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91화 (391/400)

391화.  < 그가 기다린 시간, 그가 걸어온 시간. (4) >

벼려진 순간부터, 그는 한 자루의 오롯한 검이었다.

[ 오오! 되었다! ]

[ 마침내 벼려졌다! ]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이 자신을 수육한 첫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몸을 키우고 몸이 정신을 견딜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유의미한 인지가 생겨나며, 그 연속된 인지가 비로소 기억을 만들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존재와 기억의 길이가 똑같았다.

[ 드디어 만들어졌다! ]

[ 연성되었다! ]

[ 대법의 완성이다! ]

[ 우리가 마침내 벼려낸 것이다! ]

처음부터 완성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 태초의 검! ]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 오오! ]

[ 태초의 검이여! ]

앞에 모여선 사람들은 그 모습이 빈했다. 앙상한 손가락들은 그들이 살면서 지금까지 움켜 쥔 모든 것이 모래처럼 사르륵 새어 나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손가락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무수한 해초처럼 흔들리는 손가락들이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우리들의]

빈자들이 말했다.

[ 슬픔을 ]

[ 아픔을 ]

말했다.

[실망을] [절망을]

말했다.

[ 괴로움 ] [ 갑갑함 ] [ 굶주림 ] [ 목마름 ]

말했다.

[ 알아주소서! ]

[ 책임져주소서! ]

그리하여 빈자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 우리들을 구해주소서! ]

그는 그들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뒤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 몸이 약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을 힘들어 했으며, 앞으로 걸어갈 길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었다.

그 다리들이 하나하나 장작처럼 포개어져,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 우리들의 ]

약자들이 말했다.

[ 미래를 ]

[ 공포를 ]

말했다.

[ 소망을] [갈망을]

말했다.

[ 기다림 ] [ 안타까움 ] [ 두려움 ] [ 바램을 ] 말했다.

[ 느껴주소서! ]

[ 짊어져주소서! ]

[ 책임져주소서! ]

그리하여 약자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 우리들을 이끌어주소서! ]

그런 자들이 많았다.

태초의 참격 이래 한 번도 빛이 들어선 적 없는 곳. 어둠만 괴어 썩어가는 굴 안에는 그토록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그런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애걸하고, 간원하며, 애원하고, 간청했다.

벼려진 순간부터 그는 한 자루 오롯한 검이었으며, 그것은 그가 휘둘러져야 할 대상과 이유 또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 이 세상은 오로지 너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대법을 주관한 자가 나서서 말했다.

[ 너 외의 인간은 모조리 허깨비다. 허수아비다. 텅 빈 깡통이다. ]

그렇게 말한 주관자는 정작 빈자같지도, 약자같지도 않았다. 허깨비나 허수아비, 텅 빈 깡통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관자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갔다.

[ 이 세상에 다른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너에게 부서지기 위해서이다. ]

[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이다. ]

빈자들을 가리키면서.

[ 네게 구원받기 위해서이고. ]

약자들을 가리키면서.

[ 네게 보호받기 위해서이며. ]

바깥과 자신을 가리키면서.

[ 네게 능가당하기 위해서이다. ]

그 말에 거짓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쩐지 모르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알 수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특별한 것인가.’

나는

혼자인가.

4.

땅거미가 졌다.

해가 남기고 간 그림자가 서서히 좀 먹혔다. 그 부식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어둠들은 마치 하늘에 박힌 별자리 마냥 곳곳에 알 박혀 자신의 자리를 주장했다. 결국은 모두 검어질 터였으나, 아직까지는 뿌리만 뻗고 있는 어스름 위에서, 거미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었다. 경련하는 거미의 곁에,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손가락이 있었다.

희고 마릇한 여인의 손가락이었다. 손등에 비친 녹빛 정맥을 타고 오르면 가느다란 손목이, 그리고 그만큼이나 기다란 팔이 겨울날 나뭇가지처럼 이어졌다. 흙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여인은 잿빛 거미였다.

잿빛 거미가 죽어가고 있었다.

"......."

마탑이 쌓아온 악연. 그녀가 모아온 원한. 끝없이 이어진 도전이 한 때 50층의 황제였던 그녀를 결국은 허물어뜨린 것이었다.

“이겼다……."

죽어가는 거미의 곁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드디어, 마침내 이겼어.”

잿빛 거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어두워도 상관 없었다. 시력과 청력을 거의 잃어 버렸음에도 알 수 있었다.

잿빛 거미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토록 많은 이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잿빛 거미는 그 말의 주인을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잿빛 거미는 그들 모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 같으니!”

방금 짓씹듯 소리친 남자의 이름은 로드릭이라고 했다.

백랑세계 출신의 늑대인간으로서 자신이 이끌던 마탑에게 부모 형제를 잃은 자였다. 늑대인간들의 심장과 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월환석(月環石)을 마탑의 마법사들은 장식품의 소재로 애용했다. 그 늑대인간이 굶주리면 굶주릴 수록 월환석의 빛깔은 선명해졌기 때문에, 마탑은 늑대인간들을 구속구에 채워 굶어 죽이는 것을 월환석 수확의 표준적인 절차로 삼았다.

“악마……."

흐느끼는 여자의 이름은 이천린이었다.

이천린은 용화세계로부터 왔다. 딜릭이라고도 불리는 그 종족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나무에 가까웠다. 지적 생명을 구성하는 계보도 중에서도 극히 드문 예였다.

한계없이 팽창한 권력과 비대해진 자의식은 남이 살아가야 할 쉼터를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법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딜릭의 희귀함을 기꺼이 진귀함으로 갈음했다.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은 자신만의 화분에 딜릭을 심어 길렀으며, 그들의 각종 부속지를 칼과 가위로 자신이 보기 좋게 다듬었다. 1년에 한 번 맺히는 열매는 좋은 맛에 더해 복용자의 마력을 키워주는 효과가 있어서 좋은 별식으로 인정받았다.

