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정확히는 르네만 잠자리로 돌아갔다.
아르웬에게 당당하게 막사 세 개를 더 요구한 르네는, 그중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막사 하나에 결계 다섯 개를 쳤다.
정확히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무림의 진법에 대해 알 리 없는 이 세계의 생명체들에겐 그건 ‘결계’로 보였다.
그것도, 아주 피 냄새 가득한 결계.
그렇게 누구도 깰 수 없는 결계까지 친 르네는, 세딘에게 한 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먹고 나면 자야 돼, 난.”
그렇게 르네는 제 할 말만 딱 남기고 사라졌다.
남겨진 드래곤, 소드 마스터, 그리고 평범한 인간 하나는 르네의 막사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며.
세 존재는 여기에 있는 이유도, 목표도, 신념도 달랐지만 지금만큼은 단 하나에 동의했다.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난다…!’
“일단 가장 시급한 건 우리입니다, 경.”
“…동의합니다.”
세딘의 말에 아르웬은 억지로 수긍했다.
설마 내가 세딘 안시라드의 말에 동의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르웬은 암담한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건 아르웬이었다.
이딘의 명은 ‘드래곤을 무찌르고 지친 원정대를 조용히 몰살시키고 돌아와라.’였다.
하지만 만약, 아르웬이 그 명령을 정말로 수행하려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드래곤과 손을 잡은 이들을 쳤다면?
‘절대로 나 하나, 여기 있는 기사나 병사들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등골이 오싹했다.
사실 아르웬은 처음엔 의심했다.
세딘 안시라드와 동행하는 걸 보면, 분명 르네 마키어스가 원정대의 일원이라는 건데….
‘그럼 마키어스 가의 수치가 미지의 소드 마스터라고?’
아르웬은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비웃었다. 말이 되나.
차라리 안테 마키어스라면 믿을 수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키릴 마키어스라고 해도, 그래, 믿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두 형제가 아니라-
‘검도 잡아 본 적 없는 망나니가 소드 마스터?’
말도 안 되지. 아르웬은 그저 르네가 어디서 마법 스크롤을 주워 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웬은, 추론했다. 르네는 이시르의 애인이니, 이시르를 졸라서 따라온 모양이라고.
사실은 미지의 소드 마스터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혹은, 르네는 연막일 뿐이고 사실은 세딘 안시라드 혼자서 할란을 잡으러 온 것이라고.
하지만 방금 그 바비큐 파티를 겪고 난 후, 아르웬은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어야 함을 깨달았다.
연막인 쪽은 오히려 세딘 쪽이었다. 아르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둘의 관계가 매우 기이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대로라면 세딘은 르네를 경멸하면서도 대충 비위를 맞춰 주고,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르네는 헤벌레하며 오만하고 멍청하게 이용이나 당해야 했고.
하지만 방금은 어땠는가?
오히려 이용하는 쪽은 르네였다. 심지어 세딘은 르네의 노예라도 된 것처럼 그녀에게 절대 충성, 절대 복종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기인 줄 알았다. 독한 자식, 저렇게 연기를 잘하다니. 역시 정보 길드 수장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반부터 아르웬은 인정해야 했다.
저게 연기면, 배우들은 전부 손가락 빨아야 한다고.
아르웬은 세딘을 알았다.
세딘 안시라드가 어떤 인간인가?
‘세간에서는 이시르 황태자가 제국 제일의 권력자라고 알고 있지만, 그건 틀려도 한참 틀렸다.’
제국민들은 황제가 이빨 빠진 호랑이요, 공무의 대부분을 수행하는 황태자가 진짜 군주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황태자는 황제의 꼭두각시에 가깝다. 황제는 정말 중요한 권력은 모두 틀어쥔 채 누구에게도 나눠 주지 않아.’
황궁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이 제국의 실질적 주인은 황제라고.
그러나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암흑가였다.
암흑가의 인물들은 황제의 존재감을 인정했지만, 그건 오로지 양지에 한해서였다.
그렇다면 음지의 주인은?
다들 음지의 주인에 대해서 쉬쉬했지만, 아르웬은 확신했다.
‘분명 세딘 안시라드가 그 음지의 주인일 것이다.’
평민 출신의 소드 마스터.
밑바닥부터 제국의 영웅이 된 남자. 모든 평민들의 꿈이자 빛이요, 희망인 남자.
