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 그가 기다린 시간, 그가 걸어온 시간. (5) >
[ 음무핫하하! 네가 바로 태음굴(太陰振)의 마두들이 모여 만들어냈다는 그 강시놈이냐? 태생이 사이한 놈 같으니! 본좌가 네 놈을 참하여 다섯 번째 참격의 주인공이 되어주겠다! ]
베었다.
[ 아미타검. 새로운 생명이란 무릇 사랑하는 자들이 칼을 맞대어 만들어야 하는 법. 그것이 네 번째 참격이 이 세상을 수놓은 이래 줄곧 전해온 규율이었소.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조화를 깨뜨리는 마도의 산물이여! 본 법사의 검으로 베어 편하게 해드리겠소. ]
베었다.
[ 가장 큰 검륙(劍陸)을 다스리는 신검무제께서 본 군을 보내셨다! 잠자코 목을 늘어뜨려라, 사악한 강시왕아! ]
베었다.
베어야 할 것이 많았다. 걷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베어 쓰려진 자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 베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오오, 태초의 검! ]
그럴 리 없을 것이다.
[ 태초의 검이 또 한 차례 우리들을 구했다! ]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 태초의 검! 태초의 검! 태초의 검! ]
[ 우리의 시초! 우리의 끝! 우리의 구원자! ]
있어야만 한다.
[ 우리 모두의 아들이여! ]
그는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굴을 나섰다. [네가,] 세상을 떠돌았다. [태음굴의 악귀들이 벼려냈다는,] 동쪽 바다의 끝자락에 나룻배를 타고 나아가다가 처음 떠오르는 해를 보았고, [세계를 향해 휘둘러진 검.] 서쪽 대륙을 몇 개나 건너 그의 고향에서는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는 탑의 도시에 발을 딛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검 산맥에서 빛을 마시는 용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쪽으로---] 언제나 극광이 몰아치는 하늘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은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 끌끌. 바보 같은 녀석 같으니. ]
은자들의 우두머리가 말했다.
[ 뭐 그리 얼굴에 번뇌가 가득하느냐? ]
그는 은자들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덩치에 비하면 대부분이 그렇지만 은자들의 우두머리 또한 자그마했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그 얼굴은 전체 윤곽만 있을 뿐 눈코입이 보이지 않았다. 진인(眞人) 또는 신인(神人)이라 불리는 종족으로, 그는 이미 이러한 자들과 몇 차례 검을 맞대어본 적이 있었다.
끔찍하게 강한 종족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한 발 약한 종족이기도 했다.
그는 그 중 두번째 사실에서 슬픔을 느꼈다. 진인들이란, 그를 특히나 슬프게 하는 종족이었다.
그가 말했다.
[ 나는 외로워. ]
[ 허허. ]
진인은 쓰게 웃었다. 이어 말했다.
[ 외로울 것이 무에 있느냐? 태음굴에 모여들어 널 벼려낸 모두가 너의 어버이다. 그리고 태음굴에 모여든 모두는 이 세상에 의해 벼려진 것이니, 결국 너는 이 세상 모두의 아들인 셈이라! 아비가 도둑질하듯 몰래 대갓집 문 앞에 내버리거나, 어미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 식은 젖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고아들에 비하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이냐? ]
그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검을 들이대는 이들이 많고도 많았지만, 품을 열어주는 이들 또한 많고도 많았다. 모진 바람이 아니라 아늑한 품이 필요할 적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원하고 있었다.
[ 나는 나의 형제를 갖고 싶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 슬픈 말을 하는구나. ]
진인은 갈대를 꺾어서 얼굴로 가져갔다. 맨들맨들하던 얼굴에 생겨난 입술 모양의 틈새가 곰방대를 물듯 갈대를 물었다.
[ 그래. ]
진인은 한동안 갈대를 우물거리다가 탄식하듯 말했다.
[ 그래. 칼은 서로 한 자루씩 가져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법이지. ]
한 쪽만 가진 칼은 단순한 흉기니까, 하고 진인은 중얼거렸다.
갈대 끄트머리가 한참을 오르내리는 동안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진인이 말했다.
[ 너를 벼려낸 술법은 독하고도 깊은 것이다. 이 세상의 하늘과 땅과 생명과 이치 모두가 네게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인위로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인간의 망집이 또한 추가되었다. 너는 다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긴 시간을 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그 긴 삶 동안 너와 같은 존재는 오직 너 하나로 그칠 것이다. ]
[ ....... ]
[ 하지만 그 암담한 추측을 굳이 예언으로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터. ]
진인은 퉷, 갈대를 뱉고는 그를 향해 걸어왔다.
터벅, 터벅.
그는 멈칫했다. 분명 자신보다 조그마했던 진인의 체구가 한 걸음 다가올 적마다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터벅, 터벅. 그에 따라 발자국 소리도 점점 크고 무거워졌다. 쿵, 쿵. 그는 그것을 소리에 앞서 진동으로 느꼈으며, 비 먹은 담요처럼 묵직하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감촉으로 느꼈다.
