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 썩은 꽃들의 정원사. (4) >
8.
이 화원의 관리를 맡아 달라.
그런 내 말에 처음 반응한 것은 원장님도, 김율 씨도 아니었다. 실비아의 망치를 모로 쳐낸 에스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가주님, 불가합니다!”
나는 에스델을 바라보았다. 내 가문의 자문사는 곧바로 자문을 내놓았다.
“먼저, 가영에겐 앞서 주어진 일이 있습니다. 방구석 도서관장은 가영이 사서 일을 하길 바라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요즈음 가영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 방구석 도서관장이 불만을 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영의 주거를 완전히 이동시킨다는 것은 방구석 도서관장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실비아가 놀랐다.
“아니 뭐예요? 왜 갑자기 자문사 같은 소리를 하나요?”
“그야 저는 자문사니까요. 당신은 시종장이니까 청소와 요리와 차 달이기를 하는 거고.”
“가문을 청소하는 게 시종장의 일이라면 당신을 청소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정화하는 것이겠지요. 삼켜드릴까요?”
둘이 다시금 서로의 킬 각을 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빠르게 말했다.
“자문사의 말은 생각할 가치가 있어. 내가 잘 아는 누군가도 성좌가 독을 품으면 별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고 했었거든.”
배후령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에스델은 턱을 짚은 채 한숨을 지었다.
“예, 엄밀히 말해 방구석 도서관장은 더 이상 성좌가 아니긴 합니다만….”
“여전히 주의와 배려가 필요한 이들 중 한 명이지. 굳이 그런 위험 방지 차원이 아니라도 내가 책임져야 할 양반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바로 이 다음에 처리하자. 다음으로 걸리는 부분은?”
“……가영에겐 몰라도 가주님의 원로님께는 짐이 좀 무겁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원장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눌린 자국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원장님은 말했다.
“공자야. 나는 약하단다. 오러인지 강기인지 하는 무협 기술도 쓰지 못하고 마법도 못 쓰지. 내가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칼은 부엌칼 뿐이야.”
“사실 그마저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는 하셨죠.”
내가 말했다.
원장님은 살짝 웃더니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맞아. 날붙이는 내게 늘 다루기 힘든 것이었지. 숟가락의 옆면 정도가 그나마 부담없이 다룰 수 있는 한계였어.”
“비벼 주신 밥도 갉아 주신 사과도 맛있었어요.”
“고맙구나. ……하지만 네 집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그게 아니지 않겠니.”
원장님의 목소리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그 누름돌이 묵직한 무력감임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원장님은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지켜보셨으니까.’
당장 이 세계에 처음 심긴 꽃 역시 그 분이 지킬 수 없었던 벗이었다.
또한 이 세계의 주인인 나는 한 때 원장님이 지켜주어야 했던 아이였다. 그런 나를 노리는 적들이 많았다. 성좌들이나 기둥들, 다른 세계의 헌터들을 꼽지 않는다 해도, 탑 1층의 언론사 중 상당수는 손을 잡고 날 두드려 대고 있었다.
언젠가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었듯 그것은 필요한 일이다. 탑주의 말에 동감하는 부분이 단 한 군데 있다면, 손가락질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이었다.
탑주는 스스로 원하여, 또한 필요하여 그런 손가락질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공녀는, 기둥들은 그런 탑주를 보면서 가슴이 아프겠지.
비슷한 일이 원장님께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너는 너로서 네 책임을 지고 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도, 매일 아침 나에 대한 비판 기사를 읽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렇게 딱 떨어질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부터 하기로 했다.
“원장님. 저는 괜찮아요.”
원장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검을 쓰지 못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원장님께 바라는 것은 폭력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반대.
원장님이 늘 그것과 거리를 두길 나는 바란다.
“원장님께서 검을 쥐실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나는 그 말을 실천에 옮겼다.
우선 김율을 바라보았다.
“김율 씨.”
