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한편, 결계 바깥.
세딘과 이시르는 동시에 공작저를 방문하던 중이었다.
사실 약속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정확히 같은 시각에 공작저에 도착했다.
둘 다 목적은 같았다.
르네의 공적을 빼앗으려는 공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을 르네와 상의하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점수도 좀 따고.
그런데 참 생각하는 것도 닮은 두 사람. 이렇게 마주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공작저 앞에 도달한 두 마차. 둘은 서로의 인장을 알아보고 확 얼굴을 찌푸렸다.
‘망할 황태자 놈.’
‘망할 용병 놈.’
먼저, 이시르는 얼마 전에 있었던 파티에서 르네가 했던 말이 마음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젠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죠.’
‘…!’
‘그런데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실까?’
르네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게 잠깐의 협력이라는 것도, 연극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제 와 이렇게 기분이 나쁘단 말인가?
이시르는 곱씹고 또 곱씹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단 말인가?
확실히 르네는 전과 달라졌다. 패악만 부리거나, 사람에게 폐를 끼치던 예전의 르네는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제국에서 손에 꼽히게 강한, 마키어스 공작가의 르네였다.
이용 가치가 있는.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리안이 돌아오거나, 황제가 되기만 하면 의미가 없을 여자였다. 약간의 죄책감이 전부일.
그런데 거슬렸다. 계속 눈에 띄었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뭔가를 잃은 적은 있어도, 뺏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딘의 황위 쟁탈전이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그의 것이어야 할 것이, 자격도 없는 인간에게 뺏기고 있었으니까.
다른 놈도 아니고, 세딘 안시라드라고? 제국의 공녀가 어찌 평민 출신의 기사를 끼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그 신분 차가 얼마인데.
그리고, 세딘이 뭐 그리 잘났단 말인가? 비굴하기만 하지 사내다운 매력도 없는 놈이었다. 뭐만 하면 ‘르네의 뜻대로.’, ‘르네가 원하시는 대로.’.
줏대도 없단 말인가? 르네는 왜 저런 놈을 옆에 둔단 말인가?
자신을 두고?
감히.
이건 르네를 가지고 싶어서라거나, 르네가 좋아서가 아니다. 남이 그의 것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건-
저 자식 때문이다.
세딘 안시라드.
***
저 자식 때문이다.
이시르 폰 람디샤.
세딘은 이시르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저 자식만 없었어도 르네의 기분이 나빠질 일도 없을 텐데.
르네를 헌신짝처럼 대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매달리는 꼴이라니. 추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녀가 강해지고,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어져서 매달리는 게 말이 되나?
저놈은 르네가 조금만 아파도 버릴 인간이다. 진짜 버려질 놈은 저놈인데.
인간이 염치도, 양심도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시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세딘은 이제 그를 보면 짜증부터 치밀어 올랐다.
잘난 건 그 핏줄밖에 없는 놈이 감히 르네와 나를 방해하다니.
얼마 전, 세딘은 이시르와 자신의 손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이시르의 손을 잡은 르네를 떠올렸다.
아직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했다. 최근 자신과의 추문이 도는 걸 르네도 알았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더더욱 이시르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해했다.
머리로는.
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감히 그 분노의 화살을 르네에게 겨눌 순 없었다. 그래서 화살은 이시르에게 겨눠졌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당장 작위를 따, 르네에게 청혼했을 텐데. 이 후안무치한 데다가 은혜도 모르는 공작저에서 그녀를 빼냈을 텐데.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을 그녀에게 안겨 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이 제국을 그녀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었다. 복수? 그런 건 하루 만에도 가능했다. 고결한 그녀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참을 뿐.
그가 가진 상단의 재력만으로도 일국을 살 수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길드들의 자금까지 합치면 대륙의 절반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헛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귀찮아서 작위 따위 받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도 귀찮고, 오로지 원하는 것은 더 강한 경지였어서. 어디에 매일 생각이 없어서.
하지만 지금은 지독히도 르네에게 매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에게 매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저 자식만 없었으면.
두 사람은 간신히 표정을 잠재우고 공작저에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동시에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르네!”
르네의 이름을 부르며.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너 이 자식, 느꼈냐?’
