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87화 (387/400)

387화.  < 시간의 정원. (3) >

6.

썩은 꽃들의 화원을 나와 검제는 천천히 거닐었다.

점점이 내리는 노을 아래, 죽은 자들이 꽃처럼 잠든 곳에서 검제는 이렇게 말했다.

- 잘 만들었다.

나는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그런 서두를 던지냐고 대거리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 고맙습니다.

검제는 왜 그리 순순하냐, 이 새끼 뭐 잘못 먹었냐 하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 흙들마저 죽어 있다는 게 좋구나.

- .......

- 강기를 깨우친 날에, 손바닥에 흙 알갱이 한 알을 올려 관찰한 일이 있다. 눈과 귀에 기를 집중시켜 들여다보니 흙이란 게 조용한 듯 하면서도 참 소란스러운 녀석이더라. 그 자그마한 알갱이 하나 위에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부지런히 각축을 벌이고 앉았는지.

검제는 허리를 수그려 손끝으로 썩은 흙바닥을 쓰다듬었다.

그 손끝은 물론 흙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지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흙 알갱이를 흐트러뜨려 마치 검제의 손길에 땅바닥이 어루만져진 것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 그때까지 보고 들었던 것들보다 그 날 보고 들은 것들이 더 많았다.

- .......

- 하지만 여기에 있는 흙들은 참 조용해. 그리고 그 정적이야말로 여기 있는 꽃들에게 필요한 것이겠지.

검제는 허리를 편 채 나를 돌아보았다.

- 심지어 조금 전 그런 진정한 고요함을 느끼기 전에, 공자 네가 이미 이런 곳을 만들었다는 것이 나는 참 감탄스럽구나.

나는 이번 역시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잠자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을 뿐.

- 고맙습니다.

- 그래.

우리는 잠시간 또 말없이 걸었다.

지금 우리가 거닐고 있는 곳은 통칭 [여름 구역]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흘린 숨처럼 미적지근한 공기가 흐르는 곳에서, 두 손을 맞잡은 에스델이 비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 또한 좋구나.

-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기 시작하는 에스델의 곁을 지나면서 검제는 말했다.

- 공자야.

- 예.

- 네가 99층에 오르지 못하면 언젠가 마르쿠스 영감이 대신 오를 거라는 말 한 적 있지?

물론 나는 그 말을 기억했다.

- 그때 내가 뭐라고 덧붙였는지도 기억하냐?

당연히 기억했다.

- 대신, 이라는 말도 웃기다고 했었지요. 영감님은 제 대신이 아니라고요.

검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에도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너도 알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나는 덧붙였었다.

그랬다.

- 그래서.

검제가 물었다.

- 내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던 거라고 생각하냐?

- 안 그래도 여러 차례 생각해보았던 화두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답은 쉬이 흘러나왔다.

- 단순히 그만큼 나를 믿으니 힘내라는 격려? 아니면 검성 어르신이 나보다 더 잘해줄 테니 힘들면 그만 쉬어도 된다는 배려?

- 어느 쪽도 아니었겠지요.

나는 검제와 나란히 걸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나의 걸음도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만큼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 왜냐하면 저는 그 다음에 당신이 무슨 말을 덧붙였는지도 기억하니까요.

[ 까놓고 말해서, 너 실패해도 돼. ]

[ ……. ]

[ 믿음이란 건 서로가 최선을 다해줄 거라는 생각이야. 그리고 최선이란 건, 상대방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하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서로 신뢰하는 관계란 건 각자가 각자의 최선을 결정하며, 그 결정을 서로 받아들이는 사이를 뜻한다. 그뿐이고. 그뿐이지 ]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패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 저를 믿는다고 말한 직후, 당신이 저한테 [믿음]이 뭘 뜻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었다.

-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런 의미였겠지요.

