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 썩은 꽃들의 정원사. (1) >
1.
자아.
그러면 이제.
세상에 꽃을 심자.
“오케이. ……일해볼까.”
나는 살천성의 은방울꽃을 쓰다듬은 뒤 읏차차, 기지개를 폈다.
지금부터는 꽤나 열심히 돌아다녀야 할 거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세상. 그야말로 무물(無物)이나 다름없는 여기서 한송이의 꽃을 피우려거든 정말 많은 게 필요할 테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배후령이 물었다.
생각해보면 배후령은 요새 조용했다. 살천성에게 봉인당할 뻔했을 때도 결국 반격에 성공해서 살천성을 쓰러트렸을 때도, 배후령은 아무런 말을 안 했다. 단지 몇 걸음 떨어진 채 지켜봤을 뿐.
그래서 섭섭했냐고 묻는다면, 아니. 딱히.
나는 배후령이 왜 간섭하지 않은 건지 짐작했다. 아무런 대화가 없었어도 배후령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10층을 오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나는 강했다. 배후령과 겨우 반걸음밖에 뒤쳐지지 않은 경지까지 올라섰다.
‘가르침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만일 내가 살천성에게 패배하여 영원의 봉인에 사로잡혔다면 그걸로 끝. 탑 꼭대기를 향한 나의 도정은 결국 거기까지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서로 대등한 라이벌 사이에서 조언은 불필요하겠지.
“그렇네요……."
나는 외투를 벗고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우선은 태양이 필요하지요.”
-태양?
“네. 빛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기가 좀 어두컴컴해요? 아무리 이미 썩어버린 꽃들밖에 피지 않을 예정이라지만, 너무 어둡기만 하면 꽃들도 서러워할 거예요.”
배후령은 살짝 미친놈을 보는 눈깔로 나를 쳐다봤다.
-태양을 어떻게 만들려고? 참고로 오러로 똘똘 뭉쳐서 태양 비스무리한 전구를 달아놓을 순 있을 텐데 그거도 계속 유지하려면 힘들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시간은 많다.
“그리고 왠지 전문가한테서 구할 수도 있을 거 같고요.”
2.
“안 됨다, 안 됨다. 절대 안 됨다.”
안타깝게도 바빌론으로 내려가서 전문가한테 상담(商談)을 받아본 결과, 내게 돌아온 것은 눈앞에서 맹렬하게 절레절레 저어지는 고양이의 핑크빛 육구였다.
“무리예요?”
“왈. 아무리 저희가 이렇게 왈왈 소리 내기로 했다지만 최소한 양심은 가져야하지 않슴까? 고객님의 예산으로는 ‘태양’은 좀, 아니 많이 무리임다.”
[금화를 문 고양이]는 예산 한도가 5천만원인데 신축 아파트 전세 어떻게 안 되냐고 묻는 사람을 보는 부동산 중개인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겁나 리얼해서 상처 받네.
“멍, 겁나 오래가는 전구는 구해다드릴 수는 있슴다만….”
“에이, 그건 멋이 없어요. 이래 봬도 정원인데요. 자연광이 아니면 좀.”
“으으음……. 그럼 불사조는 어떻슴까? 천장에다 새장을 달아둔 다음 거기에 불사조를 집어넣으면 어찌저찌 태양 같은 분위기가 살검다.”
“그거 자연광 맞아요?”
“비슷하지 않겠슴까?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고 세상은 원래 적당한 타협의 연속임다.”
흐음.
고양이의 말을 듣고 일순 혹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원 위에 불사조가 매달린 채 꿰엑꿰엑 울어대는 모습은 좀 병신 같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타협의 연속이라는, 고양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흘린 말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게요. 굳이 빛을 구하기 위해서 태양을 가져올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썩은 꽃들에게 태양은 지나치게 눈부실 거 같아요.”
“옙옙, 바로 그런 자기 정당화야말로 성좌가 갖춰야 할 덕목임다! 자아, 명천. 그러면 불사조의 현재 시세에 관해 자세히 말씀드리옵자면, 도철이 나가리된 이래 불 속성 가진 애들의 시세가 많이 내려갔는데……."
“상담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냥?”
나는 목장갑과 자루포대, 각종 장비를 사서 다시 81층으로 돌아왔다.
“……어디 감자라도 캐러 갈 것 같은 복장이구나?”
양손에 목장갑을 끼고 자루포대를 짊어진 날 보고 [태고의 지팡이]는 살짝 미친놈을 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라. 혹시 나 모르는 곳에서 세상 사람들이 눈빛에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서 날 볼 때는 꼭 저래야 한다고 합의라도 한 건가.
