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37)

31화.

이 세계에서 명성이 올라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건 세 가지 같았다.

1. 퀘스트를 성공해서 올릴 것.

2. 오해를 풀어서 그동안의 악명을 지울 것,

3. 누가 봐도 훌륭한 성과를 이룰 것.

지금은 2번이나 3번밖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2번 방법으로는 명성을 크게 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결국 선택해야 하는 건-

‘3번, 훌륭한 성과를 이룰 것.’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르네는 잠시 고민하다가,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원작 소설 1권을 꺼내 다시 한번 탐독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 속 내용대로 가고 있지 않아. 내가 빙의한 후로.’

큼지막한 사건들은 그대로 일어났으나, 몇몇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생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 실낱같은 불확실성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전생에서 르네는 고난이 있을 때마다 소설 속 지식을 빌려 해결하는 편이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이뤘어야 했을 성과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물론 르네도 그 방법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남의 행복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은 그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럴까.

이번에도, 그렇게 다른 사람의 성과를 빼앗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그건 이제부터 시험해 보면 알겠지.’

남의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잘하는 것.

그게 그녀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

그날 아침, 세딘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깊게 잠들었다.

지난밤에 꾼 꿈이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로 잠을 만끽했던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가 된 후로 거의 잠에 들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소드 마스터가 된 후로, 계속해서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 악몽은 세딘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갉아먹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불안을 일깨웠다.

하지만 그 악몽이 최악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그 악몽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밤에는 악몽 대신에 안식이 그를 찾아왔고, 그는 그 안식 아래서 평안을 되찾았다.

그를 찾아온 손님이 안식만이 아니라는 건, 그가 깨어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마를 간질이는 촉감에, 세딘은 즉각 반응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손부터 뻗어,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는 손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잡은 순간 또 다른 반응이 이어졌다.

심장이, 내려앉는.

“…르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르네의 푸른 눈을 보자마자, 세딘은 아직 그 꿈이 끝나지 않았나 의심했다. 아직도 나는 꿈인가.

그렇다면 참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안녕, 세딘.”

하지만 르네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세딘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꿈 같은 게 아니었다. 꿈보다 훨씬 더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긴 어떻게….”

“내가 자는 데 방해한 거 아니지?”

한편, 르네는 조금 머쓱해 있었다.

당연히 지금쯤 세딘이 깨어 있겠거니 싶어 그의 막사로 들어왔는데- 세딘이 너무나도 잘 자고 있었으니까.

아마 르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완전히 기척을 죽인 탓에, 들어온 걸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그의 옆에 앉아서 세딘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깨우려 했지만, 세상모르고 평화롭게 자는 그 모습을 보니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 잠이 얼마나 귀한 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부터 느낀 건데, 자는 모습이 되게 예쁘게 생겼네.’

눈이 안 보이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검은색 머리칼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사실 세딘의 검은 머리칼을 좋아하는 이유는, 검은 고양이가 생각나서도 있었지만- 전생의 사람들이 떠올라서도 있었다.

거기 사람들과 비슷한 듯, 다른 머리칼. 세딘의 머리칼은 검은색이긴 했지만, 묘하게 다른 색이 섞여 있었다.

그 색은 어떨 땐 푸른 느낌이었고, 어떨 땐 투명한 느낌마저 들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투명함.

향수와, 낯섦 사이를 넘나드는 것. 그게 세딘이었다.

“전혀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더 자도 돼. 구경할게.”

“구…경이오? 제가 자는 모습을?”

“응.”

“재미도 없고, 별로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닐 텐데요.”

세딘의 말에, 르네는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번에는 다치지 않게 힘을 빼고.

“판단은 내가 해.”

“그럼 저도 봐도 됩니까?”

“뭘?”

“르네가 자는 모습.”

“절대 안 되지. 그걸 말이라고.”

르네는 정색하고 말했다. 그러자, 세딘이 낮게 웃은 후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말해 주십시오.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온 걸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제 기쁨이겠지만,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네.

르네는 자신의 속내를 너무 잘 파악하는 세딘을 못마땅하게 흘겨봐 주었다.

“있잖아. 사실은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밝히면 어떨까?”

“파장이 매우 크겠죠.”

“나쁜 파장일까, 좋은 파장일까?”

“굳이 따지자면 좋은 파장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상당히 놀라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시르도 이득 아니야? 애인이 소드 마스터면? 성녀만큼은 아니어도 소드 마스터… 나쁘지 않잖아.”

“나쁘지 않다고요?”

세딘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가끔 르네는 저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응?”

“저번부터 가끔씩 느꼈습니다. 르네는 저와 함께 있어도, 그냥 언젠가 훅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요.”

세딘은 르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르네는 그렇게 말하는 세딘의 목소리가 어쩐지 약해 보여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참이나 후에, 그녀는 겨우 세딘의 등을 토닥였다. 그나마도 간신히.

“그래서 섭섭해?”

“아뇨.”

“왜? 나라면 섭섭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세딘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온 세딘의 얼굴에, 르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제가 사라지면 섭섭하실 것 같습니까?”

“당연히-”

르네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멈추었다. 당연히 뭐? 당연히 섭섭하다고? 그게 당연한 감정이었던가?

누군가가 사라진다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었나.

‘단장은 가끔씩 감정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주변인들에겐 언제나 가장 차가운 기계, 심장이 없는 리더였다.

‘단장, 사람이긴 해요? 우리가 죽으면, 눈물은 흘려 주실 건가요?’

‘우리 단장은 능력만 사람 같지 않은 게 아니라, 성격도 사람 같지 않아요.’

‘우리는 단장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르네는 스스로에게 놀라 버렸다. 전생에서 동료들이 목숨을 잃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나.

슬픔? 비통함?

아니.

‘오기.’

기어코 탑을 클리어해서 다시 살려내겠다는 오기.

회귀가 서른 번을 넘어갈 때쯤, 르네는 탑을 클리어 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었다.

아무리 시도하고 또 시도해도 탑은 너무 높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죽음만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며.

어차피 아등바등 탑을 클리어 해서 내가 남는 게 뭐가 있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도, 뭐가 남지.

시스템은 르네가 탑을 클리어 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죽기 하루 전날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피할 수 있게.

하지만 삶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르네는 삶에 대한 의지조차 사라져 버렸다.

원래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했는지조차도 잊어버렸다.

그러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시스템은 두 번째 제안을 했다.

탑을 깨면 모두를 되살려 주겠다고. 네가 사라진 그 세상에서 그들은 너 없이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르네는 그 순간부터 희망을 되찾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는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소중함은 점점 무뎌졌다. 결국 마지막에 그녀에게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섭섭함을 느낀다고?’

정말로? 세딘은 그녀가 갑자기 말이 없자 불안해졌는지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르네?”

“아, 미안. 내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르네는 세딘의 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제가 심란하게 해 드렸나요?”

“아냐. 우리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아, 그래.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공표하면 어떻게 될지 얘기하고 있었지.”

르네는 어색하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여전히 세딘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녀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날 도와줄래, 세딘?”

“…물론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정보 길드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내게 의뢰 하나만 넣어줘.”

“의뢰요?”

“응. 아주아주 어려운 의뢰.”

성공시키기만 하면, 바로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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