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7)

6화.

한편 세딘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충만한 느낌으로 잠이 들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영원히 깨지 않고 싶은 단잠이었다.

“…님!”

누가 날 부르는 거지? 나는 일어나고 싶지 않아.

“세…님! 일어…십…오!”

‘까망아.’

까망이? 까망이가 누군데.

‘일어나. 주인님을 화나게 한 벌은 받아야지.’

주인? 나는 주인 같은 거 없다.

‘오늘부터 내가 주인이야. 지금 안 일어나면 혼난다. 엉덩이 찰싹찰싹이야.’

찰…싹?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게 주인 같은 건….

“윽.”

세딘은 어쩐지 욱신거리는 코의 통증 때문에,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세딘 님! 정신이 드십니까!”

“대체 이게 무슨….”

“잠시 쓰러지셨습니다. 쓰러져 계신 걸, 마키어스 공작 영애께서 발견하셨습니다.”

“내가 쓰러져 있었다고?”

세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멜슨 사제가 그의 손을 잡고 축복을 걸고 있었고, 그 뒤로 어떤 눈부신 은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예. 저희가 이곳으로 옮겨 축복을 걸고 있었습니다. 아마 과로하신 탓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드 마스터는 고작 과로로 쓰러지지 않는다. 분명히 습격자가-”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세딘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그래. 분명 몽마의 수면 마법이 발동되어 사제가 쓰러졌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성녀의 천막으로 갔고.

‘그리고 아주 강력한 자의 기척이 느껴졌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 어떻게든 찾아서, 나를 받아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세딘은 모포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을 멈추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드 마스터를 습격하는 이도 없겠지.”

세딘은 그 말을 한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 악명 높은 르네 마키어스였다.

“마키어스 공작 영애.”

얼굴에서 오만함과 여유로움이 흘러넘치는 걸 보니, 분명 그녀였다.

“날 알고 있나 보네. 우리 구면인가?”

왜 저렇게 싱글벙글 웃지? 저런 분위기의 사람이 맞나.

세딘은 듣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초면입니다.”

“어쩐지.”

“멜슨 사제. 성녀의 천막에 있던 사람은 못 보았나.”

세딘은 다급하게 멜슨에게 물었다. 그러나 멜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천막에 계신 분은 오로지 마키어스 영애뿐이었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곳에-”

“거기까지. 내가 좀 끼어들어도 될까?”

르네가 세딘의 입을 손으로 다급히 막았다. 멜슨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르네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가장 당황한 건 멜슨이 아니라 세딘 본인이었다.

그는 이 영애가 드디어 정신을 완전히 놓은 게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잠깐 자리를 좀 비워 주겠어, 멜슨 사제?”

“예? 하지만 세딘 님은 치료가 필요-”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네, 네에….”

멜슨 사제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르네는 의자를 당겨 세딘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세딘은 외간 여자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본 적이 없어,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영애.”

“너 말이야. 기억나지?”

“무슨….”

“내 기척. 기억 안 나? 분명히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느꼈을 텐데.”

르네가 세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미약했던 그녀의 기운이 손을 통해서 세딘에게 흘러들어 왔다.

분명했다. 아까 그가 느꼈던 그 기척이었다.

세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정보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럼, 영애가, 그.”

“그래. 그거 나야.”

그럼 내가 충성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영애시라고요?”

“이상하다. 지혜 스탯은 높은데 애가 좀 멍청한 것 같네.”

“지혜… 스탯?”

“너 왜 목격자 덮었니, 까망아?”

“까망…아?”

그건 대체 또 무슨 옆집 고양이라도 부르는 것 같은 호칭이란 말인가?

세딘은 연신 얻어맞는 기분에 얼떨떨했다. 그러나 한 단어가 억지로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목격자 덮으라고 명령한 사람, 누구야? 황태자? 아니면 성녀? 그도 아니면 제3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다 알고 왔으니까 숨겨도 소용없어. 우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나는 네가 용병왕인 것도 알고, 성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게 막내 사제라는 것도 알아. 방금 걔를 만나서 전부 듣고 왔거든. 하지만 내가 정말 모르겠는 건 말이야.”

르네는 세딘의 턱을 쥐어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짙은 푸른색 눈이 그의 흰 피부를 훑었다.

세딘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 채 그대로 압도되고 있었다. 그 넘실거리는 눈이 그를 완전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왜 그랬냐는 거야.”

“….”

“성녀는 제 발로 떠났어, 세딘.”

르네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세딘은 오랜 용병 생활의 경험으로 저 미소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주 결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내가 지하 감옥에 처박혀서 깨어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거야.”

“읏.”

세딘의 턱을 쥔 르네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딘은 그 손이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는 더- 무언가 더… 갈망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성녀가 떠난 건… 당신이 협박했다고 추측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떠나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뭐,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이네.”

르네는 세딘의 턱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난 그런 적 없어.”

“황태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르네는 눈을 반짝였다. 황태자라니.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걔가 명령한 거구나?”

세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태자와는 의뢰로 얽힌 사이였다.

충절 같은 게 오고 간 사이가 아니었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의뢰를 받아서 행한 일이었니?”

“…예.”

그럼 이해해 줘야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그래도 유일한 목격자를 숨기면 안 되지.”

르네는 원하는 것을 얻어 내자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보다 큰 성과였다. 최소한 암살자를 보낸 게 아니라는 것은 밝혔으니, 진전이 있는 셈이었다.

“영애.”

그러나 세딘은 그녀를 그렇게 쉽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영애는 대체 무엇이십니까. 마족이신 겁니까?”

“마족? 아니. 나는 인간이야.”

“하지만 대체 인간이 어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그건 말이 안 되는 힘이었다. 세딘은 말끝을 흐렸다.

몽마를 소환한 것도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 기운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건 어떻게 생각해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단순히 강하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세딘이 느꼈던 기운은-

‘아주 어둡고, 또 오랜 원한이 집약되어 있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순수하고 불순물이 없는, 온전한 기운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한 58번 죽었다 깨어나면 되더라고.”

“예?”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니까, 묻지 마.”

세딘은 힘없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르네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 싫어, 농담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영애는 전혀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얼마 전까지는 그게 사실이었고. 르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본인의 힘을 숨기시는 겁니까? 그 정도의 힘이라면 제국을, 아니, 대륙을 통일하실 수도 있는 힘입니다.”

“통일해서 뭐 할 건데?”

“그건….”

“세딘. 나는 그런 것들엔 전혀 관심 없어.”

‘내가 관심 있는 건 얼른 퀘스트나 깨고 우리 집 켈베로스 보러 가는 것뿐이라고. ’

소설 속 대륙 통일해서 어디에다 쓸 건데. 르네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세딘은 그녀의 말을 다른 뜻으로 곡해한 듯했다. 그는 깊게 감명받은 것인지, 혼자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서는… 그런 물질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오로지 검의 길만을 따르는 것이군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르네는 그 말을 부정하려다가, 반짝이는 초록색 눈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누가 고양이의 초롱초롱 빛나는 초록색 눈을 보고 감히 반박하겠는가.

“결정했습니다.”

“뭐를?”

“영애를 제 스승으로 섬기겠습니다.”

예?

[세딘 안시라드의 호감도가 200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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