작위도 거절하고 정보 길드 하나만 운영하는 게 전부라는 게 세간의 정설이었지만….
얼마 전에 그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지.
‘안시라드의 소유인 시라 길드가, 사실은 제국 상단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러나 아르웬은 더 멀게 봤다. 과연 절반만 소유했을까?
분명 아니었다. 저 인간은 여러모로 수상했고, 또 켕기는 게 많았다.
아르웬에게 세딘 안시라드는 최악의 인물이었다. 먼저, 주군의 정적, 이시르의 가장 강한 동맹 관계라는 게 그러했다.
물론 완전히 황태자의 손아귀에 있는 건 아니라지만- 일단 협력 관계였다.
이딘은 세딘을 회유하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딘은 똑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저는 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 길을 모르는 사람과 동행할 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무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역린인 이딘은 그 말을 매우 치욕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걸 아르웬이 모를 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누구에게도 충성을 바칠 수 없는 작자여서 그랬던 것이겠지만….’
자연히 아르웬은 세딘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르웬은 기사의 정석 그 자체였다.
대대로 황실의 기사단장들을 배출한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기사로 길러졌다.
황가의 후계자들은 자신의 기사단을 가졌다.
그리고 아르웬의 가문인 카나에 가는 항상 자신의 주군을 황제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번의 카나에 가는 이딘을 택했고, 이딘을 무조건 황제로 즉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사 가문의 자존심이자 명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인간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지. 아르웬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세딘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자가 없었다.
단순히 그가 정보 길드의 수장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세딘은 그야말로 무無에 가까운 남자였다. 어떤 욕망도, 어떤 목적도 없는 인간.
그래서 더욱 파악하기도, 회유하기도 어려운 인간.
그런데 아까 그 모습은 뭔가? 뭐였단 말인가?
고작 여자 하나에게 쩔쩔매며, 완벽하게 순종하는 그 모습이라니.
아르웬은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 봤던 그 광경이 진짜 내가 알던 세딘 안시라드 맞나?
대체 르네 마키어스가 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르웬은 고개를 살짝 돌려 예술품에 가까운 모습을 한 할란을 보았다.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는 아르웬조차도 심장이 철렁할 정도의 미모였다.
의심 많은 아르웬이 의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 미모 때문이었다.
저 미모가 인간의 것일 리 없다.
그럼 정말 저것이 광룡 할란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아까의 대화를 보아, 저 광룡은 아예 르네에게 덤비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르웬은 아까 르네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 정말 쟤 죽이고 싶어, 세딘?’
‘그러면 죽여 줄게.’
그 말도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진짜 놀라운 건 다른 것이었다.
저 광룡이 찍소리도 못 하는 것!
대체 드래곤도 찍소리 못 하게 할 정도의 인간이라는 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아르웬은 부던히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이제부터 제국의 주인은 황제나 세딘 안시라드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차기 황제인 이시르나 이딘은 그 후보에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지금 만약 내게 제국의 미래를 가리키라고 한다면….’
르네 마키어스를 가리키겠지.
아르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르웬은 카나에 가였다. 그리고 카나에 가는 언제나 모시는 주인을 황제로 만든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제국의 주인이 정해져 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아르웬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황녀 전하를 살려 주실 겁니까?”
***
다음날 아침.
“야, 날씨 좋네, 오늘.”
르네는 천연덕스럽게 막사 밖으로 나왔다.
“….”
“….”
“….”
그리고, 발을 땅에 내딛자마자 자신을 흘겨보는 세 쌍의 눈과 마주쳐야 했다.
잠이라곤 한숨도 못잔 눈과.
“뭐야?”
르네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왜 이렇게 다들 상태가 안 좋지?
“잠이 오던가?”
그나마 셋 중에선 할 말은 다 하는 할란이 물었다.
할란의 눈에는 이제 열기가 아니라, 시베리아 뺨치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
이상하다, 쟤 레드 드래곤이라 안 했나?
“잘 오던데? 역시 배부르고 공기 좋으면 잠이 잘 오지.”
“…됐다. 너 같은 비상식적 이방인을 이해하려고 한 나의 죄였다.”
할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인가?”
“어쩔 셈이냐니?”
“이제부터 뭘 하고, 어디로 갈 생각이고, 어떻게 네 세상으로….”
“야.”
‘네 세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르네는 할란의 입을 막았다.
[스킬 발동! - 전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