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 만월항해(滿月航海)편. (6) >
6.
혹시 도를 아느냐는 내 질문에 고양이들이 보인 반응은 간단했다. 상신(商神)인 고양이들은 벌벌 떨면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넙쭉 엎드렸다.
“항복하겠습니다냐!”
실로 도리를 아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저희가 완전히 몰락해버리면 거리에 나앉을 중생이 한둘이 아니옵니다! 저희 혼자서 살자고 발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에 거주하는 신도들과 이 세계의 신민(神民)들을 위함이오니 부디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스물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일제히 석고대죄하였다.
색깔이 다양한 고양이들이 나란히 머리를 조아린 모습에는 뭐랄까, 심금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심금만으로 살아가기엔 내 심장이 너무도 더티해졌단 말이지.
“저 말이 정말이냐, 실뱀아?”
[‘미궁에 거하는 눈’은 저들의 속마음을 한 줄로 요약하여 폭로합니다.]
실뱀이 끼에엑 울자 눈앞에 문자들이 떠올랐다.
+
심리 상태: ‘신도고 신민이고 우리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알 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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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어.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당신들도 참 일관성 있게 치졸하네요….”
“냐아! 어째서 뱀새끼가 일개 인간한테 복종하는 겁니까?! 저것 때문에 사기를 칠 수도 흥정을 걸 수도 없지 않슴까! 이건 말도 안 되는 횡포…… 있어서는 안 되는 갑질임다!”
고양이들이 분개했다. 아무래도 사기를 본업으로 삼은 성좌인 만큼 히시미트 크리츠가 상극인 모양이었다. 졸지에 뱀새끼란 욕을 듣게 된 히시미트 크리츠는 빡쳤는지, 끼에에엑! 하고 머리를 들어 울부짖었다.
고양이들이 놀라 펄떡펄떡 뛰었다.
“야옹!?”
“무, 무섭다!”
“공포스럽습니다…!”
“아아, 저 무시무시한 초록색을 보십쇼! 도저히 이 우주에서 용납되어도 좋을 색깔과 곡선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삼라만상을 욕보이는, 참으로 모욕적이고도 모독적인 생물체임다…!!”
“끼에에엑!”
“냐아아아?! 살려주십쇼! 살려주십쇼!”
“초록색 외계생명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헬프! 헬프-!”
이거 개판이군.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양이판인가….
고양이판은 너무 기니까 짧게 줄여서 냥냥판이라고 해야겠다. 뭐야, 귀엽잖아?
『내 친구가 또 이상한 생각에 빠진 것 같구만. 협상을 진행하세.』
백작이 시기적절하게 개입했다. 당연하지만 백작도 홀로그램 너머에서 지금 광경을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본인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 항복이네만, 딱히 이걸 가지고 자네들한테서 정도 이상으로 삥을 뜯을 생각은 없네. 아무튼 간에 저기도 일종의 천국이고, 자네들은 천국의 관리자 아닌가? 그 지위를 보전해줌이 옳을 것이야.』
“냐아. 하, 하옵시면……? 적절한 금전 배상이나 주기적인 조공품을 원하는 것임까…?”
『아니 본인이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자네들의 처절한 굴욕뿐일세.』
백작은 자기가 어떤 인품을 소유했길래 탑 제일의 거부가 된 것인지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것을 짧게 줄여서 인성질이라 했다.
“고, 고객님……?”
『금천세계의 경제 구조를 망가트릴 생각일랑 추호도 없네. 다른 세계들을 망칠 생각도 전무하지. 명색이 천국의 관리자께서 우리 탑만 편애해서야 되겠는가? 본인은 말일세, 다시 한 번 말하네만, 그냥 자네들이 엿이나 좀 먹으면 좋겠군.』
“히익…!"
백작의 인성질에 고양이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저 성격을 배양한 장본인이 고양이들일 테니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냥냥펀치. 전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베스트 쓰리 안에 들잖아?
『본인이 오라고 할 때 오게. 와서, 본인이 재롱을 떨라면 코앞에서 재롱을 떨고, 갑자칩 봉지를 대신 뜯어보라 명령하면 대신 뜯게. 물론 자네들은 나한테 어떠한 거짓말도 할 수 없으며 언제나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할 것일세. 어디 그뿐인가? 냥냥 울어보라면 냥냥 울 것이요, 본인이 울음소리에 질려서 이번엔 왈왈 짖어보라면 기꺼이 왈왈 짖게나.』
고양이들은 전율했다.
