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81화 (381/400)

381화.  < 썩은 꽃들의 정원사. (3) >

6.

정원은 숲과 다르며, 화원은 들과 같지 않다.

썩은 꽃망울 속에는 씨앗이 자라지 않고, 꽃가루를 옮길 꿀벌도 없으므로, 이 화원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은 내가 한 송이 한 송이 손으로 심은 것들이었다.

“완전히 구색이 갖추어졌구나.”

태고의 지팡이가 언덕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지팡이를 빨았다.

“집짓기로 치면 터 닦고 건물 세우고 벽지랑 안감 싹 발랐네. 덤으로 빌트 인 가구랑 전등, 에어컨 설치까지 다 끝난 셈이야.”

“마법사들도 에어컨 써요?”

“마법이 있는 세계에 어째서 마법이 있겠니? 마법사들 성격은 왜 그렇게 괴팍하고? 그게 다 에어컨이 없어서 그런 거란다.”

“알고 보면 에어컨을 관장하는 성좌도 있겠군요.”

“소개시켜줄까?”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모르겠네. 그거 하나는 참 마법사 다운 양반이다.

“해서, 집들이는 언제 할 거니?”

“집들이요?”

“응. 아니면 부흥회? 어느 쪽을 선호하니?”

마법사가 또 한 차례 그렇게 마법사 다운 말을 했다.

칼질이랑 무공밖에 배운 게 없는 오러꾸러기로선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런 마법사를 물끄럼 바라볼 수밖에.

태고의 지팡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지팡이를 입술에서 뗐다.

“이 단계에 이른 성좌들은 보통 두 쪽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란다.”

“살아남기 힘들겠네요.”

“첫째, 소중한 사람한테 자신의 성역을 구경시켜주면서 행복한 미래 설계를 하는 성좌. 둘째, 자기 신도들을 불러 놓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성좌."

“성좌들도 하는 짓은 다르지 않군요….”

첫째는 집을 산 가장이, 둘째는 본사 건물 세운 사장이 하는 짓이잖아.

태고의 지팡이는 잠자코 나를 꼬라봤다. 흠. ‘당장 너도 성좌인데 그 따위 썰렁한 농담을 지껄였잖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눈빛이군.

태고의 지팡이는 그 눈빛 그대로 말했다.

“참고로 너는 전자겠지.”

“그렇게 보이세요?”

“응. 네 부군 불러다 놓고 자랑할 거 아니니?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라비엘. 우리가 함께 지낼 안식처지요. 자문사를 울려 만든 게 이 바다고, 이 높다란 산맥은 아들내미가 집안에서 깽판을 친 흔적입니다…] 뭐 대충 그런 식으로.”

과연.

“아이 참, 왜 그러십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아실 만한 분이.”

“어머, 그러니? 어째서?”

“그야, 그러면 자연히 [이 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대하시라.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어느 시절, 소빙하기가 찾아와 도탄에 빠진 뱃사람들의 무리가 있었으니…] 뭐 대충 그딴 식의 이야기도 따라 나올 테니까요.”

태고의 지팡이는 지팡이를 문 채 어깨를 으쓱했다.

딴청을 부리는 태도. 역시나 다 알면서 꺼낸 말이었다. 나는 그 수작을 뻔히 꿰뚫어보면서도 손목을 까닥여 거기 매달린 히시미트 크리츠의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이 실뱀을 털 적에 해주었던 말이 있지요.”

- 인간은 네가 만든 유리 정원에 전시되기 위한 인형이 아니야.

-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전시되기 위해 살지 않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전시할 자격 따윈 없어.

“아무렴 그런 말을 했던 제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히시미트 크리츠가 끼잉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다시 손목을 거두면서 말을 맺었다.

“저는 이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전시하기 위해서 심은 것이 아닙니다.”

태고의 지팡이가 다시금 지팡이를 입술에서 떼었다.

“그 상대가 라비엘이라도?”

“그 상대가 라비엘이라도.”

아니.

“라비엘이기 때문에 더더욱.”

분명히, 즐거울 거라고 생각한다.

라비엘의 손을 잡고 내가 만든 이 세계에 대해 해설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구상을 갖고 무슨 궁리를 해가며 여길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라비엘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하고, 라비엘이 그것을 다시 한 번 인정해준다는 것.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내가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분명 심장이 녹아들 정도로 달콤한 느낌이겠지.

감탄해줄까? ‘과연 나의 부인이구나.’ 공감해줄까. ‘선한 이를 반려로 맞아 나는 진실로 행복하구나.’ 함께 해줄까. ‘그래, 상처 입은 꽃들이여. 나 또한 공자와 함께 너희를 돌보아주마.’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니까 안 한다.

"저는 라비엘을 제 성역에 초대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영원히.”