“태양을 구하겠다느니 빛이 필요하다느니 하는 소리는 아까 엿들었단다. 설마 어디 가서 자루포대에 태양을 담아오려는 건 아니겠지?”
“음. 비슷해요.”
“뭐?”
“그보다 저, 잠깐 살천성의 성역에 들릴 수 있을까요?”
[태고의 지팡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소리야? 살천성의 성역은 이미 멸망했어. 당신도 바로 어제 눈앞에서 지켜봤잖니.”
“예. 그렇지만 탑의 목소리는 세계가 멸망한다고 했지 소멸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탑주는, 설령 성좌와 사도 그리고 신도들이 전부 사라져서 멸망해버린 세계라 하더라도……. 그곳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아요.”
"......."
“아마 멸망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멈춰 있겠지요. 어디엔가. 저도 잠깐만 거기에 들릴 수 있게 해주세요."
[태고의 지팡이]는 이마를 짚었다.
“명천……. 당신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야. 전부 끝장난 곳에 가서 뭘 주워오게? 쓰레기? 아니면 살육인형의 시체라도 가져오려는 거니. 차라리 레전드 아이템이라도 달라고 하면 이해라도 가지. 쓰레기밖에 남지 않은 장소에서 뭘.”
“하아. ……잠깐 기다려봐.”
마법사는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았다.
[‘태고의 지팡이’가 이미 정지해버린 성역에 대한 입장권을 요청합니다.]
[승인.]
[당신은 살천성의 성역(閉)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꽤나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마법사가 턱을 끄덕였다.
“허락은 받았어. 당신이 뭘 하려는 건지 탑주는 궁금한 모양이야. 그 사람의 호의를 얻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닌데 재주도 좋구나.”
“저처럼 착하게 살면 됩니다, 착하게만.”
“웃기네. 당신처럼 살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 건 둘째치고 영혼이 썩어 문드러질걸.”
내 영혼이 뭐 어때서.
“자기 성역을 썩은 꽃들의 화원으로 꾸미겠다는 인간이 제정신일 리 없지. 아니, 그냥 누군가가 자기집 베란다에 꽃들을 심어놨는데 그게 전부 썩어버린 꽃들이라고 생각해보렴. 정상이겠니?”
그런가?
말을 들으니까 조금 이상할지도.
어쩌면 배후령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죄다 미친놈 보는 눈이 된 것엔 그런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면서도 나는 계획을 변경하진 않았다.
전송.
[당신은 살천성의 성역(閉)에 입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제 멸망시킨 세계에 다시 발을 디뎠다.
풍광은 변하지 않았다.
바람은 고였으며 시간은 멈추었다. 노을이 저물던 하늘은 사라졌고, 유리 조각들로 편해버린 하늘의 붉은색도 무수하게 깨졌다.
허공에는, 무너져 내리는 쓰레기들과 깨져버린 유리-하늘들이 정지 화면처럼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자. 당신이 부탁한 대로 여기에 오게 해주었단다.”
이번엔 [태고의 지팡이]도 나를 따라왔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한사코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나 혼자뿐이어서 쉽게 얼굴을 비춘 것이다.
“여기서 뭘 가져가겠다는 건지 한 번 더 물어볼 수밖에 없구나.”
“하늘이요.”
[태고의 지팡이]가 미간을 좁혔다.
“하아? 하늘…?”
“네. 저는 하늘을 담아갈 겁니다.”
나는 정지한 세계의 쓰레기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찾는 것은 유리였다. 본래 노을이 새겨진 하늘이었다가 쪼개어져, 파편밖에 남지 않은 유리.
세상은 멸망했지만 여전히 유리들은 자기들이 깨졌던 바로 그 순간 물들였던 붉은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 조각 한 조각 주웠다. 조심스럽게.
너무 작은 유리 파편은 쓰기 어려웠다. 최소한 사람의 상반신만큼 큰 조각을 찾았다. 깨지지 않도록 천천히 포대자루에 넣으면, 어두운 자루 속에서 유리들은 빨갛고 노랗게 빛을 발했다.
[당신은 81층으로 전송됩니다.]
나는 포대에 석양을 가득 채워다가 81층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여전히 은방울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뿐인 공간을 나는 허공답보(虛空路步)로, 꼭 계단을 밟은 것처럼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새까만 천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좋아.”
나는 포대자루에서 유리를 꺼냈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유리에 작게 구멍을 냈다. 오러에 의해 절삭된 구명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실을 구멍에 넣었다. [금화를 문 고양이]에게 의뢰해서 불사조 대신 구매한 실로, 절대 끊어질 일이 없을 거라며 고양이가 호언장담한 물건이었다. 그럼 믿어도 되겠지.
“이걸 이렇게 꼬아서 천장에 매달면……. 됐다.”