“이 무슨 천인공노할 요구란 말이냐…!”
“팽이척추를 갖고 태어난 고양이로서 왈왈 소리를 입에 담는 건 수치 중의 수치다!”
“그렇슴다! 강아지 놈들은 허리도 안 늘어나는 하등생물임다! 엄연히 삼강의 도리가 있고 오륜의 법도가 있거늘 강아지의 말을 쓸 순 없슴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사기를 치는 성좌이자 상대방을 속여먹었을 때의 쾌감을 곧 포만감으로 삼는 존재요 추가적으로 강아지를 괄시하는 종족차별주의 고양이란 건데, 이쯤 되면 얘들을 고양이라고 부르는 것이 혹여 우리 세계의 고양이들한테 실례되는 짓 아닌지 염려스럽군.
백작은 조용히 고양이들의 항의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딱 두 마디를 던져서 모든 논란을 종결시켰다.
『싫은가? 싫으면 그냥 사왕이 자네들의 모든 비밀을 폭로하도록 내버려두지.』
“이제부터 저희는 고객님의 영원한 멍멍이임다.”
스물네 마리의 고양이가 홀로그램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사실 오래 전부터 저희는 강아지들의 법도를 흠모하여 꼭 한번은 냐옹이 아니라 멍멍을 입에 담고 싶었사옵니다.”
“왈왈! 이쪽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고객님께서 자비롭게도 저희에게 멍멍의 도리와 왈왈의 교리를 하사하셨으니 이제야 겨우 오랑캐의 풍습에서 벗어나 대도에 몸을 맡긴 듯하여 감격스럽다. 머엉!”
과연….
정확히 뭐가 과연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을 표현하는 데 과연보다 적합한 낱말이 없는 거 같다….
[‘금화를 문 고양이’가 항복합니다.]
이후로도 백작과 상신 사이에 잡다한 신경전이 오갔다. 나는 거기까지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다.
항복문서에서 자질구레한 조항들을 오해의 여지없이 다듬는 과정인데 뭐, 아무렴 백작이 알아서 잘 하겠지.
내게 중요한 건 그다음 일이었다. 꼬박 세 시간이 넘도록 논의가 이어진 끝에 마침내 완벽한 항복문서가 만들어졌으며, 백작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쪽을 쳐다봤다.
『고생했네. 사왕.』
“뭘요.”
참고로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백작과 달리 고양이들은 기진맥진해져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악마다. 악마가 있었다냐….”
“우리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 레벨을 재고해봐야 될지도 모르겠슴다….”
얼마나 탈탈 털어먹었기에 저럴까.
새삼 백작이 아군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백작이 적군이면 성기사도 적군이 될 테고, 탑의 경제 조직은 물론이고 치안 조직까지 덩달아 칼끝을 돌린다.
게임 오버다. 구체적인 암살계획 및 그것을 실행할 자본력은 덤이다. 정말 흉악하다, 흉악해.
『자네 덕분에 내 평생 이루리라 생각지도 못한 염원을 풀었네. 친구 둬서 뭐에 좋냐는 말이 있던데 나는 확실히 친구 덕분에 호사를 누리는구먼.』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 즐거운 시간에도 끝을 고해야겠군.』
백작은 부채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돌아오게나. 사왕.』
머릿속에서 메세지가 울렸다.
[당신의 심판자로 선택된 이가 합격을 내립니다!]
[당신은 심판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언제든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입안으로 조용히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했고, 그에 따라 노란 색깔의 빛이 내 주위를 휘감았다.
[‘금화를 문 고양이’가 당신에게 항복했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클리어!]
[70층으로 전송됩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어서 오게.”
눈을 뜨자, 나를 맞이한 것은 여전히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백작이었다. 백작은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말은 꼭 얼굴을 직접 보고 해주고 싶었지 뭔가. 김공자. 클리어를 축하하네.”
우리는 72층을 돌파한 것이다.
7.
스테이지가 완료됐다고 해서 백작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떠나게 되면 그동안의 기억이 삭제된다는 걸 알아서일까? [태고의 지팡이], 즉 기둥과 관련된 기억은 모조리 왜곡되어야 한다는 탑의 율법 말이다. 그래서인지 백작은 느긋하게 뻐팅겼다.
