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 1층. (3) >
4.
그리하여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후방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에 든든해진 저는,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얘기하고 싶다만.
아직 1층 언저리에서 할 일이 남았다.
“어딜 가니? 그동안 미루고 미뤄온 인터뷰들만 수백수천 개야. 안 그래도 슬슬 언론사 눈치가 보여서 부담스러웠는데 잘 됐어. 이 참에 해결해버리자.”
아나스타샤의 눈빛을 보니까, 할 일이 좀 많이 남은 거 같았다.
“그리고 이것도 있어. 김공자. 우리쪽 헌터랑 지정족 사이에 최초로 결혼이 이뤄질 거란다.”
“뭐라!?”
“응, 나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딱 그런 표정이었지.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싶지만 아무튼 간에 축하할 일이잖아? 아직 결혼식은 안 올렸어. 당신은 지정족들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신이니까 가서 축하해주렴. ……아니, 잠깐만! 기다려! 일단 인터뷰가 먼저야! 야! 김공자! 이 팔불출 새끼야!”
바로 달려가서 축하해줬다.
지정족은 독특한 결혼 문화를 가지고 있다. 부부가 각자의 집에서 아궁이를 뒤지고,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씨를 등잔으로 옮긴다. 그리고 결혼식에선 서로 가져온 불꽃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하객들도 텅 빈 등잔을 가져와 결혼식에 참석한다. 부부의 불이 하나로 합쳐지면, 하객들은 축하 인사를 건네며 등잔에 불을 옮겨 받는다.
하객들은 이렇게 심은 불씨를 지니고 돌아가서 각자의 아궁이에 놓는다. [부부가 탄생했음을 하객들 모두가 보증]하는 거다. 아궁이가 없는 집안에선 하다못해 모닥불에라도 지핀다.
불을 숭배하며 집단을 숭앙하는 지정족답게 꽤나 멋진 결혼식이지만…… 당연히 문제가 있다.
“저, 저희 집엔 아궁이가 없는데 어떡하죠!? 사왕님!”
커플 가운데 헌터 쪽이 울상을 지었다.
그렇다.
현대문명, 아니 미래문명의 첨담을 누리고 있는 우리 시민들은 당연하게도 아궁이 따윈 키우지 않았다.
“우거. 나는 그런 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아아, 마이 러브! 하지만 난 마이 러브의 관습에도 흥미가 있는걸! 분명히 서로 이마를 맞대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나의 사랑……! 너의 마음은 새벽 어스름에 갓 피어난 이슬꽃보다 섬세하다!”
음.
하긴.
서로 이 정도는 사랑해야 종족 사이에서 최초의 결혼을 찍는 커플이 되겠지. 응, 그래….
“어허. 좋은 때로구나.”
나는 위장에서 단물이 꾸역꾸역 용솟음쳐서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걸 느꼈으나, 애써 미소를 지었다.
“헛! 위대한 케케륵케르 앞에서 못 보여줄 걸 보여주고 말았다, 우고르! 해량해라!”
“괜찮다. 눈치없이 커플집에 놀러온 내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
“맞다. 그래서 해량하라고 말한 거다.”
“……이렇게 하자꾸나.”
우부르카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은 참 신을 대하는 뽄새가 구려.
“아무래도 최초의 결혼이다 보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단다. 거대길드에선 아예 작정하고 이걸 종족 간의 화합으로 선전해 볼 작정이더구나. 하지만 그래서야 너희가 부담스럽지 않겠냐?”
“우거? 그런가?”
지정족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헌터는 조심조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것도 서로 문화가 다른 탓이겠지.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내가 달려오길 잘했다.
“기자들이 결혼식장까지 와서 설치는 건 내가 어떻게든 막아주마. 불길의 신성한 결합에 웬 잡상인들이 끼어서야 되겠느냐.”
나는 지정족한테 말하는 척하면서 우선 헌터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 참에 광장 한복판에다 성화(聖火)를 마련해두겠다.”
“우고르, 성화라면……?”
“내가 직접 오러를 써서 불씨를 준비하는 것이다. 광장엔 올림픽 성화 봉송대 같은 장치를 만들어서 내 불길이 계속해서 타오르도록 한다.”
나는 시선을 돌려 헌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불씨를 옮겨 받아다가 결혼식에 들고 가면 될 거예요. 지정족 입장에선 신의 불을 가져오는 거나 다름없으니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물론 지정족의 결혼 문화를 존중해줄 건지 말 건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합의에 달렸지만요.”
