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71화 (371/400)

371화.  < 집구석. (1) >

1.

바빌론에 돌아온 지도 벌써 3달이 넘었다.

그 3달 동안 나는 라비엘과 놀았고, 지하문명의 도시와 새롭게 수교를 맺었으며, 라비엘과 놀랐고, 김황태가 고등학교에 전학했으며, 라비엘과 놀았고, 여러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참으로 알차게 보낸 시간이었다, 만.

100일이 흐른 시점에서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시 탑을 올라야겠어요.”

일순 침묵이 흘렀다.

현재 나는 소파에 누워서 잡지를 읽는 중이었다. 내 인터뷰가 실린 잡지. 「김공자가 생각하는 헌터란!?」 「헌터 업계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100문 100답!」따위의 유치짬뽕한 소제목이 찍혀 있었다. 이걸 누가 봐.

침묵이 흐르고서 뒤늦게 반응이 나왔다.

“? 왜 갑자기?”

흑룡주였다.

아나스타샤는 반대편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와 똑같은 잡지를 읽으면서. 참고로 아나스타샤는 이번 잡지의 표지 모델이기도 했다.

인류의 문명이 총동원되어서 ‘고귀함’이란 개념을 형상화시킨 듯한 잡지 표지였으나, 지금 이 순간 아나스타샤는----- 완전히 일요일 저녁 집안에 늘어져 있는 누나 모드.

도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고딩들이나 입을 법한 체육복을 걸친 채 질겅질겅 오징어 다리를 씹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도 적갈색 체육복이 있었습니까?’라거나, ‘우크라이나 사람도 오징어다리를 씹었어요?’ 라거나, 무지무지 딴죽을 걸고 싶어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나스타샤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자세도. 표정도. 심지어 오징어다리를 씹는 이빨의 우적우적거리는 소리마저도.

그야말로 코리안 백수 건달 Lv.99.

아나스타샤의 포즈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므로 나는 이 또한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기에 계속 있다간 몸이 썩을 거 같아요. 축난다고 할까요? 마음에 눅진눅진한 습기가 들이차서 머릿속에서 곰팡이가 피어버릴 거 같달까.”

내 말에 친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여긴 우리 숙소의 공용 거실.

저녁이 되어 퇴근하면 다들 별다른 약속이 없이도 삼삼오오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며, 그 결과, 백작도 독사도 이단심문관도 모두 똑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들어올려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었다.

“습기? 곰팡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먼. 라오판. 자네는 알아듣겠는가?”

“글쎄. 저놈이 흰소리를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닌데, 뭘.”

“앗, 실비아 양! 여기에 감자튀김 반접시만 더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친구들은 각각 노란색 체육복, 감색 체육복, 파란색 체육복을 입었다.

언제부터 Made in Korea 체육복이 이 공용 숙소의 드레스코드로 선정된 건지 모르겠는데.

어렷풋한 기억에 따르자면 분명, 내가 제일 먼저 검은색 체육복을 입은 채 숙소를 돌아다녔고, 그걸 본 아나스타샤가 ‘어라. 굉장히 편해보이네. 무슨 옷이니?’라고 물어봤으며, 정확히 그 다음날부터 참극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 같지만. 응. 이 기억은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묻어두자.

“바로 그거입니다! 그거요!”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이단심문관을 삿대질했다.

마침 실비아가 썩은 얼굴로 감자튀김을 배달해줬고, 이단심문관은 해맑은 표정으로 튀김꽁초를 집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은 입가에 캐첩이 묻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네?”

“[네?]가 아닙니다, [네?]가! 밤볼리나 당신! 지금 포테이토 프라이즈를 맨손으로 후르릅쩝쩝 먹고 있다고요! 체육복을 입고서! 입술에 캐첩까지 묻혀가면서!”

“아하핫. 주인님. 원래 감튀는 맨손으로 먹는 게 정석입니다. 설마 주인님은 손가락에 소금기가 묻는다는 이유로 포크를 쓴다든가 젓가락을 쓰는 사문난적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만!”

“그야 어느 쪽이냐면 젓가락 파이긴 한데……."

“세상에.”

“맙소사.”

“미친놈이신가?”

“정말 실망이야, 김공자……."

차례대로 이단심문관, 백작, 독사, 흑룡주가 나를 쓰레기 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성기사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거실을 지나갔다.

“참고로 나는 비닐장갑 파다.”

