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62화 (362/400)

362화.  < 비명을 모으는 하늘. (4) >

“마지막 파도?”

“응.”

“마지막 파도가 무슨 뜻이야?”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였다. 현대인의 눈이 아니라 짐승의 눈에 더 가까웠다. 사람과 짐승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눈이었고, 인간과 바다를 전혀 구분하지 않는 눈이었다.

내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모든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

“두 번째 파도부터 오백여든한 번째 파도까지 전부. 너희가 하는 소리가 내게는 들려.”

그것은 ‘너가 거느린 전사들의 언어들을 내가 전부 해석할 수 있다’라는 말이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소리로 말하였다. 말하고 싶었다.

아주 오래 전에 멸망해버려서, 폐허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해일에 쓸려버린 어느 마을 같은, 족적이 없는 발음들과 흔적이 없는 단어들로. 나는 멸망을 추억하며 이제 세상에 단 두 명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마을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돼. 큰마을로 가지 않아도 돼. 나는 너희의 마지막 파도고, 여기는 세상의 마지막 마을이야."

"......."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엔 잔물결마저 없었다. 의혹, 의심, 당혹, 당황,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감정이 눈동자에 지문으로 찍혀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지문은 없었다.

“너는 신님이야?”

“너희의 신이 되고 싶어.”

조금 떨어진 옆에서, 태고의 지팡이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의 눈동자를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너의 소원을 말해줘.”

“소원?”

“응. 너는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어떤 마을로 가고 싶어? 여긴 아주 큰마을이야. 모든 마을이 전부 이곳에 있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가줄게.”

"......."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고운 해변에 몰려와서 다시 물러가는 파도처럼 그녀의 눈꺼풀이 오갔다.

"소리를 가두는 주술을 알려줘.”

"응."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잉크를 가져다주시겠어요?”

"......."

태고의 지팡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주술에 정통하여, 탑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눈썹이 바들 떨고 있었다. 그런 마법사를 대신해서 잉크병을 가져다준 사람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였다.

“여기.”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잉크야? 사왕.”

공녀는 주의 깊게 나의 얼굴을 올려봤다.

“종이랑 펜을 가져다주면 더 편하지 않을까?”

“펜이 낯설 테니까요. 한번도 연필 같은 걸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은, 글씨를 쓰기 어려워 해요. 하지만 맨손으로 쓰면 빠르게 익숙해지겠지요. 그러니까 손끝에 잉크를 묻혀 그냥 땅바닥에 쓰는 게 편해요.”

공녀는 내 말을 다 들었다. 천천히, 다 듣고 나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게. 맞아.”

다시 한 번 더.

“그렇겠다.”

작게 목소리가 울렸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2표, 기권 0표, 태고의 지팡이 3표, 입니다.]

나는 어디선가 파도의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다.

“이건 뭐야?”

“잉크. 검은 물이야.”

“아파?”

“아프지 않아. 이걸로 주술을 알려줄게.”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도 몸을 수그렸다. 기둥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하얀 돌바닥을 우리 둘만의 도화지로 삼았다.

ㅏ, ㅓ, ㅔ, ㅜ, ㅡ, ㅣ.

“이러면 소리를 가둘 수 있어.”

나는 바닥에 글씨를 썼다. 손끝이 새까매졌다. 바닥에도 까만 획이 그어졌다. 하얀 바다에 검은 물결이 그려지는 광경을, 그녀는 또렷이 내려보고 있었다.

“너도 해봐.”

“응.”

그녀의 손끝이 까매졌다.

반나절이 흘렀다.

한나절이 흘렀다.

하루가 흘렀다.

그녀는 손톱이 까매지고 손가락이 까매지고 손바닥이 까매졌다. 바닥에 획들이 그어지고 그어져서, 하얀 바다에는 끝없이 검은 물결이 쳤다. 기둥들은 미동하지 않은 채 우리를 지켜보았다.

대회의장은 넓었다. 도화지는 거의 무한했다. 우리는 수그려 앉은 자세로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바꿔가며, 검은색 파도를 한뼘씩 넓혀갔다.

그녀가 그린 바다에 물결마다 지문이 도드라쳤다.

사흘이 흘렀다. 어쩌면 나흘이. 시간이 무의미한 지하의 심처에서, 단지 주변으로 불어난 바다 자국만이 우리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잘 보면 ㅏ, ㅓ, ㅔ, ㅜ, ㅡ, ㅣ 는 모두 나무 판때기였다. 난파한 뱃조각들이 바다에 쓸려 이리저리 일렁였다. 그녀는 글자를 쓰고 있었다. 첨벙. 그녀는 새까만 바다의 물길을 아는 배몰이꾼이어서 첨벙, 첨벙, 자기 손가락으로 노를 저었다.

