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44화 (344/400)

344화.  < 만월항해 (滿月航海)편. (1) >

1.

“과연.”

자신이 소환된 이유를 듣고 나서 백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요컨대 내가 합격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끝난다는 거 아닌가? 간단하군. 햄버거에 슬라이스 치즈를 1장 추가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야.”

“왜 하필 비유가 햄버거입니까?”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서 말일세….”

백작이 살짝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지금부터 해바라기 씨앗을 갉아먹으면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접한 햄스터 같았다.

일생 다이어트를 해본 적 없는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마 본인에겐 굉장히 힘겨운 나날이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그냥 간단히 오러로 지방을 태워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짓거리는 자네 같은 미친 오러꾸러기나 가능한 짓일세. 사왕. 세상의 모든 헌터가 다 자네처럼 오러를 기깔나게 쓰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주면 좋겠군. 지방 태우다 내장 태워버릴 일 있나?”

“안 어려운데……."

“기만질은 혼자서 즐기시게. 자아, 아무튼 나로선 반대할 이유가 없어. 합격이야, 합격. 어서 나를 1층으로 돌려 보내주게나.”

백작은 이제 됐냐는 식으로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태고의 지팡이]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진 않아. 너는 심판자로서 사왕을 지켜볼 의무가 있단다.”

“살면서 들어본 단어 중에 제일 뭐 같은 걸 뽑으라면 의무지. 그저 권력을 행사했을 뿐인데 묘하게 책임 소재를 강요한 쪽이 아니라 강요받은 쪽에 떠넘기거든. 최악의 사기꾼은 나 같은 장사치가 아니라 언어일세.”

“일리가 있구나. 그럼 고쳐 말할게. 지켜봐라. 너에겐 선택지가 없으니 내 권력에 따라야 할 거야.”

“빌어먹을.”

백작은 부채를 꺼내 허공을 툭, 툭, 쳤다. 그러자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뿅! 하고 고급진 소파가 나타나 안착한 것이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저것이 상신(商神)의 권능이라고 알려줍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만일 충분한 돈만 있으면 거의 무엇이든 상신으로부터 구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업의 신이라.

파트리시아가 쓰는 스킬들이 히시미트 크리츠에게서 비롯했듯, 백작은 대부분의 스킬이 누군지 모를 상신한테서 받은 걸까.

“좋네. 좋아. 누군가에게 강요받는 기분이 황홀해서 인생마저 행복해지는군. 최소한 내 몸이 편한 상태에서 의무를 이행하고 싶네만, 상관없겠지?”

“그거야 너의 자유란다.”

백작은 소파에 턱을 괴고 누웠다. 촤르륵! 백작이 부채를 펼치자 소파에 더하여 폭신한 베개, 고양이 인형, 감자칩, 물티슈, 콜라가 소환되었다. 심지어 감자칩은 입구가 개봉된 채로, 콜라는 빨대가 꽂힌 채로 소환된 것이다.

백작은 감자칩을 아그작아그작 씹어먹으며 나를 쳐다봤다.

“뭐 하나? 얼른 퀘스트나 뛰어보게. 까짓거 영화 한 편 구경하는 셈 치지.”

굉장하잖아….

“그 스킬 써서 다이어트는 못 한답니까?”

“다이어트 아이템을 살 돈으로 모발치료제를 살 수 있다면 믿겨지겠는가?”

“어. 가격 측정에 심각한 에러가 있는 거 같은데요….”

“내 스킬이 그 모양일세. 가끔 상품 가격이 지랄을 떠는 경우가 있어. [세계평화]라는 상품이 100골드밖에 안 해서 한번 사봤더니 [세계는 원래 평화로웠답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당신은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자신이 되었겠죠!]라는 문구가 뜨더군.”

“와우.”

“내가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그 순간 스킬 카드를 찢어버렸을 걸세.”

상신의 성격이 영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겠다.

“참, 배웅하기 전에 그저 궁금해서 묻는 거네만.”

“네?”

“본인이 담당하게 될 스테이지가 72층이라 들었네. 그럼 이미 71층은 다른 누군가가 심판역을 맡았다는 거지. 내 이전의 전임자는 누구였나?”

“아."

나는 거리낌 없이 말해주었다.