“앗, 저기……. 배,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헌터는 약간 과할 정도로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야 어차피 언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서 적극적으로 뛰어든 거지만, 저 사람이 볼 때는 서열 1위가 나서준 셈이다.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 언론을 막아주고 바빌론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광장 한가운데에 뭔가를 설치한다니까. 그야 어마어마하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라비엘이랑 결혼했을 때가 떠오르네….’
그때도 제국 전역에서 내로라 하는 귀족들이 식장에 몰려왔지.
라비엘에 비해 나는 신분과 계급이 떨어져서, 황실의 시종장한테 양아들로 입양될 필요까지 있었다.
지금도 제국에서 공적인 사무를 보려면 [사자세계의 서열 1위 헌터'보다 [이반시아 공작가의 부인]이란 직함으로 활동하는 게 편하다. 어디 나만 그럴까? 흑룡주나 이단심문관도 저마다 이름뿐인 귀족위를 하나씩 갖고 있다.
세계의 차이란 거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예요.”
라비엘이 권력을 써서 황실의 시종장까지 불러다가 입양 절차를 밟게 해준 것을, 라비엘의 배려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나의 부담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결국 내 선택이었다.
난 눈앞에 있는 커플을 응원한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종족의 차이마저 부정한 두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현명하게 앞날을 헤쳐나갈 거다.
“언론을 최대한 잠재우고 지정족 입장에서 볼 때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예법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만. 자기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아, 저기……. 그… 언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뭐. 간단합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종족 간 결혼보다 훨씬 더 큰 떡밥을 물려주면 그만이거든요."
5.
「충격! 새로운 종족과 조우하다!」
결혼식 바로 하루 전부터 언론이 불타올랐다.
「5층 지하에서 지성체가 도시를 이루어 살고 있다는 것이 증명돼!」
「지금까지 평범한 사냥터로 여겨졌던 5층의 지하에 화려한 도시가 숨겨져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 지하도시의 지성체들은 어떤 존재인가!」
「도시괴담은 진실이었다?」
「본래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이 등잔 밑은 매우 강하다!」
「흑룡주, 소식을 듣고 ‘충격적이지만 환영의 뜻을 밝힌다’라고 입장을 표명…….」
좀 많이 불타올랐다.
“죽어! 제발 좀 죽어, 이 나쁜 또라이야!”
그 증거로 현재, 아나스타샤가 실시간으로 숙소에 쳐들어와서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가후부으으으읍?!”
“내가 미쳐! 진짜 나 과로사로 쓰러져 죽는 꼬라지 보고 싶어!? 안 그래도 지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에베레스트인데 여기다가 이 따위 초대형 사건을 얹혀야 마음이 풀리니!?”
꽈악꽉흔들흔드르-
아나스타샤는 내 목을 쥔 채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손아귀엔 거무튀튀한 오러가 실려 있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아나스타샤도 어디 가서 절대 오러로 꿇리지 않는 헌터였다.
“저어, 죽어요……. 숨이, 푸헉, 진짜… 죽어……."
“그래. 죽어. 죽어버리렴. 어차피 당신은 죽어봤자잖아. 아예 죽어서 어제로 돌아간 다음 이 난리를 일어나지 않게 당장 조처해!”
“헬프......... 헬프 미.......”
결국 정말로 황천길 떠나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아나스타샤는 나를 풀어주었다. 세상 떠나라 한숨을 푹푹 쉬어대면서 말이다.
“하아아…. 그래. 어디 변명은 들어볼게. 아니, 애당초 어떻게 지하문명이 5층에 있다는 걸 알았니?”
나는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후으으. 그게, 62층에서 무티아라는 성좌를 만났어요.”
“무티아?”
“예. 정식 이명은 [폐허를 추수하는 소]인데. 얘가 사람을 회귀시키는 권능을 가졌거든요.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 성좌가 대충 파악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흑룡주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뭐야. ……사기잖아?”
“넵. 사기캐 수고요. 어쨌든 그 사기캐가 저랑 싸우면서 이런저런 수작을 벌이더라고요.”
만약 염제가 [회귀자의 태엽시계]를 얻지 못했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성립되는 세계선.
거기서 나는 염제한테 인생을 빼앗기지 않고 스스로 앞날을 개척했더란다. 2층에서 9층 사이를 뺀질나게 돌아다니면서 결국, 우연과 행운의 합종연횡으로 5층의 땅속에 숨겨진 도시를 발견한 것이다.