[ 고개를 수그려라. ]
어느덧 그를 내려다보면서 진인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 어디 네가 몇 대를 견디는지 잘 세어 두어야 할 것이다. ]
그가 사문에 든 날이었다.
5.
피가 튀었다.
< 크허억! >
남자가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눈 앞을 노려보면서, 남자는 토혈하듯 소리쳤다.
< 흑룡주… 어찌 당신이…! >
흑룡주라 불린 흑발의 여성은 부채를 펼친 채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 오~호호호호호호! 본녀의 치밀한 계획이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군 그래! 김공자! 내게 갖다 바치기 위해 노력해주어 고맙구나! >
< 크윽… 나, 나를 배신한 겁니까…? >
< 본녀 혼자 했다면 배신이겠지. 하지만! >
흑룡주가 탁 소리가 나게 부채를 접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달려왔다.
< 받아라! 김공자! >
< 크억! 성기사, 당신…!? >
< 칼빵입니다! >
< 이, 이단심문관…! >
< 어이어이. 내 칼도 잊어버리지 말라고? >
< 독사아아아앗… ! >
< 이것으로 내가 다시 랭킹 1위니라! >
< 거, 검성 어르신마저……! >
그렇게 한 방씩 얻어 맞은 김공자는 울컥, 피를 토하면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흑룡주가 다시금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소리 높여 웃었다.
< 호! 호! 호! 모두의 의지가 이러하니, 이것은 배신이 아닌 대승적인 합의라 하는 것이다! >
김공자는 그 무도한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한 때 김공자의 동료였던 이들, 그러나 사실은 단 한 차례도 동료인 적이 없었던 악당들이 그런 김공자의 최후를 비웃는 웃음소리만이 언제까지고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였다.
< 핫… 여, 여기는…!? >
원독에 찬 얼굴로 눈을 감았던 김공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앞에는 환하게 번쩍이는 십자 모양의 도형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 나는 탑주이니라. >
< 타, 탑주…!? 당신이 왜…!? >
< 공자여. 너는 원래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즉…. 하지만 이와 같은 불행을 겪었으니, 그런 네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 >
탑주의 말과 함께 김공자의 몸에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김공자는 덜덜 떨면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 오… 오오오… 이, 이 힘은…!? >
< 너의 잠재력이다. >
< 이, 이것이 나의 힘…! 성좌조차도… 아니, 탑조차도 멸할 수 있을 듯한, 이 힘이 나의 것…!? >
< 그 뿐만이 아니다. 스탯창을 열어보아라.〉
김공자는 그렇게 했고, 곧 자신의 스킬란 99개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SSS급 스킬들을 볼 수 있었다.
탑주가 크게 번쩍였다.
< 이제 너를 원하는 시간대로 돌려 보내주마. >
< 알겠소. >
우묵한 눈으로 탑주를 바라보면서 김공자가 대답했다.
곧 시공의 틈새로 녹아 든 김공자는 차갑게 뇌까렸다.
< 지난 삶 때는 남을 위해 살다가 배신당했지.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 >
김공자는 굳게 선언했다.
< 이번 생은 오직---나 혼자만을 위해 살 것이다! >
김공자.
차후 신조차도 멸할 사나이로 기록될 자가 회귀한 순간이었다.......
“음! 좋네요!”
팔락, 소리와 함께 원고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지정족 만화가가 민둥민둥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렇습니까?”
엘프족 편집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예에. 진짜 좋은데요? 특히 이 부분. [탑조차도 멸할수 있을 듯한, 이 힘] 부근의 연출이. 쩌네. 쩔어 완전. 우와. 원래 선생님이 그림 잘 그리신다는 거야 알았지만… 감동입니다, 진짜.”
“업력이야 뭐 저도 제법 됐으니까….”
“예에. 이제 슬슬 선생님도 선생님 본인의 히트작도 좀 내보고 그러셔야죠! 언제까지 남들 어시스턴트만 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유목 생활 접고! 콘크리트 집 짓고. 실제로 집도 지으시고 그러셔야지. 안 그래요?”
편집자의 말에 만화가는 일순 두툼한 입술을 꿈틀했지만 곧 속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바랄 나위 없겠네요….”
“아, 그렇게 되실 겁니다. 요즘 이게 인기야, 인기. 완전 트렌드라고. 왜 김슬람이라고 있잖아요. 재작년에 데뷔했던 거시기 뭐냐, 그 산와족 작가! 그 작가 첫 작품이 혈화극으로 만들어져서 완전 대박 쳤잖아요. 듣자하니 그 돈으로 바빌론도 아니고 저기 낙원 있지. 20층. 거기에다가 빌딩을 한 채 세웠다나 뭐라나.”
“진짜요…?”
“아 그럼, 진짜죠. 내가 왜 구라를 치겠어요. 안 그래요?”