성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거실 너머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우리는 한동안 성기사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뒷산 약수터로 조김을 하러 떠날 것만 같은 뒷모습을.

“……아니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댁들! 썩었어요! 전체적으로 썩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뭐냐 좀 더 칼날 위에 디디고 있는 분위기였잖아요! 왜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추욱 늘어지게 된 겁니까!?”

“썩었다니. 실례되는 말을 하는구나, 얘.”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적어도 삼선 슬리퍼는 벗고 말씀하십쇼!!”

“에에에. 편한데, 이거.”

그렇다. 안락의자에 앉은 아나스타샤는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덜렁덜렁 신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친구들 전원이 똑같았다. 학교 체육복-삼선 슬리퍼라는, 오직 사우스 코리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패션 테러리스트들이 탑의 권력층을 점령해버렸다.

설마 이것도 내 영향인가? 어? 내가 편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한명두명 따라하기 시작한 거야? 신이시여. 이딴 식의 한류 열풍은 아무도 바란 적 없습니다.

“당신들이랑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내 머리까지 이상해질 거 같습니다! 애당초 일을 하세요, 일을! 지금 업무 미어 터져서 아랫사람들 죽어나가고 있을 텐데 뭐 여유를 부리고 있어요!?”

“그야 우린 아랫사람들이 아니잖니.”

“맞네. 우리는 일할 때만 일하고 나머진 다 부하들한테 맡기면 되는 것일세. 그러라고 걔들한테 월급을 주는 거 아니겠나?”

“가끔은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주인님!”

틀렸구만. 이 녀석들……. 이미 머릿속이 미토콘드리아나이트로백터테트라이지인플루엔스박테리아로 전염됐어. 꿈도 희망도 없군.

“됐어요. 저 탑 오를 겁니다.”

“진심이니?”

“예, 진짜예요. 진짜로 오를 거예요. 댁들이랑 같이 있다간 나까지 이상해질 거 같으니까! 이대로 여기서 더 짱박혀 있다간 스테이지 공략에 완전히 관심이 끊겨져서 백수 아저씨로 전락해버릴 거 같으니까, 오를 겁니다!”

친구들은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음. 뭐어…, 그러던지. 마음대로 하렴.”

“어차피 급한 일들은 전부 처리되었으니 자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나.”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흘러갈 겁니다!”

“와 씨 이 감자튀김 존나게 맛있네. 어이, 공자댁 시종장! 이거 무슨 기름으로 튀긴 거냐? 나도 우리 애들한테 요리해주게 레시피 좀 얻어가자.”

전체적으로 내 발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대략 0.5명 정도에 불과한 것 같았다.

과연 이것들이 정말로 친구들인가, 서로 목숨을 맡겼다는 동지들인가 의심스러워진 순간, 거실을 나갔었던 성기사가 돌아왔다.

성기사는 한손에 전동칫솔을 들고 우리를 쓰윽 둘러봤다.

“참고로 나는 삼선 슬리퍼엔 맨발보다 양말이라고 생각하는 파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거실을 지나쳤다.

모두가 침묵한 채 성기사의 멀어지는 등을 쳐다보았다. 백작이 슬리퍼를 벗어다가 성기사의 뒤통수를 향해 전력으로 쓰로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 진짜로 갑니다……. 네? 가요? 간다니까요. 진짜로.”

대답이 없었다.

백작과 성기사의 몸싸움이 시작되지 놀랍게도 나한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마치 가정에서 소외된 어른이 되어버린 기분을 곱씹으며 터덜터덜, 힘없이 다음 스테이지로 향했다.

[당신은 80층으로 전송됩니다.]

“----이리하여서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겁니다. 이야아. 역시 헌터라면 탑을 올라야죠. 아니, 이제 성좌지만. 헌터 겸 성좌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야 해요. 봐요. 80층에 오르니까 벌써 공기부터 다르잖아요?”

“당신……."

[태고의 지팡이]가 나를 어이없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혹시 병신 같다는 말 들어본 적 없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

2.

여든 번째 층에서 나를 맞이한 관리자는 [태고의 지팡이]였다.

마법사는 변함없는 은빛 칼날과 같은 눈동자로, 무엇보다 매우 뚱-한 눈깔로 나를 보았다.

“뭐. 언제쯤 다시 등정을 시작할까 걱정하던 참이었단다. 슬슬 오지 않으려나 생각했는데 마침 때를 맞췄구나.”

