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 집구석. (2) >
기나긴 빛을 뚫고 나와보니, 그곳엔 나만의 왕국이 있었다----와 같은 일은 아쉽게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곳은 암흑 천지였다.
“우왓, 뭐야……. 겁나 어두운데요?”
오로지 어둠뿐.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디더보니 발목이 물컹, 어디론가 가라앉았다. 꼭 실수로 흙탕물을 밟은 느낌이랄까. 어둠의 촉감은 한없이 진흙 덩어리에 가까웠다.
“그야 아직은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태고의 지팡이]가 등 뒤에서 말했다.
“여긴 말하자면 집의 뼈대도 세워지지 않은 맨땅에 가까워. 빌트인 가구들은커녕 지붕조차 없지. 명천. 당신은 여태까지 스테이지들을 클리어해서 땅값은 벌었지만, 아직 집은 세우지 못한 셈이야.”
“땅주인은 됐지만 집주인은 아니라는 소리군요.”
그렇게 따지면 땅 하나 사는 데 10층부터 80층까지 뼈 빠지라 고생한 것이려나. 인생을 100층에 비유할 때, 땅을 장만했다면 벌써 인생의 목표리를 80%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음. 미묘하게 리얼해서 기분 나쁘군….
“제가 고용할 수 있는 건축가랑 인테리어 업자는 어디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당신이 건축가 겸 인테리어 업체야. 당신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퀘스트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헌터가 아니니까. 뭐, 그런데도 굳이 퀘스트로 표시하자면……."
마법사는 지팡이로 허공에 쓱쓱 글자를 새겼다.
“이 정도일까.”
지팡이 끄트머리가 지나간 곳마다 새하얀 글자들이 번져올랐다.
+
[ 당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시오]
성좌: 비명을 모으는 하늘
난이도: 미정(未定)
임무 목표: 성역 창조.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군요.”
“선이 되어라. 세상을 구하라. 인간을 도와라. 삼라만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들은 자고로 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법이야. 해서, 당신이 열심히 궁궐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나는 옆에서 지켜보며 이것저것 참견하기만 하면 되지만.”
마법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단다.”
“인생은 원래 문제밖에 없죠.”
“응. 그래도 이번 문제는 당장 해결할 필요가 있어. 당신, 웬만큼 뒷정리는 깨끗하게 해두고 떠나는 게 장점이던데…. 이제 보니까 제대로 매듭지어두지 않은 인연이 딱 하나 있더라.”
매듭이 안 지어진 인연? 뒷정리가 안 된 인간관계?
나한테 아직도 그런 게 있었나? 유수하한테 코사크 댄스까지 추어준 이래 내 인간관계는 깨끗해다 못해 아예 표백제로 탈탈 털렸을 텐데.
“하하. 뭔가 착각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전 정리할 거 다 정리한 남자예요.”
“사실 난 당신이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어. [저거]를 막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쳐들어와서 나를 괴롭혀 대니까 버틸 재간이 없더라.”
쩌저저저적-
어디에선가 불길한 파열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득한 위쪽, 하늘이라 불러야 할지 천장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단순히 어둠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장막에서, 균열이 벌어졌다.
“축하해. 명천.”
마법사는 마치 뭔가를 피하듯이 나로부터 세 걸음 떨어졌다. 그녀는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도 이제는 명실상부 유명한 인기 성좌야.”
“그게 뭔……."
“성좌계에는 인기인들만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한 명 있거든. 넌 수많은 성좌들한테 관심을 끌고 있는 중이라서, 안타깝게도 스토커한테까지 네 얘기가 들어갔나 봐. 뭐. 도와주진 못하지만 잘해보렴.”
촤아아악!
균열이 벌어지면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이곳도 어두웠으나 장막 저편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온몸에 진물을 묻힌 채 바닥으로 떨어진 존재만은 새까맣지 않았다.
[경고.]
[살천성(殺天星)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은 당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 존재는 백금과 같은 은발을 흘리고 있었다.