“이제 알아?”

“응.”

그래서 나는 파도의 소리를 듣고 있다.

“알아.”

나는 공녀에게 부탁해서 점토판을 구했다. 아직 굳지 않아 표면이 말랑말랑거렸다.

"......."

자신의 앞에 놓인 점토판을 보고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그녀의 긴장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어디론가’였다. 고향이 바다에 잠기고 많은 마을들이 바다에 잠겨서, 그녀가 찾으러 간 섬이었다.

작은 섬을 눈앞에 두고.

그녀는 노를 저었다.

『나는 바다를 사랑해.』

파도가 쳤다.

『우리는 바다를 사랑해.』

물결이 쳤다.

『파도가 눈물을 흘려서.』

지문이.

『우리도 눈물을 흘렸어.』

서서히.

『그래도 나는 바다를 사랑해.』

파란 눈이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죽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가 이제 섬마을에 도착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응. 살고 싶어?”

“사람을.”

그녀는 말했다.

“사람을 많이 죽였어.”

“더 살 수 없어. 사람이 많이 죽었어. 미안해. 더 살 수는 없어.”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닮은 눈동자에서 물결이 쳤다.

“고마워.”

어디선가 파도의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다.

“고마워.”

[당신은 신도를 구합니다.]

[첫 번째 파도가 당신의 신도가 됩니다.]

그리고.

파도는 가라앉았다.

"......."

바닥에는 검은 글씨밖에 남지 않았다. 난파한 뱃조각들 사이로 첫 번째 파도는 잦아들었다. 그녀가 떠난 고향이 그랬던 것처럼 바다에 빠진 사람은 침몰해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바다에서 숨을 멈출 수 있었다.

"......."

기둥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다만 한참이 지나서야, 어쩌면 아주 잠깐이 지나서야, 태고의 지팡이는 입술을 열어 짓이겨진 이빨 사이로 목소리를 내었다.

“어째서, 천국층에 배정해주지 않은 거야.”

“저는 배정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고 싶은지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천국은 가고 싶은 곳이에요. 파도는 가고 싶은 섬으로 갔어요.”

나는 양손으로 점토판을 들었다.

누군가의 작은 섬이 된 그곳을, 나는 꾹 품에 안았다.

그리고 오러로 감쌌다. 내 물이 흘러넘쳐 섬마을의 고운 해변이 젖어버리기 전에.

사람이 사람을 태우지 않기를.

만일 내가 불길이라면 오직 사람의 소리를 굽기 위한 불이길.

“그러니까, 된 거예요.”

"......."

태고의 지팡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2표, 기권 1표, 태고의 지팡이 2표, 입니다.]

아직 노이즈는 많았다.

수백.

마법사가 불러들인 노이즈들은 드넓은 대회의장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소음으로 머무르는 그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몸을 내주었다.

노이즈들은 내 목숨을 물어뜯었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2표, 기권 2표, 태고의 지팡이 1표, 입니다.]

그들은 나의 목숨을 물어뜯었고, 나는 그들의 목숨을 베어서, 첫 번째 파도에게 그러했듯 그들의 목숨을 이곳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얘기했다.

“여, 여기는 어디요?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오?”

누군가는 당황했다.

평생 모피를 팔며 살아온 상인이었다.

교역길을 나서다가 유목부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상인은 억울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자기 목숨을 취해 봤자 유목부족에겐 별 도움이 안 되었다. 하지만 멍청한 놈들은 이런 간단한 이치마저 몰랐다.

왜 돈이 아니라 칼인가. 왜, 자신과 거래하지 않는가.

왜 세상은 이리도 무도한가.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누군가는 경계했다.

일생 전쟁터를 전전한 성기사였다.

마지막까지 신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죽었다. 기사는 절규했다. 만약 세상에 신이 있다면 가장 참혹하고 불행한 곳에서 강림할 것이다. 가장 참혹하고 불행한 전쟁터만을 기사는 전전했다. 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더 참혹한 곳으로, 그래도 나타나지 않아 더 참혹한 곳으로, 언젠가 나타나리라 믿으며 지옥의 지옥으로.

아직도 부족한가. 아직도 신이 손길을 내뻗기엔 덜 참혹하단 말인가.