“무티아가 제 가능성들을 보여준 덕택에 부산물로 5층의 지하문명을 알게 됐습니다. 기왕 알게 된 건데 써먹어야죠.”
“……사정은 알겠지만. 터트리더라도 좀 나중에 터트렸어야지. 이러다간 우리 아이들이 업무를 소화하지 못해서 뻗어버려.”
“음. 사실 그걸 노린 거기도 해요.”
“하아?”
아나스타샤는 그게 뭔 헛소리냐는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길드의 수장격인 우리들은 이제 완전히 서로 신뢰해요. 하지만 우리 아래에 있는 길드원들은 또 사정이 다르잖아요. 여태껏 수 년이 넘도록 죽어라 싸워왔는데 갑자기 하하호호 협력할까요?”
“……그건.”
“예. 지금 당장이야 길드장인 우리들 눈치를 봐서라도 싸움을 자제하겠죠. 하지만 이런 건 감정의 문제입니다.”
최고 서열의 헌터들은 수없이 스테이지들에서 뒹군 끝에 협력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평범한 길드원들은 다르다. 그들은 12층 이후로 스테이지 공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함께 고난을 나눈 경험]이 그들에겐 없다.
“아나스타샤의 말이 맞아요. 바쁘죠. 안 그래도 바쁜데 5층에서 지하문명이랑 만나게 됐어요. 이제 어느 길드든 혼자서는 업무를 처리하기가 불가능해졌어요.”
그러니까 일부러 경험을 만들어준다.
“일에 치여 죽기 싫어서라도 길드들은 협력해야 합니다. 모든 길드가 전력을 다해 협조해야만 이 지옥 같은 업무들이 해결될 테니까요.
“세상에……."
“과거의 불화? 해묵은 감정? 다 좋죠. 그런데 당장 눈앞에 9달짜리 야근을 해야 끝이 보일까 말까 한 업무가 떨어져보십쇼. 길드원들이라고 잠을 자기 싫고 집에 돌아가기 싫겠어요? 무조건 협력하게 돼요.”
“당신, 진짜 악마구나……."
아나스타샤는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나는 뭐, 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컨대 향후 몇 달 동안은, 모든 거대길드들이 임시로나마 [하나의 회사]처럼 돌아가는 거예요.”
“다 좋은데 우리 아이들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라고?”
“알기 쉬운 스트레스 분풀이 대상이 있잖아요. 지하문명을 발견한 사람이 저라고 밝혀버리세요. 모든 길드원들이 일제히 저를 성토할 테고, 저 혼자 욕 먹는 걸로 끝날 겁니다.”
“욕받이 역할이니……."
“네. 어차피 그게 리더의 책임이기도 하고. 뭣보다 길드원들한테 콩고물을 떨어트려 주는 것도, 혼자서 스테이지들을 공략하고 있는 저의 역할 아닙니까?”
말하자면 거대길드의 길드원들에게 나는 애증의 대상이다.
나 때문에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으니 증오의 대상이요, 나 덕분에 수많은 스테이지에서 이익을 얻게 되었으니 또한 애정의 대상이다.
‘누군가 욕받이를 맡아야 한다면 내가 담당하는 편이 낫지.’
만일 일하기 싫다? 그럼 거대길드에서 탈퇴하면 그만이다. 수많은 이권을 포기한 채.
지금도 바깥에선 소처럼 일해도 상관없으니 제발 거대길드에서 채용만 해달라고 비는 헌터들이 수두룩하다.
11층 너머의 세계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 헌터는 사실상 거대길드 소속원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들에서 느끼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헌터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군소길드의 헌터들이 기회를 잡기란 제법 어렵다. [약제사]처럼 순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성공한 헌터도 있지만.
“욕먹는 만큼 오래 산다는 농담이 사실이라면, 김공자 넌 엄청 오래 살 거야……."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살게 생겼지만요.”
"응?"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돌려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5층 지하문명의 발견에 열광하는 기사들이 주르륵 떠 있었다.
여름철 홍수와 같은 기사들 가운데, 딱 두세 줄, 자그마한 기사가 하나 떠 있었다.
「바빌론인과 지정족 사이에 최초의 결혼이 이뤄지다!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결혼식. 이 소식에 시민들은 축복.......」
나는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