김율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벤 이래 그 눈동자에 비치는 세계의 물상은 한 층 또렷해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세계를 향해서 나는 말했다.
“원장님을, 그리고 이 화원을 지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최선을 다해서.”
김율은 곧바로 말했다.
자신이었던 은방울꽃을 내려다보고, 그 은방울꽃 너머에 선 벗을 향해 김율은 선언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것이다.”
“예."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성검을 들었다.
‘반짝아.’
아이김 제국에서 얻었던 이래 내내 손에서 잡고 놓지 않았던 여신의 성검을, 나는 화원 한복판에 박아 넣었다.
빛이 터졌다.
[수호의 여신이 현현합니다!]
수호의 여신, 휘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졌다. 녹슨 노을들이 바람에 휘감긴 것처럼 짤랑이면서 이 화원 전체를 희붉게 물들였다.
"휘야."
꽃은 썩었다 해도 꽃이었다. 붉은 빛이 대세를 점하였다 해도, 애초에 꽃이 만발한 이 세계에 색채는 끝부터 끝까지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그 명도는 빈곤했다. 모든 꽃잎들은 색이 바랬거나, 물이 빠졌거나, 엷게 떠있었다. 그런 곳에 빛이 들어찬 것이다. 새하얀 광휘로 코팅된 꽃잎들은 하나하나가 선명해졌다. 꽃들은, 반짝임이 아니라 깜빡임으로서 이 세계에 존재했다.
“예, 용사님.”
“네게도 이 화원의 관리를 맡기고 싶어. 김율 씨를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한 때 그녀가 소환하였으며, 그녀를 쥐고 휘둘렀던 인물을 가리키며 나는 말을 이었다.
“괜찮겠어?”
수호의 여신 휘야는 자신을 다섯 갈래로 찢어 봉인했던 옛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레판타 아이김에 대해 처음 언급이 나왔을 때 이미 그러했던 것처럼 그 눈길에는 원망이 없었다.
“예."
다만 걱정과 염려는 있었다.
그 둘을 동시에 담은 눈길이 김율을 쓸었다가 그대로 나를 향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쓰게 웃었다.
“아쉬울 거야.”
“예, 새로운 검을 구해야 하실 겁니다. 염두에 두신 검이….”
“있어. 하지만 단지 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까지 긴 시간,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휘야가 웃었다. 그 웃음은 밝고도 희었다.
“무슨 그런 거창한 말씀을.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걸요.”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면 괜찮아요. 저는 결국 지키는 자니까요.”
수호의 여신은 그야말로 여신답게 날개를 펼친 채 말했다.
“용사님의 집을 지키고 있을게요.”
휘야는 천천히 김율을 향해 돌아섰다. 차차 졸아든 날개의 빛은 어느덧 세상 전체를 넓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김율에게만 드리워졌다.
“새삼스럽지만, 잘 부탁드려요. 옛 용사님.”
스포트라이트를 처음 뒤집어쓴 초연 배우처럼, 김율이 주춤했다. 복잡한 표정이 잔물결처럼 그 얼굴에 퍼졌다가 가라앉았다.
“나야말로.”
원장님과 김율만큼이나, 김율과 휘야는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될 터였다. 휘야와 원장님 또한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그건 지금 이 순간이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다.
나는 에스델을 돌아보았다.
“자문사. 난 네게도 이곳의 경비를 맡기고 싶어.”
현현한 휘야를, 또한 김율만큼이나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던 에스델이 멈칫하여 나를 보았다.
“…저는.”
“왜? 정원사 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 자신이 수호하는 화원에서라면 나보다 더 강력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좀 많이 부끄러운 아이디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라이트노벨 독자층이 하나 줄었다. 포메라니안이 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 고개를 저어 자신에게 묻은 독사끼를 털어낸 에스델이 머뭇거렸다.
“저는… 여러가지 의미로 이 둘과는.”
“그렇기 때문이야.”
“그야 그렇겠지요. 가주님 입장에서는요. 하지만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십시오.”
