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sss급 자살헌터 (2)
내 잔이 가득 찼을 무렵, 나는 술병을 넘겨 받아 탑주의 잔에 술을 따랐다.
"명천에게는 기둥직이 내정되어 있지요 그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나요?"
"예."
꼴꼴꼴, 잔에 술을 따르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탑주를 목표로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 없습니다."
“으흠. 그래요. 모든 신입 사원은 CEO를 목표로 하는 법이지요. 타당한 포부예요."
차오르는 술을 내려다보면서 탑주가 말했다.
“부디 그 포부가 깨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대는 기둥들이 관장하는 포트폴리오 가운데 이제 간신히 [저승] 하나를 맡았을 뿐이니까요."
"....…”
“소인에게 도전하고 싶다면 명천. 모든 기둥들이 갖고 있는 영역을 약탈하세요."
술잔이 모두 채워졌다.
나는 술병을 내려놓았다.
“다른 기둥들은 어떤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건 앞으로 알아갈 일이네요. 의욕이 있는 건 좋지만 환영회 자리에 서 이 이상 일 이야기 하는 것도 흥을 깨는 일이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렇겠습니다."
나는 탑주가 채워 준 술잔을 들었다.
탑주도 내가 채워 준 술잔을 들어올렸다.
“기다리십쇼."
“기다릴게요."
잔이 부딪혔다.
맑은 소리와 함께 찰랑이는 수면에 비친 우리 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탑주가 채워 준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차갑기만 하던 술은 목구멍을 넘어간 뒤에는 핏속에 불을 지폈다. 충만감과 안도감. 그리고 내일을 향한 기대감.
별도의 메시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기둥이 되었다는 것을, 정식으로 이 탑의 모든 저승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여운에 잠겨 있는 동안, 탑주는 검제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검제는 술병을 건네받아 거꾸로 탑주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별말씀을."
술병이 소반 위에 놓였다.
둘은 가득 찬 술잔을 부딪히고는 들이마셨다. 술 기운이 담긴 한숨이 오가고 나서, 탑주가 말했다.
“명천은 기둥직이 내정되어 있었지요. 내정된 자리를 받았고요."
“축하한다, 공자야. 대기업에 임원으로 입사했네."
“하지만 검제. 당신에게는 딱히 약속된 바가 없었어요."
탑주는 검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랏빛 거울이 검제를 비추었다.
“무엇을 바라나요?"
“딱히."
검제는 담백하게 답했다.
“탑과 산 사이에 자이점이 있다면, 그건 세운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정도겠지. 하지만 꼭대기에 오른 녀석이 하는 일이야 탑이든 산이든 똑같지 않겠어?"
다시 술병을 든 검제가 탑주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야지."
탑주가 멈칫했다.
그런 탑주에게 검제는 말했다.
"[탑을 나갈 수 있는 권한]을 주슈"
"아아."
탑주가 한숨을 흘렸다.
“역시 그 말씀을 하시는군요."
“짐작했구만?"
“애초에 그대가 이 탑에 들어온 이유는, 소인과 한잔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하얀 극점에 보랏빛 숨결이 첫눈처럼 쌓였다.
“소인은 독점욕이 강해요. 손에 쥔 보물들은 한 톨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지요. 말 그대로 피부가 썩고 살이 부서져서 뼈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그 뼛가루가 흙과 뒤섞이더라도, 소인의 상자 안에서 뒤섞이기를 바래요."
그것은, 탑에 저승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 또한 깨달았던 것이었다.
“그런 소인이라지만·……”
따라진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탑주는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전사에게 목줄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술잔에 하관이 가려진 탑주의 모습은, 조금 전 내게 기둥들의 영역애 대해 넌지시 내비쳤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박력도 없었다.
오히려 한없이 약하고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원장님이다.
지금 탑주가 보이는 모습은, 고아원을 나선 우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원장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돌이켜 보면 외전 세계의 자수정도 이런 얼굴로 나를 떠나보냈더랬다.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놀러 올게."
술을 단번에 비운 검제가 큼직한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놈의 꽃밭에 회색이 보러 오기도 할 것이고. 이놈이 또 궁상떨고 있으면 엉덩이를 걷어차 주기도 해야 하고."