- 제가 이 시련을 이겨내든. 실패하여 영원한 사막의 죄수가 되든. 검성 어르신이 그런 제 마음을 짊어지고 99층에 오르든. 아니면 그 분 역시 불의의 사고를 만나 불귀의 객이 되시든. 정말로 어느 쪽이어도 상관이 없어서 당신은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검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천 세계에서처럼 그의 걸음은 오히려 점점 더 빨라졌다.

하지만 그를 따라잡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어야 했던 그 때와 달리, 나는 그의 곁을 따라붙은 채 나의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 그리고 그건 당신이 저를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검성 어르신을 믿지 않아서도 아니예요.

그렇게 나는 말을 이어갔다.

- 당신은 저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당신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탑으로 들어온 어떤 노인을 믿는다.

- 당신은 검성 어르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젊은 나이를 탑으로 도망쳐와 탑 1층의 골목에서 홀로 숨죽여 사는 한 백수를 믿는다.

- 당신은 잿빛 거미를 믿고.

다시 그만큼이나, 마탑에게 짓밟히던 레지스탕스들을 믿을 것이며.

- 당신은 보조 작가를 믿어요.

또 다시 그만큼이나, 놀랍게도, 마탑의 레지스탕스들을 괴롭히고 마탑에게 불만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권력욕을 채워가던 소악당을, 차루무 같은 아이마저 당신은 믿을 것이다.

- 당신은 자신이 잘났다고 말하고는 하지요. 가끔 확 때리고 싶을 만큼 잘난체를 해요. 하지만 그런 당신의 잘난체는 염제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검제는 실제로 잘났고, 염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회귀 전의 염제도 분명히 잘난 인간이었다. 검제든 염제든, 또한 나조차,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해낼 수 있고 하겠다고 말한 것은 해낸다는 부분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 염제는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지요.

- 나만이 가능하다. 나 혼자 특별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그러니까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처럼은 할 수 없다… 그것이 염제를 염제로 만드는 원동력이었어요.

나는 검제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당신은, 검제 양반. 어느 쪽인가 하면, [자신 또한 특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 자신도 가능하다. 자신은 특별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을 남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하므로.

- 당신은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신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제가 아니면 검성 어르신이. 검성 어르신조차 실패하면 아나스타사나, 잿빛 거미가, 그들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누구나 아는 사람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어쨌든 언젠가는 99층에 오를 거라고 당신은 믿고 있어요.

-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다.

나와 검제는 에스델을 지나친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이 후화원을 거닐었다.

들 위를. 산 위를.

바다 위를.

- 될 놈이 된다, 안 될 놈은 안 된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 짧게 살면서 멀리 내다보지 못할 때나 할 수 있는 말들이지.

그리하여 저 멀리. 붉은 비가 내리는 땅을, 우리는 앞두고 있었다.

- [저 사람은 할 수 있었지만 당신은 안 됩니다]가 말이 안 된다면, 당연히 그 반대, [내가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이 안 되는 것이잖냐.

그렇다. 어느덧 우리 둘은 이 세계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이었다.

- 그게 공정한 태도지.

빗방울을 나와 검제를 뚫고 지나가면서 바닥을 두드렸다.

- 실제로 네가 그렇지 않더냐.

그 붉음, 이름 없는 죽음들에 대한 진혼을 나는 바라보았다.

진정한 의미로 [본다]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너무도 선명하게 들어오는 그 풍경 속에서, 비는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아래로부터 위로 서서히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 공자 너는 이따금 그 골방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지. 그러면서 말하고는 하지.

[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

- 다른 사람들도, 유수하란 놈 신문 스크랩 오려 붙이던 시절의 너를 보았다면 혀를 차면서 그렇게 말했겠지.

[ 뭐 저런 병신이 다 있나. ]

[ 저런 놈은 뭘 해도 안 돼. ]

[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

- 하지만.

빗속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들어선 듯한 감각.

공기와 물의 위치가 뒤바뀌어, 붉은 기포들이 우리 둘 주변에 보글, 보글, 무한히 터져 오르는 속에서 검제는 말했다.

- 그러던 네가 지금 여기에 있다.

두근, 하고.

심장이 울었다.