마법사는 다시금 지팡이를 입에 물었다.

“그건 조금 과한 게 아닐까? 명천, 너는 기둥인 나조차 꺾었잖아. 좀 더 스스로를 믿어보는 건 어떠니?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무서우니까요.”

단호하면서도 솔직하게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야 저는 강합니다. 분명히 말해 저보다 강한 사람은 탑 전체에서도 손에 꼽겠지요.”

“하지만, 라비엘은 저의 [예외]입니다.”

아무리 내가 그러지 말자 다짐한들 얼마나 갈까.

라비엘을 여기에 초대하면, 라비엘과 함께 이곳을 거닐면, 무의식 중에라도 나는 여기 심은 꽃들을 진귀한 전시품 취급할지 몰라.

그건 정말,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 유혹을 가까이 둔 채 버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할 일 아닐까? 참된 신앙이 발현하는 것은 시련 속에서라는 말도 있잖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련이겠지요. 할 수 없는 일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예요.”

“흐응.”

태고의 지팡이가 혀를 찼다.

[안 통하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그 모습을 나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법사님. 당신은 진짜, 진짜 마법사네요.”

“어머. 뜬금없이 칭찬해주는 거니?”

“무티아는 신의 삶에 예외란 없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탑주는 성좌가 되면 영원을 감당해야 한다면서, 그러니 스킬 셋에 자물쇠 달기 전에 몇 번이나 숙고하라고 말했고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해지지요. 제가 아직 경력이 얕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힘으로 깨져서 타천한 성좌보다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해 타천하는 성좌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황에서 교묘한 유혹으로 타천의 덫을 놓으려 하시다니. 참 트루 위저드 인정합니다.”

“응, 역시 칭찬이구나.”

“사실 별로 교묘한 유혹도 아니었어요. 너무 대놓고 던졌잖아요. 뭐하자는 겁니까?”

나는 태고의 지팡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탑을 오르는 걸 포기하거나 도중에 실패하면 기둥 직을 돌려받게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러신 겁니까? 그렇게라도 패자 부활전 하고 싶으신 거예요?”

태고의 지팡이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법사님께서는 기둥씩이나 해먹었으면서 노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인배가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소인배가 지금까지 기둥으로 있었다니 다른 기둥들의 수준도 알 만하며, 그런 기둥들이 떠받쳐온 탑의 수준도 알 만하다는 게 되겠고요. 그치만 그런 걸 바라진 않으실 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탑의 기둥이었으니까.”

나는 말했다.

“그만한 품위는 가지고 있어야만 하니까.”

태고의 지팡이는 지팡이를 소매로 문질러 닦으면서 싱긋 웃었다.

“결국은 칭찬이구나. 나를 기둥에서 밀어낸 장본인이 그렇게 말해주니 나쁘진 않은걸.”

“왜 그러신 겁니까?”

“나는 당신이 100층에 오르기를 바래.”

태고의 지팡이가 말했다.

“검제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당신이 정식으로 기둥이 되기를 바라며, 다른 기둥들이 그걸 막아서지 않기를 바래.”

“그러면 왜….”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보가 아니어야 하니까.”

많은 함의를 갖는 말이었다.

태고의 지팡이는 소매를 팔락이면서 말을 이었다.

“하물며 이렇게나 뻔히 내다 보이는 돌부리라면, 그것이 얼마나 금붙이처럼 반짝이더라도 피해주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100층에 오를 수 없을 테니, 하는 말은 거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땅의 높낮이가 있고 파도의 찰랑임이 있으며 공기의 온도차가 있는 이곳에서 멈추어 있는 것은 오직 꽃들 뿐이었다. 불어온 바람이 붉은 수면을 쓰다듬고 그 물내음을 꽃잎에 적시는 소리를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말했다.

“왜 제가 100층에 오르길 바라세요?”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구나.”

태고의 지팡이는 부러진 지팡이를 두 쪽 다 입에 머금었다. 절반 분지른 빼빼로를 오물거리는 것처럼.

“첫째는 알기 쉬운 이유. 날 이긴 녀석이 100층에 오르지도 못한 채 패배하면, 으음. 그건 과연 좀 쪽팔리지 않겠니? 기둥이랑 성좌들 사이에서 얼마나 뒷담화가 돌겠니. 그런 상황에서 업무 복귀하면, 으음. 그건 하루하루가 기수열외 당한 마탑 지부장 같지 않겠니?”

“기둥들 사이에서도 뒷담화가 도냐고 물어야 할지, 마탑에도 기수열외 같은 게 있는지 물어봐야 할지 고민되네요….”

“성좌도 다 똑같네요 하고 말한 건 너잖니. 기둥이나 마법사라고 무엇이 다를까.”