왜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죽기, 싫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전, 아직 죽을 수 없어요!”

누군가는 애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가뭄이 일어나 굶주려 죽은 사람이 그랬고 불이 타올라 숨이 막혀버린 사람이 그랬고 흉년이 든 다음해에 흉년이 들어 마을사람들 간에 아이를 뒤바꿔 인육을 먹게 되어 그날 마을을 불살랐다가 마을사람의 도끼에 찍힌 사람이 그랬고 눈앞이 가려져 다시 눈을 떠보니 이웃집의 어른이 자신을 내려다봐 돌연 목이 졸린 사람이 그랬다.

왜,

하고 사람들은 소리를 죽였다.

왜 세상은 이다지도.

“괜찮아요.”

나는 가고 싶은 섬이 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버리고 싶으면 버려도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은 것이었다.

“당신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물었다. 그들에게, 직접.

“어디에 가고 싶으신가요?”

상인은 금천(金天)으로 가고 싶었다. 황금빛으로 자명한 세상에서 숨을 쉬기를 원했다. 어리석은 칼날 아래서 합리가 숨을 죽이는 삶을 상인은 원치 않았다.

기사는 음천(音天)으로 가고 싶었다. 한 아름의 밀알에서 한 떨기의 나뭇잎까지 모든 것이 노래한다면 모든 것에 신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찾지 않아도 신이 있는 세상에서 웃고 싶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3표, 기권 1표, 태고의 지팡이 1표, 입니다.]

마지막 절차로.

[스킬을 발동합니다.]

나는 나의 황금을 그들과 나누었다.

+

[지골룡의 두개골]

랭크: SSS+

효과: 살아있는 자의 기억을 보관합니다. 보관된 기억은 ‘상자’에 담깁니다. 이 상자는 오직 해당 스킬을 소유한 자에게만 파괴될 수 있습니다.

상자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당신은 똑같은 기억을 계승하는 인물의 육체를 몇 번이고 생산할 수 있습니다. 육체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기억을 쌓고, 이 경험을 다시 상자에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허락한다면 말입니다!

인물의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상자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사의 특권을 베푸십시오.

+

그것은 내가 백귀들을 되살린 방법.

실비아 에비나일과 에스델, 사마군, 마천의 아이들, 유수하에게 숨결을 불어주었을 때처럼.

[지골룡의 상자가 발동합니다.]

[지골룡의 상자가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백귀들이 된 노이즈들에게 육신을 마련해주었다.

“당신들은 이제 살아갈 세상을 선택했어요.”

회귀자의 태엽시계.

나는 그들의 트라우마를 살아 그들의 기억을 거두었다.

백귀환생.

나는 그들의 기억을 거두어 그들을 불러들였다.

지골룡의 두개골.

나는 그들이 바라면 기억을 내어주고 몸을 주었다.

“당신들이 살아가길 원해서 세상을 살게 된 거예요.”

대회의장은 조용했다.

더는 그르렁거리는 소음이 없었다.

수백 명의 시선, 수백 명의 숨소리가 나를 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나 역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좋아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주세요.”

"......."

“버리고 싶어지면 말씀해주세요. 듣겠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말해주세요. 듣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이 선택한 모든 것, 모든 말, 모든 경멸과 모든 사랑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삶을 가져주시고. 자신이 좋아한 것에 책임을 져주세요.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죽음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여러분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하얀 빛이 그들을 감쌌다.

모두가 각자 가고 싶은 섬으로 떠난 것이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4표, 기권 1표, 태고의 지팡이 0표, 입니다.]

대회의장은 적막해졌다.

"......."

태고의 지팡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숙여진 머리를 들지 않았다. 기둥들은 그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주인되는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뚜벅.

탑주는 일어서서 내게 걸어왔다.

“김공자 씨.”

탑주는 내 왼손을 잡아서 손등을 쓰다듬었다.

“사왕."

“예."

“당신은 권능을 얻게 될 거예요. 가호를 내릴 수 있게 될 거예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완전한 성좌가 될 것이에요.”

보랏빛 눈동자는 나를 올려보았다.

“이 순간부터 당신은 다만 [비명을 모으는 하늘]로 불릴 거예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수결 투표 현황을 공지합니다.]

[사왕 5표, 기권 0표, 태고의 지팡이 0표, 입니다.]

[‘만생의 주인’은 ‘비명을 모으는 하늘’에게 축복을 빕니다.]

이제부터 그것이 나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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