“네가 [비명을 모으는 하늘]인가?”
"......."
은발의 남자는 내게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은 그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는, 이제 김율이란 이름을 되찾은 내 가신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노란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레판타 아이김.”
살천성이 천천히 머리를 기울였다.
갓 태어난 별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이쪽을 보았다.
“나를 아나?”
그래.
당신이 남았었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말한 대로, 아직 매듭짓지 않은 채 내버려둔 인과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3.
살천성은 복수(複數)로 이루어진 살육인형이다.
일전에 나는 살천성한테서 김율이란 존재를 빼앗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살천성은 본래 기억을 버림으로써 힘을 얻는다. 그는 김율이었던 과거를 전부 버렸다. 하지만 나는 트라우마를 통해 그의 과거를 강제적으로 볼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엿본 과거를 통해 김율을 복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히 [김율과 똑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를 새로이 창조한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세상에는 살천성이라 불리는 기억상실증 전투인형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지닌 S급 스킬 덕택으로.
+
[인형술사의 퍼레이드]
랭크: S
효과: 어느 세계에 늙은 인형술사가 살았습니다. 인형술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고독을 견딜 만큼 강하지도 못했지요.
‘또 다른 나를 만들자.’ 인형술사는 고안했습니다. ‘또 다른 내가 사랑받게 하자. 살게 하자.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리고 만일 상처를 받게 된다면--- 버려버리자.’ 인형술사는 속삭였습니다. ‘영원히 지워버리는 거야.’
무수한 인형이 살았습니다.
무수한 인형이 폐기 당했습니다.
이 스킬은 약자를 위한 사술(邪術). 가질 기억과 버릴 기억을 선택할 권리. 당신은, 당신과 정확히 똑같은 외형과 능력을 가진 인형을 13체 만들 수 있습니다. 인형이 죽으면 또 다른 인형이 깨어납니다. 부서진 인형은 다시 수리할 수 있습니다.
그대에게 모방된 영생을. 조립된 영원을.
※단, 인형 간에 기억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
13체의 인형.
하루하루, 끊임없이 기억을 잃어가며 성좌들을 살육하는 존재. 바로 그것이 살천성의 정체였다.
나는 14번째 인형을 창조한 다음 그것에게 김율의 기억을 집어넣었다. 14번째 인형에게 살천성이나 레판타 아이김이 아니라 김율(金律)이란 이름을 붙였다.
달리 말해, 내가 거둬들이지 못한 13체의 인형은 아직도 어디에선가 건재했으며.
“미안하군. 나는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성좌로서 명성이 높아진 나를 참하기 위하여.
“만약 언제 만났었는지 말해준다면 너에 대한 기록을 검색해볼 수는 있다.”
살천성이 품속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었다. 나는 저 남루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일기장. 인형끼리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절대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살천성이 지니고 다니는 아이템.
비록 기억은 단절되더라도 수첩에 적힌 문장은 다른 일기장들에도 고스란히 공유된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와 당신은 분명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들고 있는 일기장에서 저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순 없습니다.”
“어째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지?”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일기장을 얻기 이전의 과거에서 당신과 만났으니까. 당신이 절대로 되돌아볼 수 없고, 되찾지 못할 시간에서.”
“과연. 너는 시간 능력자인가.”
살천성은 담담했다. 내가 당신의 과거를 보았노라고 말했는데도 전혀, 어떠한 호기심도 품은 것 같지 않았다.
“까다로운 적이 되겠군. 너의 능력에 대한 단서를 알려준 것에 예의를 표한다.”
“저는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 특별한 인적사항은 아니다.”
살천성은 일기장에 뭔가를 적었다.
나는 펜이 스윽스윽 움직이는 방향을 읽어, 역추적하여, 수첩에 적힌 문장을 머릿속에서 구성했다.
+
비명을 모으는 하늘.
시간 스킬 보유자.
상대방의 과거를 알 수 있다.
과거, 나와의 접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글씨들을 재구성하는 일은 무척 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이잖아.”