태고의 지팡이는 지팡이 하나를 입술에서 빼냈다.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지팡이의 끝자락이 내가 심은 꽃들을 가리켰다.

“둘째는 저 아이들을 위해서.”

"......."

“나보다는 네가 기둥으로 있는 것이 저 아이들에게. 그리하여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태고의 지팡이의 언동에는, 거듭, 늘 마법사와 같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속임수. 비밀. 언외언.

그냥 툭 던지는 말 속에도 뼈가, 최소한 잔가시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방금의 말은 순했다. 갓 이가 난 아이를 위해 조심스레 발라낸 생선 살점처럼 씹지 않도 삼켜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에는 그냥 대놓고 말해버리는 편이었다.

“당신도 나름 노력했어요.”

“혹시 그거 위로라고 한 거니? 율무차 새로 타와서 니 콧구멍 속에 쏟아 넣고 싶어지는데.”

“그러게요. 음. …세 번째 이유는요?”

“탑주를 위해서.”

그 말 또한 더없이 순했다.

순한 얼굴과 연한 목소리로 마법사는 말하였다.

“내게는 불가능했어. 지금 있는 기둥들에게도 불가능하겠지.”

공녀가 내게 암시했던 것과 같은 이유.

처음부터 내게 눈독을 들였던 이유를, 마법사는 선하게 말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가 할 수밖에 없어.”

“당신이 되든. 검제가 되든. 아예 다른 이가 되든. 기둥이 아닌 누군가가. 하지만 되도록 당신이."

마법사의 입술이 다물렸다가 벌어졌다.

“나는 당신이---."

탑주를 편히 해주기를, 바래, 라고.

태고의 지팡이의 목소리는 잎새처럼 가볍게, 이 헤진 꽃잎들의 화원에 내려앉았다.

7.

집들이를 했다.

가신들을 불렀다. 라비엘은 부르지 않았다.

후자에 대해서는 더 할 이야기가 없다. 태고의 지팡이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전부다. 이 정원은 꽃들이 주인인 장소이며, 관람객을 받지 않는 화원이다.

“장차 [문상객]을 받을 수는 있어.”

내가 말했다.

“이 아이들 가운데 혹시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이 아이들이 그들과 재회를 하고 싶다면, 재회를 하게 해주어야겠지.”

“과연. 그래서 문상객입니까.”

한 차례 더 울어 바다의 수위를 높인 에스델이 실비아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종의 공동묘지… 아니. 재활병원이 더 가깝겠군요. 문상객보다는 문병객이 더 올바른 말이겠습니다.”

“아. 확실히.”

“하지만 재활병원이 문병객을 받기 위해서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공익 근무요원들이 필요합니다.”

에스델은 실비아의 손수건에 코를 풀면서 말을 이었다.

“역시 여기서는 제가 간호부장… 즉 [정원사]의 역할을 맡겠습니다. 얼마 전 말씀드렸듯 정원사들은 자신이 수호하는 화원에서라면 가주님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강함을 발휘하며….”

“실비아. 참고로 얘는 자기가 이렇게 된 원인을 너한테 돌리고 있단다.”

“말도 안 돼요!”

엄지와 검지만 써서 손수건을 받아 들던 실비아가 말 그대로 극혐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진짜진짜 진---짜로 말도 안 된다고요! 자문사는 좀! 원래부터가! 뭔가가! 좀 이상했어요!”

“시종장. 맞을래요?”

“바로 이렇게 폭력을 휘두르려 든다고요! 자문사. 댁 명색이 자문사란 양반이 정치적 해법을 어떻게 물리적인 것밖에 모르나요?”

“모든 전쟁은 본디 정치적 해법의 연장선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물리적인 것이고요. 즉…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니가 처맞는 말이요!”

“질량과 속도는 바릅니다. 방향이 좀 그릇되었군요.”

잠시 실비아가 망치를, 에스델이 대검을 휘둘러 서로의 대가리를 노리는 시간이 있었다.

우부르카가 자기 피부만큼이나 새하얀 솔트-바닐라 팝콘을 으적거리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거. 애비여. 안 말려도 되냐?”

“아들아. 나한테 묻기 전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할 생각은 없는 것이냐?”

“애비여. 애비가 없는 동안 내가 줄곧 해온 일이 뭐라고 생각하나? 우고르. 집 비운 동안 내가 하던 개고생을 이제 애비도 할 때가 된 것이다.”

“집들이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내 가정은 붕괴되어 있었구나.”

나는 길게 한탄했다.

아. 한탄했을 뿐 딱히 실비아와 에스델은 말리지 않았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법이지.

둘이 그러게 냅두고 나서,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원장님. 김율 씨.”

말했다.

“이 화원의 관리를 맡아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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