“아, 제가 무슨 궁상을 떤다고……”
내가 궁시렁거리는 것을 들은 체도 않고 검제는 탑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끔 와서 댁이랑 또 이렇게 술도 마셔 주고 할 테니까 염려 놓으라고."
“예."
탑주가 말했다.
쓸쓸함을 억누르는 것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모습으로.
"가끔 놀러 와 주세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세계를 탑이라는 상자 안에 포섭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봐 온 탑주에게도, 이별이란 항상 새삼스레 아픈 가시였으리라.
나는 여우님을 떠올렸다. 내가 90층대를 오르는 동안 공녀와 실뱀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던 여우님 역시 외로움에 질식당해 죽어 가고 있었다. 잿빛 거미도, 지금 내 곁에 있는 검제도, 스승님이나 라비엘조차도,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가장 큰 적은 더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다만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진정코 강한 자들에게도 가닿는 칼 날은 외로움뿐이겠지.
탑주조차 그 칼날을 힘겹게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가슴 깊이 느꼈다.
고개들 수그렸다.
“고마워요."
탑주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쓸쓸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나를 보는 탑주에게, 언젠가 감사 인사를 올렸던 그때처럼 나는 말했다.
“당신이 탑을 세워 주신 덕분에, 저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말했다.
“나는 누군가처럼 될 수 있었어요."
알게 된 것을 말했다.
“검제는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알게 된 것들을 말했다.
“에스델은 마왕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하나하나.
“휘야는 잘못된 나라를 세웠던 것이 아니었어요. 김율은 쓰레기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나하나.
“스승님께서는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실 수 있었어요. 라비엘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고, 실비아는 남을 상처 입히고 깎아내리지 않고서도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보다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고, 성기사는 누군가를 실제로 죽이지 않고도 정의를 추구할 수 있었어요. 밤볼리나는 이해 받을 수 없는 괴물이 아니었어요. 랴오판은,"
이름 하나하나가 빗물처럼, 여기 아닌 어딘가로부터 내 안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심장에서 흘러넘치는 한마디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사르바스 아이김 대장은,"
"하무스트라는,"
"여우님은,"
"첫 번쨰 파도는,"
"원장님은,"
"유수하는,"
나는.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고개를 깊이 수그린 채 탑주의 잔을 채웠다.
"당신이 탑을 세워주신 덕분에, 이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었습니다."
술이 잔에서 흘러넘쳤다. 소반에흘러넘친 술에 내 얼굴이 비쳤다.
곧 비지지 않게 되었다.
턱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수면을 흐트러뜨렸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탑주를 향해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검제를 향해 말했다.
“두 분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침묵이 흘렀다.
"음"
그 침묵을 깬 것은 탑주였다.
"음."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수그린 채 탑주는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다.
음, 음, 하고서.
그러고서.
"기쁘네요!"
그렇게 말하는 탑주의 얼굴은, 검제의 화환에 떠 있던 태양보다도 환히 웃고 있었다.
툭 하고 이마에 손이 와닿았다. 그 손의 온기와 똑같은 목소리로 검제가 말했다.
"언제든 연락해라."
"예."
나는 눈시울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조금 더 술잔을 나누었다.
볶음밥이 모두 다 떨어졌을 무렵 자연스레 술병도 비었다.
"그럼........."
"예."
나도 검제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탑주는 그러지 않았따. 술을 마실때와 똑같이 그녀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집이었으므로.
그것이 그녀의 자리였으므로.
다만, 탑주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러분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리고 그녀는 우리를 보내주었다.
3
그다음의 이야기는 별달리 입에 담을 만한 것이 없다. 앞서 말한 것이 전부다.
나는 기둥이 되었다.
곧바로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100층까지 오르는 동안 나를 기다렸던 영혼들은, 미안한 일이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으면 한다. 아직 살아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먼저 만날 생각이었다.
