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 그가 기다린 시간, 그가 걸어온 시간. (3) >
위대한 참격들은 모두 합해 네 차례 그 세계를 수놓았다.
세 번째 참격에서 마침내 [사람]이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세 번째 참격이 벌어진 순간을 두고 [검의 날]이라 이름 지었다.
네 번째 참격에서 [전체가 하나의 무리]였던 [사람]은 무수한 [종족]으로, [나라]로, [도시]로, [마을]로, [씨족]으로, [가족]으로 갈라지다가, 이윽고 [개인]이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네 번째 참격이 벌어진 순간을 두고 [검의 시]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검의 해와 구분짓기 위해 도끼의 해, 창의 해, 활의 해 등이 만들어졌다.
검의 달과 구분하기 위해 갑옷의 달, 방패의 달, 팔찌의 달 등이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검의 날과 구분하기 위해서, 검의 시와 구분하기 위해서 무수한 날과 시들이 만들어졌으며, 다시 그것들을 쪼개어 무수한 분과 무수한 초가 만들어졌다.
시간을 잘게 다지는 이러한 명명들을 두고 다섯 번째 참격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의 지지는 얻지 못하였다. 그러든 말든, 조각난 시각들은 각자의 절기를 갖고서 돌고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의 해, 검의 달, 검의 날, 검의 시, 검의 분, 검의 초가 톱니바퀴처럼 딱 맞물리는 순간이 왔다.
그가 벼려진 순간이기도 했다.
3.
신전이란 대개 그 세계의 섭리를 규정하는 신이 거하는 본당이다. 또는 쫓겨난 신들이 그렇게 맹위를 떨치는 다른 신들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신전은 둘 중의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 신전은 그 신의 껍데기였다.
깡!
폐허.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해질 만큼 오래된 시간 동안 거듭된 톱니바퀴의 흐름 속에, 이윽고 도래한 영원한 겨울 속에서, 그 신전은 그저 벗어 던질 수도 없어 살 위에 뜬 채로 썩어가는 허물이나 다름없었다.
깡
깡
깡
그 껍데기 속에서, 단단한 두 개의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깡!
그 중 한 쪽은 자그마한 주먹이었다.
세상을 움켜쥔 것처럼 꽉 다물린 주먹이, 그에 걸맞는 힘을 갖고서 내리꽂혔다. 깡…! 그때마다 하늘을 쪼개는 듯한 충격과 땅을 뒤흔드는 음파가 메아리쳤다.
깡!
다른 한 쪽은 금속질의 괴(鬼)였다
언뜻 그 금속 주괴는 펄펄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이나 붉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먹이 내리 꽂힐 때마다 주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불똥이 아닌 녹이었다. 끝자락부터 끝자락까지 녹이 슨 탓에 그토록 벌겋게 보인 것이었을 뿐.
깡!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소녀는 금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농도 짙은 벌꿀에 빗질을 한 것만 같은 끈덕한 색감이 아니었다. 도리어 접착제를 묻혀 비빈다고 해도 허공에 던지면 민들레 씨앗처럼 확 흩어져 따로따로 날아갈 것처럼 사락사락한 머리카락이었다.
깡……!
주먹질을 할 때마다 흔들리는 황금 밀밭의 틈새로는 태풍 후에 겨우 남은 허수아비와 같은 것이 둘 솟아 있었다.
그것들은 부러진 뿔이었다.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가장 옛 된 용제 중의 하나였으며, 가장 넓은 영토를 하늘에 새기고 있는 성좌 중의 하나였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 맞지?”
누군가가 소녀의 신명을 불렀다.
금속 괴를 향해 내리쳐지던 소녀의 주먹이 일순 멈추었다.
소녀는 흘끗, 시선만 돌렸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은 그만큼이나 틈이 많아, 앞머리에 뒤덮인 눈동자로도 소녀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부른 이를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독사인가.”
“그래, 댁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잉!? 어떻게 아는겨!?”
팔짱을 낀 채 신전 기둥에 기대어 소녀를 바라보던 회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깜짝 놀랐다.
깡!
페허를 추수하는 소, 무티아는 다시금 금속 주괴를 향해 주먹을 내리치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신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어… 성실함?”
갑작스러운 질문에 독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무티아는 다시 잠깐 주먹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신 노릇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다.”
“아, 내가 좀 고생했지… 아니, 이게 아니고….”
“신이란 곧 노예다.”
깡!
무티아는 재차 주먹으로 금속 괴를 내리쳤다.
“그러므로 좋은 신이란, 좋은 노예이다.”
“어…."
“그러니 탑주는 모두에게 있어 가장 좋은 신이겠지.”
깡!
금속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독사는 입을 다물었다. 탑주에 대한 것은 아직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화제였다.
무티아의 말이 이어졌다.
“나 또한 탑주만큼은 아니어도 좋은 신이다. 그리고 노예의 미덕은 성실함인 법.”