흔들-.
실에 꼬인 유리의 오늘이 어둠 속에서 매달렸다.
마치 조명 하나 없는 지하실 한복판에 촛불이 켜인 것처럼 작게, 하지만 분명한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유리는 어느 노을의 잔해를 밝힌 것이다.
“아직은 조명이 너무 약하지만. 금방 괜찮아지겠지.”
"......."
나는 살천성의 성역과 81층을 왔다갔다 하며 계속해서 석양의 파편을 수거해왔다.
그런 내 모습을 [태고의 지팡이]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까 전까지 궁시렁거렸으면서 왠지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문 채.
[당신은 살천성의 성역(閉)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81층으로 전송됩니다.]
[당신은 살천성의 성역(閉)에 입장했습니다.]
[당신은 81층으로 전송됩니다.]
[당신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장에는 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매달린 실의 끝마다 노을이 흔들렸다. 때로는 사람만큼 거대한 유리조각에서. 때로는 손바닥만큼 작은 유리조각으로.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어느 멸망해버린 세계의 석양빛을 머금어서, 조용히 윤기가 흘러내렸다.
실의 길이도 들쭉날쭉하고 유리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아래에서 올려보면 꼭 등나무 같네.”
나는 만족스러웠다.
81층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그렇다고 밝느냐고 묻는다면, 밝지도 않았다. 한때 찬란하게 저물었을 노을들은 그 장대함을 잃어버려 오로지 쇠퇴하고 있었다.
퇴색한 노을.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저런 빛이라면 썩은 꽃들도 버거워하지 않고 기꺼이 허락해줄 테니까.
“……그래.”
하늘에 주렁주렁 달린 유리의 노을들을 [태고의 지팡이]는 올려보았다. 81층의 세상을 자그맣게 물들인 석양을 둘러본 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게 당신이 창조하는 천지의 빛이구나.”
그리하여 빛이 있었다.
이토록 볼품없는 빛을 모아다가 성역을 꾸민 성좌는 나를 빼고 달리 없겠지. 내 신도는 갈 곳을 잃어버린 꽃의 시체였고, 내 태양은 더 이상 아무도 비추지 못하게 된 세상의 흔적이었다.
쓰레기.
폐허.
인생이 아니라 여생이 꽃을 피우며, 실존하기보다 그저 잔존하는 곳.
“예. 썩 나쁘지 않지요?”
"......."
[태고의 지팡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별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살천성의 성역에서 마지막으로 패트병을 가져왔다. 이리저리 구겨진 쓰레기만 가득한 그곳에서 그나마 멀쩡한 플라스틱병이었다.
“음. 이거 만들어보는 건 꽤 오랜만인데.”
나는 아빠다리를 하고 가위를 들었다.
서걱.
가위가 패트병의 허리를 사각사각 잘랐다. 깔끔하게 반으로 분리되었다. 이리저리 모양을 내다보니 옛 추억에 잠겼다.
“고아원에 있을 때는 제법 자주 만들었지…….'
내가 만드는 건 바로 화분이었다.
꽃을 담는 그릇.
화분은 막상 사려고 하면 생각보다 비싸다. 그래서 고아원에선 패트병을 오려다가 화분으로 만들었다. 이게, 만들어보면 생각보다 예쁘거든.
“여기에다 흙을 담고……."
화분에 담을 흙에 대해서도 꽤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김율이 살았던 세계---- 지금은 김황태가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유학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세계에 가서 흙을 골랐다.
김율의 집이 있던 쓰레기장에 가서, 구덩이를 파내서, 검게 썩은 흙을 가져왔다.
“후아.”
화분에 흙을 다져넣은 뒤 거기에 조심스럽게 은방울꽃을 심었다. 다행히 은방울꽃은 다치지 않고 무사히 화분에 옮겨졌다.
하늘의 유리에서 흘러내린 붉은빛이, 환히, 플라스틱 화분의 투명한 표면에 비치어 미끄러졌다.
“오케이.”
그렇게 이 세상에 빛을 달았고 첫 번째 꽃을 심었다.
내 성역의 한복판에 은방울꽃 화분을 놓은 다음, 나는 등을 돌려 [태고의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아직 입을 닫고 있는 마법사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주면서.
“이런 식으로 여기의 하늘을 만들고 물길을 만들고 꽃, 더 많은 꽃들을 심을 거예요.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성역은 아니겠지만. 으음. 저는 아마도 여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서 다음으로 가볼까요. 마법사님.”
[당신의 세계에 하늘이 생겼습니다.]
[81층이 클리어됩니다!]
[당신의 세계에 땅이 생겼습니다.]
[82층이 클리어됩니다!]
이제 83층에 오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