“파트리시아였습니다.”

“호오……."

백작은 콧수염 아저씨 로고로 유명한 감자칩을 집어들어 아삭, 깨물었다.

“그렇군.”

백작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 또한 그저 호기심으로 질문하는 걸세. 만에 하나 말일세. 심판자가 합격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가?”

“그러게요. 어떻게 됩니까, 마법사님?”

“영원히 해당 스테이지에서 떠돌 뿐이야. 간단하지.”

[태고의 지팡이]가 말했다.

“그래서 아예 도전을 포기하고 이전 층에 안주해버리는 헌터도 많단다. 솔직히, 아무런 걱정 없이 윗층에 도전하는 사왕 당신이 이상한 편이야.”

“흐음….”

백작은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물휴지에 닦았다.

“심판자는? 도전자가 스테이지에 주저앉게 된다는 건 알겠네. 하지만 그걸 지켜봐야 하는 심판자는 어찌 되나?”

“역시, 도전자가 스테이지에 갇힌 동안 계속 여기에 머물게 돼.”

“수십 년이 지나도 말인가?”

“응. 수십 년이 지나도. 다만, 서로 시간의 흐름은 다르구나. 도전자가 30년을 30년의 길이로 온전히 감내해야 한다면 심판자는 얼마든지 ‘가속’을 쓸 수 있어. 도전자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면 심판자는 평론가야. 평론가가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가 제작되는 데 필요한 기간과 똑같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지.”

“어디까지나 감상만 할 수 있다는 거로군. 과연, 과연……. 알겠어.”

아그작.

“대충 룰은 이해했네. 룰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지. 이번에 가게 될 세계가 [돈]과 관련된 곳이라 했나?”

“예."

“그럼 됐군. 편한 마음으로 출진하게나. 자네가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월급……. 아니. 주급이라도 받으면 곧바로 결과가 나올 것일세.”

백작의 말은 거짓이 아니겠지.

자연스럽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을 전송시킵니다.]

하얀 밑바닥이 물컹거리면서 내 발을 집어삼켰다.

내 시선의 고도와 바닥의 수위가 일치한 순간까지, 백작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작의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자네는 좋은 친구일세. 사왕.”

마지막으로 백작이 건넨 말은 그것이었다.

2.

[당신은 72번째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본래 입장할 수 없는 장소에 발을 들입니다.]

[소정의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눈을 떴다.

그곳은 통상적으로 ‘지중해 바닷마을’이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겠다 싶은, 꼭 기업들이 컴퓨터 부팅화면으로 선호할 것 같은 마을이었다.

파랑과 하양.

하늘을 이루는 두 가지 색깔을 스포이드 용기로 뽑아서, 그대로 지상에다 옮겨 심어버린 청백(靑白)의 항구.

그야말로 평화로운…….

“오렌지애플 팝니다! 싱그럽고 싱싱한 오렌지애플이요!”

“멀리 바스타 섬에서 들여온 고구마포도주를 맛보십시오!”

“혹시 두덕돼지 바베큐 아십니까? 겁나 맛있습니다.”

오케이.

그곳에는 보기만 해도 이성이 깎이고 당장 잡아서 배를 갈라 내장을 찢어야만 하겠다는 충동이 들게 만들며, 어찌 생겨도 저리 생길까 의문스러운, 사악하기 그지없게 생긴 마물의 구이가 판매되고 있었다.

이 세계는 안 돼. 탈출하자.

[당신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자발적으로 해당 스테이지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제기랄!

“실뱀아. 얼른 이 꼬라지가 무슨 꼬라지인지 해설해주렴.”

“끼에엑….”

실뱀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해당 스테이지의 일반 정보가 당신에게 공개됩니다.]

항구도시의 거리에서 좌판 상인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가운데 내 눈앞으론 글자들이 꿈칠꿈칠 움직였다.

나는 저 좌판에 늘여진 정체불명의 음식들이 해설되기를 바라면서, 꽤나 간절한 마음으로 정보를 읽었다.

+

[금천세계(金天世界)]

층수: 72층

성좌: ‘금화를 문 고양이’

난이도: B+~A+

해설(Lv.1): 모든 것이 흥정으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이곳에 공짜 따윈 없습니다. 정해진 가격 역시 없습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구입하려면 반드시 판매자와 흥정해야 하며, 이 흥정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곧 당신을 먹여 살립니다.