레판타 아이김이 세웠던 제국과 원수를 지고, 수호의 여신이 수호하던 세계를 멸망시켰던 전직 마왕은 필사적이었다. 욕조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고양이도 이보다 더 바동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부탁할게.”
"......으."
에스델은 망설였다. 한숨을 지었다. 어깨를 움츠렸다. 이윽고 양 팔을 늘어뜨렸다.
“……차라리 명령을 해주신다면, 마음이라도 편하겠습니다만.”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예. 정원사. 다시 또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부끄럽진 않은 아이디어같기도 하고… 제가 돌보던 마을도 있는 만큼 휴가는 많이 잡겠습니다만, 음, 가문의 본거지에 자문사가 있어야하기도 하고… 뭐 아무튼간에요.”
에스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어 휘야와 김율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잘 부탁합니다.”
“어서 와요.”
휘야는 날개를 팔락이면서 환영인사를 밝혔다. 정말이지 반짝이는 여신이다.
레판타 아이김이 살천의 길을 걷기 시작할 적에 휘야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 옛 은혜 때문만은 아니었겠지. 그래서일까, 김율 역시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에스델을 환영했다.
그런 둘의 환영이 에스델을 더욱 몸 둘 바모르게 만들었나보다. 눈밭 위에 올려놓아진 뱀처럼 이리저리 몸을 틀던 에스델은 사냥감을 포착했다.
“당신도 오세요.”
마치 악역 영애같은 미소를 지은 채 에스델을 바라보던 실비아가 깜짝 놀랐다.
“엑. 저도요? 이… 뭔지 모를, 거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SAN치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갈 것 같은 곳에 있으라고요?”
“그럼 시종장이 가문의 저택을 지키지 않고 어디에 있으라는 겁니까?”
“어… 제게는 은백합 공작을 위해 차를 달여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이….”
“제가 한 번 의견을 물어볼까요? 자신을 위해 차를 달이는 것. 이 화원을 청소하는 것. 둘 중 무엇이 은백합 공작은 더 바랄까요? 보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둘 중 무엇이 더 당신이 엿먹는 것 같은 느낌일까요?”
“이런 빌어먹을….”
실비아가 탄식했다.
에스델은 대검을 어깨에 올린 채 턱을 치켜세웠다.
“그래도 꽃의 이름을 받은 영애였잖습니까. 그렇다면 화원에 있는 게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실비아가 읏 소리를 냈다. 이어 짓씹듯 내뱉었다.
“……옛 이야기입니다만.”
“심지어 썩기까지 했으니 이만큼 더 어울리는 곳도 없겠지요. 오십시오.”
"젠장......."
실비아는 결국 항복했다. 터덜터덜 걸어서 에스델의 곁에 선 그녀는 정말 이 세계에 돋아난 꽃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오케이.
그제야 나는 다시금 원장님을 돌아보았다.
“보다시피, 칼은 다른 이들이 들게 될 거예요.”
"......."
“여기에 있는 건 모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예요.”
꽃들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휘야를 제외하면, 김율도, 에스델도, 실비아도, 그 밖에 여기에 오게 될 사왕가의 사람들 모두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림자는 상처의 깊이만큼 깊어지는 법이고, 세상에 다친 자들만이 자신 안에 그림자의 교리를 깊이 새길 수 있기에 그러했다.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마천의 소교주로서 말했다.
“그건 원장님께서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원장님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 대답 또한, 벗을 닮아 길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보마.”
그렇게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 당신의 세계에 대리인들이 부임합니다. ]
조용히, 선고가 울려 퍼졌다.
[ 89층이 클리어됩니다! ]
이곳은,
녹이 슨 노을이 붉은 바다 위에 드리우는 곳.
꿀벌을 유혹하는데 지쳐버린 꽃잎들이
애초에 그런 재주를 갖지 못한 풀잎들이
그 잎새를 늘어뜨린 채 잠에 드는 곳.