- 사람은 변한다. 자그마한 계기만 주어져도 달라져. 하루를 되돌아갈 때마다 네가 증명해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 않냐.

마치 어릴 적, 원장님께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을 때처럼.

- 그 뿐이었을까, 천 년을 변하지 않고 살아가던 잿빛 거미도 변했지.

- .......

- 네 덕분에? 물론 그렇다. 하지만 네게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그것은 순수하게 칭찬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악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흔한 꼰대 질처럼 너는 대체 왜 나처럼 못하냐는 다그침으로 볼 수도 있었고, 그러니 역설적으로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선언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검제가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 아마도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탑에 들어와 받은 스킬이 이거였을 거다.

악의가 없을 적에, 어떠한 저의도 깃들지 않아 말이 순수하게 말로서 기능할 적에, 검제의 말은 정확히 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어서.

- 스킬 카드 오픈.

검제가 손을 들었다. 헤진 도포자락 안에서 스킬 카드가 하나 흘러나왔다.

그 스킬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나처럼 될 수 있다]

랭크: F

효과: 당신은 당신의 상대가 가진 모든 스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단, 당신에게 패배한 적은 당신의 스킬 중 1개를 복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1번 당신에게 패했던 상대는 이 스킬 효과에서 제외됩니다. 또한 어떤 스킬이 복사될 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

나는 홀린 듯 한 손을 들었다.

- 스킬 카드 오픈.

내가 처음 가졌던 스킬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

[너처럼 되고 싶다]

랭크: S+

효과: 적에게 죽으면 자동으로 발동. 당신을 죽인 적의 스킬 중 1개를 복사하여, 당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이미 1번 복사한 상대를 다시 복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스킬을 복사할지는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단, 죽습니다!

+

두 개의 카드가 맞닿았다.

F급 스킬과 S+급 스킬. 두 개의 스킬이 마치 맞거울처럼 서로를 되비쳤다.

두 개의 스킬 사이에 놓인 닮은 꼴의 세계 속에 나와 검제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 검제.

- 응.

- 당신의 성역은 어떤 곳입니까?

나는 나의 성역에 서서 말했다.

- 살천성에게조차 성역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99층에 있다는 건, 당신도 성역을 만들었다는 거겠지요. 저는….

나는.

- 저는 당신의 성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 흠.

검제는 한 손을 들었다.

도포 자락이 나폴, 흔들렸다. 그리고.

- 아.

눈 앞에 세계가 펼쳐졌다.

■.

볕이 옅은 숲속에서 나팔꽃은 목을 더 길게 뻗어냈다

절반의 크기로, 절반의 머리를 수그리며, 다시 절반의 크기로, 나팔꽃의 英冠은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새벽은 오전으로 오전에서 대낮으로 대낮에서 저녁으로 태양이 죽어가는 노을에서

태양이 지쳐

下棺한 밤으로 비가 드문 황야에서 해바라기는 꽃방울을 더 활짝 펼쳐냈고 아

볕이 옅은 곳에 비가 드문 그 계절에 그저 피어나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의 꽃들과 꽃들의 사람들과 품으려던 천만 송이의 꽃과 품을 수 있었던 천만 송이의 꽃과 품기 위하였던 천만 송이의 꽃이

나팔꽃 팽이꽃 서리꽃 작약꽃 장미꽃 불두꽃이

세계가

가부좌를 튼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

헤진 도포를 차려 입은 남자였다.

가부좌를 튼 채, 옆에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검을 바닥에, 수억 송이의 꽃이 만발한 꽃밭에 꽂아 놓은 채,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나는 잘 알았다---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았다. 보아왔다.

수도 없이, 그러나,

반 투명하지 않은 그 남자를, 나는 지금 처음으로 본 것이다.

검제.

라고, 내가 말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았다. 볼 수 있었다.

그가 보여주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남자가---검제가, 눈을 뜨지 않은 채 , 눈 감은 채, 그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와라. 김공자.”

나는 그렇게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여기에서.”

99층에서.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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