이 세상의 주민들이 섭취하는 영양분은 바로 거래를 통한 만족입니다. 성공리에 흥정했다, 상대방의 등골을 찰지게 빨아먹었다, 호구에게 인생 경험을 안겨주었다는 충만감이 이들을 살찌웁니다. 반대로 당했다, 속았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좌절감은 당신을 허기지게 만들 것입니다.

정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는 사람이 나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흥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

뭐야.

지옥인가.

왜 천국이 아니라 생지옥이 있는 거지?

“오렌지애플 잡숴 보십시오. 오렌지애플입니다. 한입만 베어물면 아주 그냥 과즙이 확확 입천장에 들러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자고로 포도주는 단맛이 혀끝에 감돌아야 제맛이라는 분. 그런 당신에게 고구마포도주는 완벽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거기 형씨. 편하게 마셔보십시오. 아니, 마셔라……."

“두덕돼지. 기필코, 두덕돼지!”

잘 보니까 좌판 상인들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전투에서 도망친 뒤 이틀을 굶어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패잔병들의 살기였다.

무섭다고.

[‘미궁에 거하는 눈’이 권능을 발현합니다.]

[폭로 ]

[당신은 히든 정보를 획득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강제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킵니다!]

[감추어진 정보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하는 법. 히시미트 크리츠는 빠르게 정보를 갱신했고, 본래 평범한 헌터라면 결코 접근하지 못했을 비밀들이 초장부터 공개됐다.

+

[금천세계(金天世界)]

층수: 72층

성좌: ‘금화를 문 고양이’

난이도: B+~A

해설(Lv.2): 이곳은 탑에 마련된 사후세계 중 하나입니다.

해설(Lv.3): 금천. 이 세상에 돈 이외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은 자,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할까 두려운 자, 부디, 자신의 삶이 부정되지 않기를 원한 나머지 죽음 이후의 자리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자.

그런 자들을 위해서도 하늘은 드리워집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세상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명백합니다. 도덕을 부정하기 위해 냉정한 인간이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타인을 이해하길 거부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이 바란 대로, 원한 대로,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거래뿐입니다. 모든 천국이 그러하듯 금천은 당신을 받아줍니다.

고뇌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지 마십시오.

살아온 대로 죽으십시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배불러지기 위해 거래할 것입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일용할 양식뿐입니다. 매일같이 굴러가는 쳇바퀴에 지칠지도 모릅니다만, 쳇바퀴 너머에 다른 세상이 아예 없다면 굳이 지쳐야 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영원한 노동이 당신의 영혼을 위로하기를.

+

"......."

잠깐이지만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누군가에게 천국인 곳이 다른 사람한텐 지옥인데. 여긴 정반대로구나.’

이곳을 천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전혀.

내가 서늘해진 이유는, [이런 곳을 천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정말로 하나의 저승이 만들어지고 말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탑주.’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겠노라고.

가히 저주에 가까운 일념이, 내게는 느껴진 것이다.

도대체 나머지 일곱 층에는 어떤 천국들이 건설된 걸까.

‘……아니야. 집중하자.’

나는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었다.

‘지금은 우선 백작의 합격 도장을 받는 게 중요해. 그래. 그게 당면 과제다.’

기분을 환기했다.

백작이 내세운 조건은 아르바이트라도 괜찮으니 돈을 벌어보라는 것.

직업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겠지.

“거기, 자네……."

내가 일감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좌판 상인들 속에서 정말로 좌판만 딱 펼쳐놓은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러를 품은 전음(傳音)이었고, 누구에게 말했는지 착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내 귀에 파고든 목소리였다.

“예?”

“행색을 보아하니 자네 [도전자]로구만? 내 말이 맞지? 눈동자가 똘망똘망한 게 딱 봐도 전생을 잊어버린 영혼이 아니야……."

그 사람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후드의 남자는 다소 헐떡이는 숨소리로 말했다.

“어떤가. 나도 자네와 똑같은 도전자라네. 이 빌어먹을 세상에 자네보다 300년 일찍 떨어져버린 선배의 조언을, 푼돈에 사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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