수호의 여신과 가을비의 마왕이 지키는 땅.
나의 은사님과 그 벗이 가꾸는 정원.
나의 가문이 자리하게 될 안식처.
[ 썩은 꽃들의 화원(病花圍)은 이제부터 비명을 모으는 하늘의 성역입니다. ]
[ 당신들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
그리고, 90층으로 향하는 길이 내 세계에 드리웠다.
9.
언제나처럼, 이 이야기에도 후일담이 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정말 너무하지 않소이까!”
방구석 도서관장이 나비가 날개짓하듯 소매를 퍼덕거렸다.
“본좌는 반대하오! 단호히 반대하오! 김율이 가버리면 대체 책들은 누가 돌본단 말이외까! 본좌도 가겠소! 가고야 말 것이오!”
“세상에! 관장님이 파닥거리고 계셔!”
“비켜! 이번에는 내가 제일 앞에서 찍을 거야!”
그런 방구석 도서관장 곁에는 50층에서 내려왔던 보조 작가를 비롯한 도서관장의 스토커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개판이군.
그 개판에 시바견 한 마리를 더하려는지 플라네타리움 점장을 맡고 있는 약왕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소란 피울 거면 나가서 해! 영업 방해도 정도껏이지!”
“죄송합니다아….”
“하여간 젊은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깐. 에잉. 어쩜 그렇게 나 젊을 때랑 쏙 빼다 박아서는….”
“근데 몇 번이나 말하지만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님보다 어린 사람 한 명도 없거든요? 슬슬 대가리에 그 정보 인풋 좀 하면 어떠냐?”
그렇게 도서관장의 스토커들이 약왕과 마주 보면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여기서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방구석 도서관장은 스토커들을 밀어놓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비통한 눈길이었다.
“보시오. 이 비참한 몰골을 보시오. 당신이 본좌를 대체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좀 보란 말이오.”
“엄밀히 말하면 너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
하무스트라는 내 반말을 들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나로서는 내게 유수하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는 게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은데, 하무스트라는 벌써 기분이 좀 풀렸는지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으흠. 뭐 그렇기는 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김율까지 빼앗아가는 것은 너무하지 않소이까….”
“걱정하지 마.”
나는 하무스트라의 프라푸치노를 저어서 건네주면서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너는 김율 씨를 사서로 쓰고 싶은 게 아니잖아. 김율 씨와 함께 있고 싶은 거지.”
“그야 그렇소만… 음… 음음? 아하, 과연. 본좌도 그 화원의 정원사 중 하나로---”
“아니, 그건 안 되고.”
꽃들이 전시품으로 전락할까 두려워 라비엘조차 들이지 않겠다는 나다. 이 관음증 환자를 내 성역에 들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그러면…?”
“내 성역으로 통하는 길을 이 도서관에도 놓으려고 하거든.”
나는 생각해둔 구도를 간단히 전달했다. 짬 높은 성좌로서 탑에서 층을 좀 갖고 놀아보았던 도서관장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즉… 이곳을 일종의 구내식당 역할로 삼겠다는 말이오?”
“정확히는 휴게실.”
요컨대 빌딩을 짜맞추는 것과 비슷했다.
그 건축도 안에서 나의 성역은 옥상에 차려진 화원이 된다. 본디 내가 주인으로 있던 20층, 에스델이 거주하던 낙원이며 스승님의 묘가 자리잡은 22층 등은 그 옥상까지 가는 길에 들어선 층들이 되는 거다.
탑 안의 탑.
그리하여 이 플라네타리움, 방구석 도서관장이 거하는 곳은 정원사들과 문병객들이 심신을 쉴 수 있는 휴게실로 기능하는 것이다.
“으음… 뭐 그렇다면야.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볼 수 있겠군.”
“응. 나쁘지 않지?”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소만은… 알겠소.”