“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살천성은 변함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꾹 조였다. 자신이 쓰는 문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이용하는 것인가.
아마 살천성에게 있어 저 글씨들이란 [왠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는 문자]였을 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면 곤란한 문장들을 쓸 때, 일기장을 쓸 때 이용했으리라. 마치 자기 혼자만 아는 암호문처럼.
그는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었다. 언어를 잊었기에 실어(失語). 자신의 존재마저 버렸기에 실존(失存).
실향하고 실어하여 실존하게 된 이를,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비록 그가 나와 똑같은 고향에서 난 노란색 고무줄을, 똑같은 글씨를 쓰고 있었지만, 아나스타샤 등등이 체육복을 입은 광경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르게----- 내 마음은 착잡할 뿐이었다.
“나는 31일 전부터 너를 추격했다.”
살천성이 수첩을 탁, 덮었다.
둔탁한 소리에 나의 상념은 끊어졌다.
“31일 전부터라고요?”
“그렇다. 하지만 내가 사자세계로 침입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내 앞을 가로막은 노검사가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노인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향해 살천성이 중얼거렸다.
“노인은 자기 자신의 이명을 검성(劍星)이라 밝히더군.”
눈이 확 뜨였다.
그랬던 건가. 마르쿠스 영감님이 도통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싶었더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살천성과 싸우고 있었구나!
바빌론에서 머무른 100일 동안에 나는 마르쿠스 영감님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도 검성의 행적을 몰랐다. 홀로 수련 여행이라도 떠나신 것이겠거니, 내심 짐작하고 있었는데 설마 살천성의 침략을 막고 있었을 줄이야.
『자네의 경호원이 되고 싶네.』
『자네의 경호원이 되어, 자네의 목숨을 지키고, 자네의 주변을 둘러싼 자들의 인간성을 영원토록 지키고 싶다.』
내 경호원이 되고 싶다던 마르쿠스 영감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영감님은 우리를 지키는 목책이 되어, 사자세계의 성벽이 되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침략자와 칼을 나누고 있었다.
살천성의 모습을 보고 착잡해졌던 마음이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다시 채워졌다.
“몇 번이나 다른 루트를 통해서 침입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반걸음 앞서서 나를 막았다. 아마 나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스킬을 가졌거나, 해당 세계를 침입하려 드는 외부인을 감지하는 스킬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살천성이 말했다.
“결국, 네가 사자세계를 벗어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추격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요. 그거 희소식이네요.”
나는 씩 웃었다.
“왜냐하면 결국 당신이 검성 어르신을 이기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어르신보다 강합니다. 살천성. 당신은 무슨 수를 써도 저를 꺾지 못해요.”
“옳은 추론이다.”
뻔한 도발에 살천성은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검성은 설령 자신이 패배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내가 너에게 굴복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었다. 그 정보를 접하고 나는 너의 위험도를 최상급으로 측정했다. 네 말대로, 지금의 나만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너를 이기지 못하겠지.”
그 순간이었다.
“고로, 나는 [모든 수를 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쩌저저적! 저저적, 쩌억!
이미 상공에 나 있던 균열이 더욱더 벌어졌다. 틈새로 하나, 둘, 셋, 계속해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나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같이 은색의 머리를 흩날리고 있음을 목격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살천성이 81층에 현현합니다.]
나는 무심코 입술을 다물었다.
"......."
총 13체.
단 한 체만 동원되어도 웬만한 성좌들을 쓸어버리고, 검성 어르신과 맞먹는 살육인형이, 다 합쳐서 열세 자락의 은발을 흘리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13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이쪽을 쳐다봤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
“……하.”
“너를 최고 등급의 위험으로 지정한다. 이제부터 나의 전력을 다해서 너를 말살하마.”
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무스트라 녀석이 이 광경을 보면 너무 기뻐서 졸도해버리겠네!”
내가 성검의 칼자루를 잡은 순간, 나를 향하여 동시에, 13명의 살천성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