“내가 죽이고 싶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자의 이름도 잿빛 거미는 알았다.

“나야말로 그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이를 가는 자가 어디서 왔는지도 잿빛 거미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만이,”

“나야말로,”

그들 모두 자신의 죽음을 바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잿빛 거미는 마탑의 왕이었다. 마탑이 저지른 모든 일들의 책임이 그녀에게 있었다. 잿빛 거미가 딱히 무고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손은 아주 붉었다. 굳이 묻힐 필요 없었던 피들이 많고도 많았던 탓이었다.

“내가 먼저였는데.”

“웃기지 마! 내 도전권이 앞서 있었다.”

“어째서 내 순서까지 기다리지 않고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들이 잿빛 거미를 둘러싼 채 오갔다. 말과 숨결로 빚어진 거미줄이 서로를 향한 적의로 살을 에듯 떨렸다.

누군가가 나섰다.

“그만해.”

잿빛 거미는 그 누군가 또한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의 죽음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더 바라고 있을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을 쓰러뜨린 장본인---방금 전투의 도전자였으니까.

“뭐야.”

“도전에서 이겼다고 이 자리를 주관할 권리까지 받은 줄 아는 거냐?”

“설마 이 괴물을 동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마탑에게 가죽을 잃어 속살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찬바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도전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끼리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차분함이 빙판 위에 카드로 세워 놓은 탑처럼 위태위태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억누르고 억누르면서, 도전자는 잿빛 거미를 내려다보았다.

“죽어가고 있지?”

잿빛 거미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말 대신 피거품만 꾸룩, 새어 나왔다가 다물렸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잿빛 거미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너무도 관심이 많았지만, 억지로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대로 죽길 바래.”

도전자는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부탁이니까. 의지를 보이려 하지 말고. 의기를 보이려 하지도 마. 발버둥치려 들지도 말고, 유언을 남기려 하지도 마.”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길 바라.”

조곤조곤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당신에게 극적인 죽음 따위는 주지 않아.”

그 속삭임은 저주를 담고 있었다.

“당신이 들어갈 관은 없을 거야. 당신이 묻힐 묘는 없을 거야. 아무도 당신이 죽은 날짜를 알지 못해서, 아무도 당신의 기일을 기리지 못할 거야. 나는 당신이,”

“외롭고 외롭게 죽어서 그저 잊혀져 스러지길 바라.”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살을 떨게 만드는 증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그 말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잿빛 거미가 자신의 신들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잿빛 거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뿐이고,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일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잿빛 거미 역시 그것을 알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잿빛 거미는 기침을 했다.

“나는, 난….”

잿빛 거미가 마른 손을 뻗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저주를 흘려 넣던 도전자도 주춤하여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오해였다. 잿빛 거미는 그저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갈고리처럼 펼쳐진 손가락들이 별 내린 하늘을 한 차례 움켜쥐었다.

놓았다.

툭 하고, 떨어졌다.

"......."

"......."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잿빛 거미는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못했다.

그녀는, 의미 그대로,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갔나?”

“갔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중 일부는 다가와 무기 끄트머리로 잿빛 거미의 몸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고도 반응이 없자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안도의 숨결이 퍼져 나갔다.

잠시였다. 그 안도는 곧 의문으로 변했다.

“뭐라고 말하려 했던 거지?”

다시금 수군거림이 오갔다.

“마지막까지 오만하게 굴고 싶었겠지.”

“아냐. 꼴사납게 목숨을 구걸하려 했을 거야.”

“어쩌면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던 걸지도 몰라.”

“아니면……."

어둠 내린 들판 속에서, 그 수군거림은 불길처럼 번질 뻔했다.

도전자가 외쳤다.

“그만!”

사람들이 멈칫, 말을 멈추었다.

도전자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논하지 마.”

마치 산불의 불씨를 짓밟아 끄는 듯한 기세였다.

“해석하려 하지 마. 전하려고 들지 마. 의미를 떠올리려 하지 마."

"......."

“알아야 상처를 입힐 수 있고 이해해야 죽일 수 있지. 그러니까 잿빛 거미를 이해하려 했던 건, 싸울 때만으로 충분해. 죽은 지금 그럴 필요는 없어.”

도전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잊어.”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군가는 그렇게 맞장구 쳤고, [망각이야말로 저 괴물의 혼이 떨어질 합당한 지옥이지.] 누군가는 그렇게 말을 얹었다.

도전자의 제안대로, 그들은 잿빛 거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기로 다짐했다.

그렇지만.

"......."

"......."

그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잿빛 거미의 죽음은, 결국에는, 그녀의 삶만큼이나 여기 모인 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또한 원망스러워서, 도전자는 이를 악문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잿빛 거미의 시신은 그렇게 누구로부터도 수습 받지 못한 채 들판에 남겨졌다.

하지만 홀로 남은 것은 아니었다.

[ 열쇠 조형완료. ]

조용한 선언이 울려 퍼졌다.

[ 당신으로 인해 가장 큰 운명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 자가,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였음에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

[ 94층이 클리어됩니다. ]

선언을 들은 자는 묵묵히 잿빛 거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거미가 남긴 허물에서 혼 같은 것이 피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 혼이 자신을 알아보는 일도, 자신 곁에 있는 배후령을 마주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사후에도, 잿빛 거미와 그 피해자들이 화해와 용서를 주고받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선언을 들은 자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그럴 수 있도록 자신이 도우리라는 것을, 그것이 자신이 맡기로 한 역할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 95층에 입장합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탑을 올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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