“안 그래도 상련의 일 때문에 본인은 24시간 내내 업무 모드라네. 휴식 따윈 없지.”
백작이 말했다.
“솔직히 여기 있으면 공짜로 휴가를 보내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바빌론과는 시간의 흐름마저 다르다니까 그야말로 최고의 휴가지라네.”
“여기서 쉬어봤자 어차피 기억이 삭제돼서 도로아미타불일 텐데요?”
“삭제되기 전에 더 열심히 놀아야겠구먼.”
백작은 진심인 것 같았다. 뭐, 어차피 나도 급할 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잡담도 떨면서 백작이랑 더 친해지면 나야 좋지.
“……예?"
그리고 우리는 대화하면서 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트리시아가 암살계획을 세워둔 걸 알고 있었어요!?”
“물론일세.”
백작은 뭐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말했다.
“파트리시아와 나는 서로 간에 숨기는 게 없어. 불필요한 말까지 떠벌리진 않네만, 자의적으로 불필요와 필요의 경계선을 뭉개뜨리는 법은 결코 없지. 둘 다 그럴 만한 지성은 가졌고, 그래야 할 약속도 세웠네. 가장 중요한 건 약속을 지킬 의지이지. 본인은 파트리시아의 의지를 믿는다네.”
백작의 표정에선 정말 한점 의심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어어……. 이런 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파트리시아는 아마 니샤를 암살하는 계획도, 뭐, 당연히 계획에 불과하겠지만, 만들어뒀을 텐데요?”
“그야 당연하네. 5대 길드장을 대신해서 파트리시아가 탑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상련을 쳐야겠지. 그리고 상련을 차지하려면 나부터 떨궈야 할 거고 말일세.”
“세상에.”
내가 어버버거리자 백작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나의 반응이 재밌나 보다.
“벌써 몇 년은 된 얘기군. 본인이 파트리시아한테 먼저 말했다네. 혹시라도 독재자가 될 각오가 선다면, 다른 사람들을 쳐죽이기 전에 내 목부터 가지라고.”
"......."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무슨 수로 피의 숙청을 감행할 것인가? 대가를 치러야지. 일종의 제약이었다네. 솔직히 내가 채워둔 족쇄가 아니었다면 파트리시아는 폭발해도 진즉에 폭발하고도 남았어. 파트리시아는 생각이 많아서 얼핏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일단 한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직진하는 사람일세.”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침묵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성기사도 모르고 백작도 모르는 일. 과거조차 아니며 단지 시간의 윤회 속에 파묻힌 비밀.
그것을, 나 혼자만은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백작이 가장 먼저 죽었어.’
바로 12층에서 벌어졌던 비극.
‘제일 먼저 12층에 올랐을 때 성기사는 [가을비의 마왕]이 건넨 선택지를 받아들였다. 마왕과 내통했어. 그리고 우리는, 5대 길드장들은, 차례차례 마왕한테 사냥당했지….’
마왕이 검을 휘두르면 붉은 광선이 모든 걸 불태웠다. 그 검이 최초로 파괴한 것은 아이김 제국 황궁의 알현실이었으며, 알현실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백작이었다.
성기사는, 파트리시아는 백작을 가장 먼저 죽인 것이다.
약속대로.
“음? 표정이 이상하구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다.
지금 이 시간선에서는 생기지 않은 일에 불과하다.
[가을비의 마왕]은 아귀가 되었다. 나는 성기사를 파트리시아라고 부른다. 백작도 니샤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나를 김공자라 부른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다만…….'
다만 예전엔 그저 우연히 벌어졌다고 생각한 것들, 많은 일들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해됐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이, 뭐라고 할까.
‘이상한 감정이야.’
새삼스럽게도 깨닫는다. 결국 우연이란 내가 모르는 필연들에 임시로 붙여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어쩌면 수많은 우연들을 하나씩, 한입씩, 한모금씩, 필연들로 바꿔나가는 것일지 몰랐다.
분명히 그럴 테지. 나는 그것이 한 명 한 명의 타인을 나 자신으로 만들어가는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응. 환담을 즐기는 중에 미안하지만."
우리 옆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긴 휴가철 리조트가 아니란다.”
은빛 칼날을 눈동자에 숨겨둔 기둥.
[태고의 지팡이]가 길다란 지팡이를 든 채 우리를 지켜봤다.
“사왕. 이제 73층에 오를 차례야.”
그래.
또 다른 천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