깡!
그 성실함을 아주 잠깐 잃고 방심하는 통에 나는 뿔을 잃었다.”
깡!
“그렇게 내 뿔을 자른 놈과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던, 그것도 그 놈에게 한 방 먹였던 자가 너다. 기억하고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으음… 영광이라고 해야할지, 그건 그것대로 열받는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독사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어 ‘뭐, 라이벌을 자처했던 입장 받아들여야할 일이겠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무티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안 물어봐?”
“네가 어련히 설명하지 않겠나. 말으로든, 몸으로든.”
“어, 그러기야 할 건데… 그래도 뭔가 지금 내 이름을 알아맞힌 것처럼, [---네가 여기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할 수도 있잖아.”
“내가 왜 내 패를 까보여야 하지?”
“아니, 좋은 노예라면서요….”
“노예의 미덕이란 성실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설픈 우쭐거림은 등신의 미덕이고.”
독사는 입을 다물었다. 무티아 또한 입을 다물었으므로, 잠시간 이 신의 허물 속에서는 깡, 깡! 신의 주먹이 금속괴를 내리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망설이던 독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망치라고 알아? 그거 쓰면 편할 텐데….”
말하면서 독사는 생각했다.
[ 망치? 그게 뭐지? ]
[ 아아, 이것은 ‘망치’라는 것이다… 금속을 쉽게 두드릴 수 있지. ]
[ 굉장해 독사 군…! 아아, 사자세계라는 곳은 어쩌면 이렇게 금속을 두드리는 것 하나에조차 압도적인 기술과 정성을 들이는 것인지...! ]
“독사. 지금 그건 나조차도 듣고 있기 너무 거지 같으니 좀 그만두면 안 되겠나?”
“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생각하고 있잖나.”
“아니… 생각이야 내 맘대로 할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이름 있는 성좌라도 방금 그거 프라이버시 침해… 음. 어쨌든. 망치라고 있는데….”
“이건,”
깡!
“내 뿔이다.”
깡!
“내 뿔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내 주먹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금속도 너무 무르니까.”
“과연.”
한 때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신으로서 대장장이 노릇을 해보았던 독사는 턱을 짚었다.
“음… 그렇게 녹이 슨 이유도….”
“내 뿔은 시간으로밖에 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불꽃도 너무 차갑다.”
“과연."
독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댁의 권능이라고 했지. 댁의 몸을 녹일 수 있는 것도 부술 수 있는 것도 댁 뿐이라는 건가."
“그렇다.”
“일리가 있어. 하지만 일리밖에 없고.”
독사가 팔짱을 끼었다.
“당신의 뿔을 잘라낸 건 김공자잖아.”
까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주먹에 얻어맞은 금속이 커다란 비명을 터뜨렸다.
그것은 단말마(斷未魔)였으며, 동시에 고고성(呱呱聲)이었다.
[ 축하드립니다! ]
평소 담담한 말투와는 달리 활기찬 탑의 선언이 울려퍼졌다.
[ 등급을 측정할 수 없는 아이템! ]
[ 당신은 13번째 세계보구를 창조했습니다! ]
그 선언은, 무티아에게는 물론이요, 독사에게도 들렸다.
독사는 긴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티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벼려낸 칼을 두어 차례 흔들고 나서, 척, 소리가 나도록 들어보였다.
+
[회귀자 수확자]
희귀도: 세계급
제작자: 폐허를 추수하는 소
설명: 폐허를 추수하는 소가 자신의 뿔을 벼려 만들어낸 집념의 칼. 이것은 이른바 [시간을 날아가는 추적 미사일]입니다. 말하자면 [회귀자 절대 죽이는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무서워라. 여기에 맞아 죽어 회귀한 사람은요. 이 칼이랑 같이 회귀를 해요. 즉 뭐냐? 회귀하자마자 또 죽어버린다 이 말이죠…. 그래서 또 회귀해도? 바로 또 죽어요. 이 칼로 죽은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겠네요.
+
독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어떤 예언 때문이야."
무티아는 말 없이 칼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독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짝퉁 예언자가 아니라 진짜 예언자가 한 명, 우리 탑에도 생겼거든.”
"......."
“그 예언에서는 무티아, 당신이 김공자의 강대한 적이 된다고 하더군.”
말하면서 독사는 스킬을 발동했다.
[ 천하무쌍을 발동합니다. ]
그의 SS급, 스킬, [천하무쌍]은 상대의 예상 투로(圖路)를 보여준다. 즉 상대방이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그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스킬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 상대가 뭘 내는지 본 다음에 낼 수 있다는 것이니까.
물론 가장 단순한 싸움조차도 일반적인 가위바위보가 아닌 하나 빼기 일에 묵찌빠를 더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가 갖고 있다면 이 스킬의 진가는 측정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물론, 독사는 이 스킬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였다.
