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76화 (376/400)

376화.  < 성역이라 불린 곳. (1) >

1.

개종하겠다는 흑룡주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당신은 신도를 구합니다.]

[흑룡주가 당신의 신도가 됩니다.]

[이제 당신은 흑룡주에게 가호와 권능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로 믿을 거예요?” "응” “진짜로요?” "진짜니까 얼른 계약하기나 해”라는 문답만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른 절차 따위는 없었다.

이거 원래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맺어지는 건가.

“와알. 설마 그럴 리가 없잖슴까….”

[금화를 문 고양이 ]가 어이없단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스킬 카드도 선물해주지 않았는데 신도 계약을 맺다니. 말도 안 됨다. 여러분이 이상한 검다.”

“그래요?”

“넵. 뭣보다 성좌와 신도는 서로 신뢰하고 있어야 함다. 신도는 성좌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을 거라 믿어야 하고, 성좌는 신도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어야 함다. 그리고 서로 간에 상당한 인연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우리는 특이한 케이스에 속하나 보다.

하지만 내겐 이게 평범하게 느껴졌다. 흑룡주만 이랬던 게 아니라 성기사나 백작 등도 간단히 신도가 되기로 계약을 맺었으니 말이다.

“정상이 아님다. 멍.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겁니까?”

삼색 고양이가 질린 표정을 짓는 사이 준비는 전부 끝났다.

공용 숙소의 드넓은 정원에 공략대가 집결했다. 총 12명. 가신단 중에서 김율, 에스델, 우부르카, 실비아, 사마군(四魔軍)이 선발되었다. 동료들 중에선 흑룡주, 이단심문관, 독사, 성기사가 참여한다.

여기에 나까지 합쳐서 13명.

정확히 살천성의 살육인형들에 1:1로 대응하는 숫자였다.

“……웬만한 세계는 그냥 이 멤버로 끝낼 수 있겠는데요.”

공략대의 위용을 둘러보고 실비아는 혀를 내둘렀다.

실비아와 사마군, 성기사는 솔직히 말해서 살천성을 상대할 실력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약간이나마 시간을 끄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들이 버티는 동안, 내가 재빨리 살육인형들을 처치해서 도와주러 갈 것이다.

“살천성도 웬만한 세계쯤은 거덜낼 수 있는 적이니까. 어쩔 수 없어. 걔가 비겁하게 머릿수로 밀어붙이지만 않았으면 나도 정정당당하게 1대1로 싸웠다.”

“저어기, 가주님. 제가 에스델 양한테 들은 이야기가 맞다면 가주님도 마왕을 물리칠 적엔 쪽수로 후려팼다고 하던데….”

“좋습니다. 모두 준비 끝났지요? 어이, 실비아 시종장.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투에 뛰어들 자세가 되었는데 왜 너만 알짱거리고 있냐. 얼른 준비해.”

“시발. 진짜 더러워서 언젠가 시종장 직위 때려칩니다.”

실비아가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나는 시선을 돌려 손목에 감긴 실뱀을 내려봤다.

“히시미트 크리츠."

“끼에엑.”

“살천성의 좌표를 찍어라.”

실뱀은 머리를 까닥거린 뒤 내 손목에서 기어나왔다. 미끌미끌한 감촉이 손등에 감겨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김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김율의 오른손을 잡았다.

[당신은 ‘미궁에 거하는 눈’의 소유권을 임시로 이전합니다.]

스르륵.

실뱀은 내 손끝을 타고 김율의 손가락으로 넘어갔다.

"......음."

뱀 비늘의 감촉이 생경했는지 김율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느낌이 이상하군. 폐가 조금 답답하다. 이것이 성좌에게 둘러싸인 감각인가.”

“아, 네. 꼭 숨결에 종잇장 같은 무게가 더해진 느낌이죠.”

“그렇다. ……가주는 항상 이런 것을 짊어지고 있었나?”

“익숙해지면 의외로 편해요.”

김율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의 손목에 감긴 실뱀만이 쉬릭, 쉬이익, 나지막한 소리를 연거푸 게워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은 권능을 발현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살천성의 성역을 탐색합니다.]

[탐색 중.]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과연 실뱀이 살천성의 성역을 찾을 수 있을까. 자기 스스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장담했지만 정말로 가능할까.

촛농이 불에 녹아 한 방울 미끄러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탐색 완료.]