어떻게 입사 첫날부터 땡땡이를 치냐며 태고의 지팡이는 어이없어했다. 나는 벌써부터 이런 걸로 어이 없어하면 나와 함께 지내게 될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버틸 생각이냐며 농담을 했다. 태고의 지팡이는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검제와 헤어졌다.
검제는 [탑을 나설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그 권한은 놀랍게도 [탑 이 세워진 모든 세계」에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요컨대 검제는 자신이 본래 태어났던 만검세계로만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났던 현대 지구로도, 챗빛 거미의 탑 바깥으로도, 심지어 탑주가 태어난 세계로도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0층에서 있었던 일로 내게 대항 의식을 가졌다는 것처럼, 검제는 의외로 쉽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성격이다. 헤어질 적에 검제는 장자 탑주의 세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이전에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검성에게 답했던 질문, 모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검사라고 평했던 절검공이라는 존재와 한판 붙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실제로 실천에 옮겨지려면 제법 걸릴 모양이다. 긴 시간 99층에 붙박혀 있었던 검제에겐 그만큼 쌓인 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고향인 만검세계에 들러 살아 있는 인연들을 만날 것이다. 그다음에는 우리들 탑의 1층인 바빌론에 와서 검성과 만나 술을 나눌 것이다. 그 밖에 그가 붙어 있었던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도 술을 나누겠지. 그 뒤에는 내 꽃밭에 와서 쟃빛 거미에게 조문을 할 것이다. 그다음에야 그는 탑주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런 홀가분한 검제의 모습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가 그의 선택을 한 것처럼 나는 나의 선택을 했다. 나에게는 나의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다.
나는 동료들과 대화했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내가 살면서 그렇게 많은 욕을 먹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상상은 했다. 그렇게 기다리게 만들고 걱정을 끼쳤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고도 생각한다. 이 또한 나의 삶을 살아갈 책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욕설들을 듣는 것은 마음이 꺾여 버릴 것 같았지만, 이느덧 나타난 여우님의 복실복실한 등가죽을 만질 수 있었던 덕분에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 여우님께도 나중에 손가락을 물어뜯겼다는 것은 우리들만의 비밀로 해 두더라도 말이다.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동료들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90층대를 오르는 동안 지켜본 것들과 겪은 것들이 있었던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 정리가 이루어 졌다. 여우님께 불려 나타난 실뱀이. 실뱀은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어느덧 다시 신격을 모아 아나콘다 정도로는 진화한 모양이었는데, 어깼든 중간중간 자신이 아는 비밀들을 알려 주어 틈새를 메워 준 덕분이기도 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화제를 나왔을 때 이 기자회견이 계획된 것 이다. 아나스타샤의 제안이었다. 나 보다 현명한 벗의 제안을 나는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
“이상입니다."
그 대부분을, 나는 프로젝터 화면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는 기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숨길 것은 숨기고, 생략할 것은 생략했지만, 그럼에도 제법 긴 시간 이야기해야 했다.
아마 기자들은 당분간 기삿감에 곤란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기쁜 일인지 괴로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전자로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조금 더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회견에서 나오는 질문들 모두에 기꺼이 답해 줄 생각이었다.
이윽고 어떤 기자가 물었다.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고개를 든다.
나를 바라보는 기자들을, 기자들의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나를, 다시 그 나를 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요."
우선은 라비엘과 놀면서 살아 있다는 것을 즐길 생각이다. 그것이야말로 한 점의 거짓도 없는 내 미래 계획 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 카메라 너머에는 분명 옛날의 나처럼 골방에 틀어 앉은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텔레비전에 비치는 나를 내가 염제를 보았던 것과 같은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테니까.
그 시절의 염제가 내게 해 주었으면 싶었던 말이 있다. 물론 그 시절의 염제는 이떤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라면 그것이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염제는 염제로서 살았고, 그래시 염제로서 말했던 것이다.
내게 듣고 싶은 어떤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말할 수밖에 없다.
"음."
서른셋의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
나의 우상이 내게 해 주었으면 했던 말.
“저는."
모두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나는 말했다.
“오늘 하루를 살아 낼 생각입니다."
그 또한, 한 점의 거짓도 없는 미래 계획이었다.
-sss급 자살헌터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