그때였다.
“시끄럽구만….”
무티아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으로 생각한 독사는 입술을 사려 문 채 본격적인 전투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
오해였다. 무티아의 말은 독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티아의 눈도 독사를 향해 있지 않았다.
“구원하처럼 해야 할 말만 해라.”
"음...?"
독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다름 아닌 아이템 설명란에 붙박힌 상태였다.
잠시 후, 아이템 설명란이 꾸물거리면서 변화했다.
+
설명: 그치만 그건 너무 딱딱하잖아요… 아이템 메시지를 담당하는 저는 스킬 메시지를 담당하는 제 자매와 함께 조금 더 인간적인, 보다 더 친근한 담당자를 꿈꿉니다. (강력한 사명감) 먼저 다가가는 탑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요! (진정어린 포부)
+
무티아가 이마를 짚었다.
“미친 것 같으니. 하여간 공녀 라인 아니랄까봐.”
“앙? 공녀?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를 말하는 거라면, 나는 내 라인인데….”
독사는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무티아는 그제야 독사를 흘끗했다가, 방금 전과 비슷한 한숨을 폭 내쉬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내리쳤다.
쾅......!
폭음과 함께, 무티아가 방금 벼려낸 검, [회귀자 수확자]가 두 쪽으로 쪼개졌다.
[ 아니 이런 미친!? ]
탑의 아이템 담당자가 경악했다.
[ 등급을 측정할 수 없는 세계급 아이템을 갑자기 파괴하고 자빠졌습니다…!? ]
독사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댁 지금 뭐하는……."
“그야 애초에 만들려던 건 이게 아니었으니까.”
무티아는 손을 탁탁 털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그 놈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사념(邪念)이 섞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
“이미 만들어진 것. 만들어진 대로 쓰는 것도 일흥이겠다만, 나는 시간을 대표하는 자다. 나는 나에 의한 우연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형태를 잃고 주괴로 돌아간 자신의 뿔을, 무티아는 다시금 제련하기 시작했다.
깡, 깡! 하는 소리가 메마르게 신전 안을 울렸다.
독사는 그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뭘 만들려던 거였는데?”
“무기가 아닌 것.”
깡!
“살아있지 않은 것을 향해 휘둘러질 것.”
깡!
“네가 혹시 모르는 거냐고 우쭐거렸던 것.”
깡!
“대장장이용 망치를, 나는 만들고 있다.”
독사는 잠시간 침묵했다.
물었다.
“그건 무엇에 쓰게?”
“무엇에든.”
깡!
"누군가를 도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쓸 도구를 한 차례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깡!
“그렇게 하면, 어쨌든 방금 전의 그 쓰레기 아이템보다는---”
깡!
“내 뿔을 꺾은 그 놈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테니까.”
독사는 그 대답을 새겨들었고, 깊이 생각했다.
[ 천하무쌍의 발동을 취소합니다. ]
그리하여, 독사가 물었다.
“도와줄까?”
“흠?”
“어어. 나 대장장이 일 좀 해봤거든…. 댁 주먹만 통한다고 말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잖아?”
독사는 소매를 걷어 보이면서 씩 웃었다.
“어쨌든 이 주먹은, 그 놈의 심장을 뚫어버릴 뻔 했던 주먹이거든.”
무티아는 팍 인상을 찌푸렸다.
오래는 아니었다. 그녀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금 돌아서며 말했다.
“……멋대로 해라.”
그래서 독사는 그렇게 했다.
깡!
깡!
서로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까앙……!
충격파가 터졌다.
마치 알에 실금이 가는 것처럼 틈새가 생기고, 안쪽으로부터 날카롭고 쨍한 빛무리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 축하드립니다! ]
신전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미 오래 전에 벗겨진 껍데기가, 이제야 자신이 무너져내린다는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 등급을 측정할 수 없는 아이템! ]
퍼석. 퍼석!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신전을 떠받들던 기둥들의 허리가 엇나갔다. 처음에 기둥들은 꼭 소화불량에 걸린 듯 표면이 부풀어 올랐고, 곧, 쿠르르르…! 모래 먼지를 토해내며 무너져 내렸다.
충격파가 신전을 안쪽으로부터 무너뜨린 것이었다.
[ 당신들은 첫 번째로, 세계보구를 넘어선 물건을 창조--- ]
그 날 그 순간, 탑에 발을 딛은 모든 이들이 그 선언을 들었다고 한다.
[ 열쇠 조형 완료. ]
하지만.
[ 당신과 엮였던 별자리들은 당신으로 인해 삶의 방식을 바꾸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
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었던 탑의 선언도 동시에 울려 퍼졌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 93층이 클리어됩니다! ]
탑의 선언을 들은 자는 무너진 폐허를, 그 한복판에서 대장장이용 망치를 들어 보이면서 기뻐하는 안대의 남자와 부러진 뿔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어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94층에 입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