[‘미궁에 거하는 눈’이 살천성의 성역을 특정합니다.]

‘좋아.’

나는 잠시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요새를 공략하는 것이 목표인 군대가 이제 요새의 위치를 알아냈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라. 김공자.”

김율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적은 우리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작전은 반드시 성공한다.”

“……예. 하지만 살천성은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하는 사냥꾼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도, 아마 성역이 침략당했을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있을 거예요.”

“있겠지.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해 침략당하는 경우]만은 결코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율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머리끈. 못된 것들이 조롱삼아 건네준 노란색 고무줄이 아니라, 내가 그를 가신으로 받아들일 적에 선물한 머리끈이었다.

“살천성은 틀림없이 한 순간 머뭇거린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그 찰나의 시간이다. 너에게 1초가 필요하다면 내가 1초를 벌어주겠다.”

김율은 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수만 가닥의 머리카락이 한 갈래로 모였다. 그것으로 각오를 정한 듯, 김율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전송."

파앗!

새하얀 빛이 김율의 전신을 감았다. 그가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진 직후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입술이 달싹였다.

‘1초.’

지금 이 순간 김율은 살천성의 성역에 도착했겠지.

‘2초.’

살천성은 외부의 침입자를 알아채고 즉시 요격에 나섰을 것이다.

평범한 성좌이거나 헌터라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외부자를 허락한 적 없는 성역이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우선 당황하리라. 하지만 살천성은 그러지 않는다. 미리 입력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일 뿐.

‘3초.’

그러나 침입자의 정체는 감히 어떤 매뉴얼로도 대응하지 못할 인물이다. 자기 자신이니까.

여기서 살천성은 잠시 요격을 중단하고, 침입자가 정말로 자신과 동일인물인지 확인할 터.

그러므로.

‘4초.’

김율은 내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사도가 당신을 간절히 부릅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오러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시간 감각을 연장시켰다. 내 시간이 어찌 흐르든 상관없이, 모든 스테이지로부터 격리된 지하 1층에서 들여오는 목소리는 다만 고고하게 흘렀다.

[당신의 사도는 자신이 있는 곳에 당신 역시 있기를 부탁합니다.]

[강림하시겠습니까?]

처음 접해보는 메세지에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공략대들에게 내 출정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입을 열어 소리쳤다.

“예!”

새까만 그림자가 발등을 덮었다.

만일 평소와 같았다면 ‘검은 빛이 나를 휘감았다’라고만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도로 연장된 시간 속에서 나는 ‘검은 빛’의 자세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을 닮았다.

그림자에서 사람의 팔들이 올라왔다. 손가락이 내 발끝에 걸렸다. 손바닥이 내 발목을 잡았다. 꼭 노이즈처럼 검은색으로 색칠된 팔들이 무수하게 기어올랐다.

'.......'

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 익명의 팔들을 전부 구별할 수 있었다. 구분되었다. 여태껏 내가 죽임을 당한---- 트라우마를 엿본 사람들의 손이, 팔이, 구현된 것이었다.

그 중에 김율의 손이 있었고.

나는 팔을 뻗어 그의 애원을 붙잡았다.

[당신은 사도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무수한 손바닥들이 기어올라 내 온몸을 뒤덮었다.

[강림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흑색의 손들에 파묻혀 전이하였다.

‘6초.’

다음 순간에 나를 반긴 것은 익숙하다면 익숙한 풍경.

그곳은 쓰레기장이었다.

철 지난 고철들과 내용물을 토해낸 플라스틱들이 단지 누군가가 주워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그것들을 줍지 않아 쓰레기들은 무덤을 이루었다. 지평선까지.

나는 상공에서 소환되어, 세계의 끝까지 펼쳐진 쓰레기장을 내려다보며 빠르게 낙하했다.

[당신은 살천성의 성역에 입장했습니다.]

노을이 눈부셨다.

석양은 나를 비끼어 내리치며 지상의 쓰레기장을 비추었다.

‘7초.’

어느 오래된 유적의 도시에 남은 고분(古境)들처럼 쓰레기는 봉분들로 쌓여 있었다. 그 거대한 무덤의 꼭대기. 마치 반쯤 껍질이 벗겨진 채 내버려진 귤처럼, 플라스틱 패트병은 라벨이 헐렁헐렁 매달았다.

원래 파란색이었을 패트병 라벨은 회색빛으로 퇴색했다. 고철들은 살갗이 뜯겨져나가 발간 속살을 드러냈다.