“예에, 1층에서 볼 일도 다 끝났구요……. 어라?”

나는 불현듯 [태고의 지팡이]에서 뭔가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얼굴도, 옷차림도.

다만 그녀를 상징하는 물건인 지팡이.

두께는 새끼손가락만하면서 길이는 무척이나 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던 지팡이가 똑 부러져 있었다.

“지팡이는 왜 그렇게 됐어요.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습니까?”

“누구랑 싸웠냐고?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태고의 지팡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이랑 싸워서 졌잖아. 명천(莫天). 당신한테 명부의 관리권이 넘어가고 나서 나는 쭉 부러진 지팡이 신세야.”

“엑. 그래도 아직은 마법사님이 천국층을 관리하고 있는걸요.”

“그러게…. 아직은. 아직까지는 말이야.”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만일 당신이 100층에 오르지 못하거나 중간에 포기해버리면 나는 다시 온전한 기둥으로 돌아가겠지. 당신이 100층 정복에 성공하면, 이대로 나가리 될 테고. 정말로 분하지만 지금의 나는 당신을 [안내하는] 입장이 아니라, 당신을 상급자처럼 [모시는] 입장이야.”

“과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지금 자판기 율무차가 마시고 싶은데 좀 사오실래요?”

“……이이일단, 그래. 내가 당신을 모시는 입장이라고 말하자마자 날 부려먹으려 드는 건 이해할 수 있어. 백보 양보해서 이해한다 치자. 그런데 어째서 하필 자판기 율무차야?”

“생각해보세요. 마법사님.”

“말해보려므나.”

“자기 상사가 다른 것도 아니고 율무차를, 그것도 자판기 율무차를 사오라고 시켰다고 상상해보세요. 딱 그거 하나만 사오라고요. 그럼 이제 자판기에 돈 넣고 버튼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기분이 어떨까요?”

“지금 내 기분일 거 같은데.”

“뭐야. 잘 아시네요. 얼른 사오시지 않고 뭐해요?”

“이런 개 같은……."

3분이 흘렀다.

나는 마법사가 가지고 온 자판기 율무차를 호로록 빨아마셨다. 율무 가루와 설탕이 만나 어디서부터 율무이고 무엇이 설탕인지 알 수 없게 된 혼돈의 맛이 입안에 사르륵 퍼졌다.

“으음. 이 맛이구나. 이게 진짜 바로 추억의 맛이라고 원장님이 말했던 적 있거든요. 메모리얼 구루메 원장님. 이것도 스핀오프 시리즈로 가능하지 않을지.”

“당신, 곱게 죽지 못할 거야……."

애당초 죽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온갖 편법을 써서 배달해온 율무차는 맛있니?”

“예. 꿀맛이에요.”

“그럼 꿀을 퍼마시면서 들으렴. 71층부터 80층까지는 당신이 성좌로서 정립되는 단계였어. 그리고 당신은 어느 성좌보다 더 완벽하게 이 코스를 통과했지. 이제 81층부터 90층까지는, [당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차례야.”

나는 빨대를 문 채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만의 왕국이요?”

“그래. 성역(星域)이라고도 불러. 성역(聖域)이나 용국(龍國)이라 부르는 사람도 많지만.”

마법사는 부러진 지팡이로 툭, 허공을 건드렸다.

그러자 새하얀 입방체가 나타나더니 표면에서 뭔가를 비추었다. 나에게 익숙한 풍경이 그곳에 얼룩졌다.

“이건 만상의 대도서관이잖아요.”

“맞아. 만상의 대도서관은 [방구석 도서관장], 즉 하무스트라의 성역이었어.”

헤에.

예시를 보니까 나보고 무엇을 만들라고 하는 건지 감이 잡힌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 무티아의 성역은 사막에 파묻힌 신전이었지. [미궁에 거하는 눈]……. 지금 당신이 팔찌로 쓰고 있는 히시미트 크리츠의 성역은 인형 전시장이었고. 설령 성좌가 되지 못한 헌터라도 90층까지 통과하면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는 게 허락된단다.”

“요컨대.”

나는 빨대에서 입술을 땠다.

“전 이제부터 저만의 집을 가지게 되는 것이군요."

“응.”

탁.

마법사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겼다.

“오직 당신만의 궁전을.”

[당신은 81층으로 전송됩니다.]

하얀 빛이 눈앞을 감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