‘네가 느꼈는데 내가 못 느꼈겠냐?’
하는, 유치한 생각과 함께.
그러나 결국 생각하는 게 비슷한 두 사람은 결계의 앞에 섰다.
이 안에서 피 냄새가 났다. 누구의 것일지 모를. 그러나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이 결계는 르네가 친 것이다.’
바로 얼마 전, 르네의 결계를 직접 본 세딘은 더욱더 확신했다. 르네가 친 결계였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평하는 마키어스 공작저에서, 이런 결계를 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당장 들어가야 했다. 르네가 위험에 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결계를 깨트렸다간, 시전자에게 타격이 간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결계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참지 못한 세딘이 외투를 벗었다.
얇은 셔츠 하나만 입은 채로 그는 결계에 손을 댔다.
“지금, 뭐 하는 것이지?”
“결계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결계를 해체하지 않고 들어가려 하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미쳤나?”
“제 목숨이 중요합니까? 르네가 저 안에 있는데.”
그 말만 남기고, 세딘은 결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시르는 그런 세딘의 행동에 황당해,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 미친놈.
그러나 질 수 없지.
결국 이시르도 황궁의 제복을 집어 던지고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결계는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마치, 시전자에게 위험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듯이.
‘아니면, 아예 위험한 상대도 아니라고 판단하는 건가.’
어쩐지 오만함이 느껴지는 결계의 태도에, 이시르는 미간을 좁혔다. 이런 대규모의 결계는 황궁 마법사들도 수십 명이 모여야 간신히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마법도 제대로 사사받지 않은 한 개인이 펼쳤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시르는 혼란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렸다. 세딘의 말에 따르면 르네는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경지였다. 그래서 원정대에 참여하겠다 했을 때, 차마 말리지 못했던 것이고.
그런데 소드 마스터인 동시에 마탑주급의 대마법사라고?
뭔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정말 마족과 거래라도 했단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시르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말이 되나. 마족이라니…. 그들이 인세에 개입하지 않은 지가 벌써 천 년이었다. 이제 와 그런 게 있을 리가-
“…공녀?”
…있나?
이시르는 자신의 허무맹랑한 생각이 어쩌면, 아주 허무맹랑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인정해야 했다.
결계를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그가 살면서 본 광경 중에 가장 놀라웠으니까.
수만 송이의 처음 보는 붉은 꽃. 그리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수천 마리의 붉은 나비.
온통 진동하는 피 냄새에도 어지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시전자의 자비였다. 다친 곳 하나 없는 이들, 나비로 뒤덮여 붉게 보이는 하늘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하늘 아래에 무릎 꿇은 기사들은 치졸해 보이지도,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그건 오로지 순수한 강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위력이었다. 사람을 해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제압할 수 있다는 완벽한 확신에서 나오는 위력.
그리고 그 위력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였다. 기사들이 비굴해 보이지 않는 건.
그건 경지를 한참 뛰어넘은 이에게 보이는 존경심, 그리고 경외심이었으니까.
그건 아마도,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약한 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이 모든 광경을 자아낸 이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아득한 경지에 있다는 것이.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러나 정작 그 강자는 쓸쓸해 보였다.
그것이 두 남자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던 벽에 균열을 일으켰다.
특히 이시르는 걸음을 뗄 수도,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그는 결계의 초입에 서서 자신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염없이.
르네는 아예 그를 인식하지도 않았다. 그저 거기 있는 나비 하나와 다를 게 없다는 듯이.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게 그를 절망케 했다.
저기 있는 저 여자가.
그의 마음을 무너트리고 있으면서도 고작 허상 하나보다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르네!”
그래서 질투했다.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가는 세딘을.
-세딘.
그리고 그 세딘을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떨어트리는 르네를 보며.
“제가… 늦었습니다.”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이렇게 당신이 너무나도 외롭다는 눈으로 여기 서 있을 걸 알았다면 당장 왔을 텐데.
세딘은 이성이 끊긴 채로 르네를 끌어안았다.
그 온기가 닿자마자 르네의 초점 없는 눈에 초점이 조금씩 돌아왔다.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나 좀 쫄았었다고 울먹입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당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진지하게 인마전쟁을 고려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