀 더 잘 알게 됐을 뿐이지요.”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목격했다. 겪은 것이다. 검성도, 흑룡주도, 지금은 죽어 없어진 과거의 많은 헌터들도……. 영원토록 변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단순히,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서.”

“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너와 함께 죽어도 괜찮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요.”

"......."

“영광입니다.”

“정말,”

파트리시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맛이 없는 녀석이다. 너는.”

첨벙!

파트리시아의 발밑이 물컹해지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마법사에 의해 전송된 것이다.

루빅스 큐브 같은 입방체들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간에, 다시 마법사와 나, 둘만 남겨졌다.

“자아. 곧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겠니? 아니면, 휴식할 시간을 줄까.”

“전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넘어가자꾸나.”

얄따란 지팡이가 하얀 바닥을 탁 쳤다.

“악천은 그나마 당신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고 할 수 있어. 음악이 당신의 비전문 분야이긴 했어도, 아예 소양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어떨까?”

파트리시아가 사라진 자리에 화아악, 빛이 솟아났다.

“다음에 당신이 가야 할 곳은 [돈의 세계]야.”

눈부신 기둥 너머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거렸다.

“그리고 당신의 탑에서 돈과 관련된 최고 전문가는, 아무래도 이 아이인 것 같구나.”

파트리시아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새로이 70층에 소환된 심판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으음? 허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방금 사라진 파트리시아와도 인연이 깊은 헌터.

“기이하구먼. 여기가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사왕?”

상련주(商聯主).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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