방구석 도서관장은 내 목에 둘린 여우님을 다소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건넨 프라푸치노를 빨대로 쪼읍 빨아먹으면서 말이 없던 하무스트라는, 문득, 그런 느낌으로 질문했다.
“당신은 대체 왜 탑을 오르시오?”
돌연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80층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의아하게 여기던 일이기는 하오."
"......."
“김공자. 당신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증명했소. 완전한 성좌로서 거듭나 당신의 탑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부조리를 당신 보시기에 좋게끔 바로잡았지.”
방구석 도서관장은 양 손바닥 위에 턱을 얹어 놓고는 날 물끄럼 바라보았다.
“보통 그런 위치에 선 성좌가 무엇을 하는지 아시오?”
“더 도전하지 않는다?”
“그렇소. 이 때부터는 되도록 안전하게 신도를 모으고 성력을 늘리며 아이템을 수집하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지. 그 와중에 만만해 보이는 다른 세계가 보이거든 약탈전 뛰기도 하고.”
방구석 도서관장은 빨대로 프라푸치노를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이제 더 뛸 컨텐츠가 없다 싶거나, 더는 셋방 살이가 싫다 느낀 자들만이 제 집 장만에 나서지. 81층부터 90층에 오르면서 성역을 만드는 것이오.”
“과연.”
“그렇소. 오성급 성좌와 일반 성좌의 차이는 딱 그 정도. 단지 그 정도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꼭 자기 집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소?”
방구석 도서관장의 신자들과 약왕이 다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무스트라는 그들을 흘끗했다가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츄리닝 차려입고 감자튀김을 쉐이크에 찍어 먹은 뒤 손가락을 쭙쭙 빠는 생활을 2천만년 정도 보낸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을 거요. 그런데 구태여 도전하다니. 듣자하니 그 탓에 또 죽을 뻔, 아니, 죽는 것보다 나쁜 처지에 처할 뻔했다면서? 그런 위험을 무릅 쓸 가치가 있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방구석 도서관장은 내 눈동자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기둥이 되기 위해서요?”
“그 말은 또 누구한테서 들은 거야…?”
“아직 끈들이 여럿 남아 있어서 세상사는 대충 전해듣는다오. 귀찮은 일이오만… 아무튼 그래서요? 아니면.”
탑주를 위해서냐는 말은 과연 방구석 도서관장 역시 입 안에 숨겨두었다.
내가 말했다.
“네가 보기에, 탑을 오르지 않는 나야말로 나답지 않지 않을까?”
“그야 캐릭터를 파는 입장에서야 당신이 탑을 올라주는 게 좋지. 하지만 팬심과 현실은 다른 거니까.”
담담하게 말하더니, 방구석 도서관장은 아, 하고는 양 손으로 뺨을 짚었다.
“음음. 물론 여기서 당신이, [바로 너를 위해서… 나의 팬인 널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나는, 탑을 오르기로 한 거야…!] 라고 말해준다면 본좌는 아주 기뻐 까무라치고 말 것이외만---”
“어떤 사람이랑 약속했거든.”
방구석 도서관장이 멈칫했다.
나는 그를 향해서 말했다.
“탑을 오르기로.”
"......."
“내 책을 주의 깊게 읽었다니까, 그게 누구와 한 약속인진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구석 도서관장은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는 그에겐 결코 보이지 않을, 그러나 분명히 내 곁에 존재하는 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과연.”
탄식하듯, 하무스트라가 되뇌었다.
“과연, 그러한 것이었구료.”
그렇다.
“자."
나는 돌아섰다.
휘야가 없어진 허리춤은 내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단도 하나만 매여 있어 허전했고, 그만큼 홀가분했다.
“갈까요.”
-그래.
그 청테이프 휘감긴 단도만 갖고 있을 무렵부터 내게 검을 가르쳐주었던 사내가 그런 내 말을 받았다.
-가자.
다음에 발을 딛게 될 곳은 90층.
최정상까지는 앞으로 10층.
그리고, 검제가 좌절했던 영역까지는 앞으로 9층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