모든 색깔이 쇠퇴하고 모든 철붙이가 퇴폐하는 그곳에서, 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은빛의 철검을 휘두르는 자들이 있었다.

똑같이 생긴 자들이었다.

‘8초.’

그러나 결코 똑같은 자들은 아니었다.

12체의 살육인형이 1명의 인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달려들던 중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내 존재를 감지했고,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높은 상공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나와 12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나는 성검을 빼들었다.

‘9초.’

그리고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이 사도와 신도를 부릅니다.]

[다수의 사도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다수의 신도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아직 하늘에서 강하하고 있는 내 주변으로 칠흑색의 그림자들이 맺혔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의 사도가 현현합니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의 신도가 소환됩니다.]

그림자들은 열하나였다.

우리는 여러 파편으로 쪼개어진 운석과 같이 맹렬하게 떨어졌다. 거센 바람이 뺨을 스쳤다.

처음엔 새까만 그림자에 파묻혀 있던 동료들은, 바람을 맞으며 흑색을 벗겨냈다. 그러자 맨얼굴들이 드러났다. 누군가는 신기한 듯 눈을 깜빡이며, 누군가는 강한 맞바람에 눈쌀을 찌푸리면서, 또 누군가는 칼자루를 잡으며 지상을 내려봤다.

“----전이!”

그리고 흑룡주는 자신의 능력을 주저없이 썼다.

흑룡주는 순간전이 스킬을 발동하여 조각조각 나누어진 채 떨어지던 동료들을 한 명씩 수거했다. 그녀 역시 오러에 일가견이 있는 헌터였다. 흑룡주는 몇 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열한 명의 공략대를 손에서 손으로 묶었다.

“김공자!”

흑룡주는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잡아!”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나는 흑룡주의 맨손을 잡았다.

‘15초.’

다음 순간, 우리는 지상에 있었다.

살천성은 우리의 출현을 두고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6초밖에 되지 않았었다.

처음엔 김율 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포위망을 펼쳤다가, 다음엔 나를 요격하기 위해 진형을 바꾸었으며, 마지막으로 13명의 침입자에 대응하기 위해 또다시 태세를 바꿔야만 했다.

‘16초.’

세 번,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이 연달아 들이닥쳤다.

세 번, 살천성은 우리한테 숨을 쉴 시간을 빼앗겼다.

‘17초.’

그리고 우리는 세 번이나 틈을 보인 사람을 사냥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제일 먼저 나의 검이 살육인형을 갈랐다. 김율에게 가장 접근해 있던 인형이었다. 일격, 이격, 삼격, 세 방향의 검로를 날려 살육인형의 팔다리를 분쇄했다.

“우거어어어어!”

나 다음으로 무기를 휘두른 건 우부르카였다. 우부르카는 도끼를 휘둘러 다른 살육인형의 양다리를 한꺼번에 아작냈다.

평상시였다면 살천성은 우부르카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겠지. 그러나 흑룡주의 전이는 기습적이었다. 살천성은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지 못한 채 쓰러졌다.

13:13으로 시작된 싸움은 순식간에 13:11로 변했다.

“그런가.”

살육인형 가운데 한 명의 살천성이 중얼거렸다.

“명천. 너는 예언자였는가.”

싸움의 추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11체 남은 살육인형은 서로 떨어져서 우리에게 각개격파를 강요당했다. 우부르카와 김율이 합세하여 또 한 체의 인형을 베었다.

13:10.

“내가 너를 봉인할 계획이란 것을 예언하고 먼저 이곳에 쳐들어왔나.”

“아니요. 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회귀자이지요.”

김율과 우부르카, 실비아가 연합하여 새로운 인형에게 돌진했다. 이 시점에서 살육인형들은 간신히 자세를 다잡았다. 곳곳에서 공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흑룡주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성기사의 기합소리가 석양을 찢었다.

“회귀자? 그럴 리 없다. 나는 네가 시간 능력자일 것을 예상하여 완벽에 가까운 대책을 마련해두었다.”

“만일 제가 홀몸이었다면 완벽했을 것입니다.”

나는 살천성에게 뛰어들었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나를 보고, 살천성은 아주 잠깐 입을 깨물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빠르게 수를 검토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의 머릿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천성이 입술을 열어 낸 목소리만은 분명히 들렸다.

“지난 29일 동안의 기억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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