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성녀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봐. 무얼 봤지?”
“…어둠…. 어둠이 보여요….”
이 녀석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고?”
“강한… 원한도.”
이미 이 녀석에게 암시를 걸었던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까.
***
“심문은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응.”
“원하는 건 알아내셨나요?”
아주 많은 걸 알아냈지. 르네는 세딘의 물음에 빙글, 웃었다.
“그래.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싹 다 알아냈지 뭐야.”
그거 때문에 아주 곤란하게 되었고. 그녀는 바로 이시르에게로 직행했다.
지금은 그와 합의를 볼 시간이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세딘.”
“저도 같이 가면-”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세딘을 잘라 내고 이시르를 불렀다.
“전하.”
이시르는 홀로 검을 손질하고 있던 중이었다. 르네의 부름에도 그는 묵묵히 검만 손질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그대에게?”
그제야 이시르는 검을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아까보다 더 침착해지긴 했지만, 다른 감정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요. 발견하신 게 있잖아요.”
어딜 숨기려고. 르네는 이시르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품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몸짓에 이시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그는 더 입을 열고 싶지 않은 듯 다시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숨기지 마시죠.”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발견했잖아요, 유서.”
물 언니가 다 말해 줬는데 어딜. 만약 그녀의 성좌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협조가 안 되어서야. 이러니 내가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르네가 으르렁거렸지만 이시르는 검을 여유롭게 이리저리 휘둘러 볼 뿐이었다.
“내 기사들과 내통이라도 하나, 영애?”
“아뇨. 감이 좋은 거죠.”
“영애의 행동은 단순히 감이 좋은 것으론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내 기사들과 내통을 하거나, 아니면 나를 감시하고 있거나겠지. 나는 둘 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이시르는 그 검을 르네의 목에 겨누고 싱긋, 웃었다.
그 성격 나쁜 미소에, 그녀 또한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어때요? 전하가 제 입장이셨어도 저와 똑같이 하셨을 텐데.”
“내가 그대의 입장이 될 일이 없다는 걸 제외하곤.”
끝까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
르네는 검을 두 손가락으로 집은 후 천천히 내렸다.
절대 안 베일 자신은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위협받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시르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더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르네는 그 종이를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이시르의 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유서를 보여 주지 않은 건 영애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저를요? 퍽이나.”
이시르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유서를 올려놓았다.
“끝까지 다 읽고도 영애가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르네는 이시르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유언장은 정갈하고 예쁜 글씨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글씨보다 먼저 보이는 건, 눈물 자국들이었다.
눈물도 어찌나 예쁘게 흘려 놓았는지, 쓴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엿보일 지경이었다.
…그간 제 삶은 비극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제국을 위한 제 임무와 저를 믿어 주시는 분들을 위해 그동안은 차마 아무 말씀도 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 서론을 읽은 건데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망했다.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지금이라도 도망가자고 권합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이마를 짚습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관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