워낙 자신만만한 엘프 편집자의 말에 만화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빌딩이라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20층이니 바빌론이니 하는 것도 너무 멀어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쩌면 집은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만화가는 탐탁치 않은 얼굴로 자신이 그린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경력 15년짜리 작가가 그려낸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물건이었지만, 생활 안정이라는 오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또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작가님.”
“예?”
엘프 편집자의 말이 그를 현실로 돌려 놓았다.
“좀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거든요?”
만화가는 머뭇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불길한 축축함이 심장 밑바닥을 적시는 느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늘 변변찮은 일이 없었는데....
“어느 부분이요…?”
“어디 같아요?”
씨발, 그걸 왜 나한테 처묻고 지랄이야. 무슨 민중학교 수업시간도 아니고, 그냥 어디가 걸리는지 말할 것이지… 하고, 만화가는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늘 그러했듯이, 팔짱을 낀 채 자신에게 턱짓을 해보이는 편집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음… 역시 공자 신이 주인공인 건 너무 좀… 직접적이려나요?”
“에이. 아니죠. 공자 신 일동은 공공재예요, 공공재. 그 투표 결과 새겨놓은 석판 있잖아. 바빌론 해석에 맘대로 갖다 써도 된다고 떡 하니 적혀 있다니깐?”
“그러면… 으음… SSS급 스킬이 99개라는 건 너무했다거나….”
“에휴. 그것도 틀렸습니다. 하여간 작가님은 센스가 없으시다니깐. 여기요. 여기.”
만화가는 혼망한 얼굴로 엘프 편집자가 가리키는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탑주의 등장 장면이었다.
엘프 편집자는 한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탑주가 대체 왜 이런… 이게 뭐야? 이거 뭐예요?”
“그, 하이퍼 큐브라고… 4차원 도형….”
“웬 4차원? 작가님 머릿속이 4차원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했는데요?”
만화가는 고개를 수그린 채 우물거렸다. 엘프 편집자는 커다란 귀를 들이댄 채, “예?” “뭐라구요?” 한참 추궁하듯 한 다음에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음… 신이면 그게 좀, 아무래도 형언할 수 없는 불가해한 느낌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에휴~”
엘프 편집자가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 소리야. 안 돼요 안 돼. 미소녀로 해요. 프릴 잔뜩 달린 옷 입은 미소녀로 하고… 아 미소녀 탑주는 옆 작가의 [독사천년]이랑 겹치려나? 그러면… 아! 미소년으로 하는 건 어때요?”
“미, 미소년이요?”
“응응. 미소년, 미소년. 완전 예쁘게! 피규어 만들어서 팔 수 있게!”
엘프 편집자가 점점 들뜰 수록 만화가의 표정은 점차 가라 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 편집자는 손에 든 설탕 스틱으로 원고를 툭툭 두드리면서 논평을 이어갔다.
“그리고 뭐냐, 이렇게 홱 보내지도 말고…. 좀 더 뭔가 있잖아. 기왕 미소년으로 하는 거 좀 썸씽 묘사를 하는 거지. 가령 김공자의 이마에 이 미소년 탑주가 딱 입맞춤을 하는 거예요. 그러자 빛이 쫙! 쭈와악! 차오르는 거야. 어때, 독자들이 막 군침 흘리면서 좋아하겠지?”
"......."
“아 내가 아무리 편집자라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공짜로 주면 안 되는 건데~ 돈 받아야 되는데 완전. 내가 이렇게 손해를 본다니까. 엘프 실격이다, 내가 진짜.”
"그......."
고개를 수그린 채 만화가가 중얼거렸다.
“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편집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생각요? 뭔 생각을 하시는데요?”
만화가는 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정족, 이제는 아수라라 불리는 종족답게 만화가의 그림자는 크고도 넓어 엘프 편집자를 뒤덮었다. 하지만 엘프 편집자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또 뭐냐, 자기만의 만화를 그리겠다 이러려는 거 아니죠?”
만화가는 역시 대답 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섰다.
“그런 거 안 먹혀! 돈 안 된다고!”
만화가의 등 뒤에 대고서 편집자가 계속해서 소리쳤다.
“15년 개고생했으면 알 때도 됐잖아요 선생님!!”
비난보다는 차라리 호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아! 돈 못 번다고!!”
만화가는 원고를 움켜쥔 채 카페 바깥으로 나섰다. 편집자의 목소리는 과연 카페의 문 바깥까지는 쫓아오지 않았다.
만화가는 심호흡을 했다. 이를 갈면서 자신이 그린 만화 원고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아예 집어 던지려는 듯 힘을 주었다가, 흐느끼듯 품에 안고는 걷기 시작했다.
[ 열쇠 조형 완료. ]
탑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 당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들은 이제 이 세계에서 일반적인 신화가 되었습니다. ]
[ 95층이 클리어됩니다! ]
만화가는 물론 그 선언을 듣지 못했다. 만화가는 묵묵히 자신의 작업실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다만, 탑의 선언을 들은 자가 잠자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96층에 입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