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7)

46화.

세딘 안시라드.

제국의 빛.

그가 그런 수식어를 갖게 된 건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대륙 최초의 평민 출신 소드 마스터.

평민들도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그를 빛으로 만들었다. 본래 검술이라는 건 귀족의 것에 가까웠다.

평민들이 쓰는 검은 검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짓이나 주먹다짐에 가까웠다.

그래서 세딘의 경지는 더욱 놀라웠고 더욱 추앙받았다.

귀족들은 반대였다. 그들은 어떤 지원이나 비전도 없이 소드 마스터가 된 세딘을 보며 굴욕감을 느꼈다.

그들은 세딘을 자신의 휘하에 넣고는 싶어 하면서도, 동급으로 올라오는 건 견제했다.

그래서 그가 작위를 거절했다는 말이 돌았을 때도, 귀족들은 비웃음만 흘렸다.

어차피 작위를 받았어도 그는 귀족이 아니다.

어떤 귀족 사회도 그를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어떤 귀족도 자신의 딸을 그에게 내어 주지 않을 테니까.

세딘은 그림자였다. 귀족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귀족들은 그를 질투했고, 평민들은 그를 경외했다.

그러나 세딘은 두 시선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평민들은 그를 추앙하면서도 그가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를 깎아내리면서도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지만을 알아내려 했다.

정반대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욕망이었다. 욕망이 또 다른 그를 만들었다.

그가 아닌 그를.

사람들은 그가 아닌 그를 원했다. 그는 빛도, 그림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세딘 안시라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서였다.

수백 자루의 꺾인 검, 수천 마리의 너울거리는 나비, 수만 송이의 꽃 사이에서도 오로지 르네만 보인 건.

그 압도적인 무위보다도 오로지 ‘르네’ 자체만 보인 건.

르네는 꺾인 검들보다도 쓸쓸해 보였고, 수천 마리의 나비보다도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수만 송이의 꽃보다도 지독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어서 이성을 잃고 그저 다가가 안았다. 그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서. 누구도 그녀를 그녀로 보지 않는 외로움이 전해져서.

그러나 안는 그 순간까지도 세딘은 확신하지 못했다. 나의 마음은 당신에게 있는데,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당신은 당신이 불러낸 나비들보다도 허상 같다고.

언제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래서 르네의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졌을 때 그는-

축복을 느꼈다. 모든 것을 사하는 것 같은 축복. 차라리 저주와도 같은 속박을 갖는.

그리고 결정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 나는 빛도, 그림자도 되겠다고.

이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든.

***

“그러니까, 그만 좀 쫓아다녀 줄래?”

귀찮아 죽겠네. 르네는 벌써 칠십삼 번째로 그녀에게 와 눈물 콧물 다 쏟는 기사를 걷어찼다.

이제 와 질질 짜면서 미안하다 하면 뭐 하냐고. 있을 때 잘하란 말 모르니.

“하, 하지만 이렇게라도 공녀님께 사죄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사죄할 필요 없다 했잖아.”

“벨까요, 르네?”

르네는 질린 눈으로 세딘을 흘겨보았다. 세딘은 르네의 왼편에 서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베게 해 주세요. 당신을 위해.

“르네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전부 다 베 드릴게요.”

이 소설 애들은 다 약간씩 좀 미쳐 있는 것 같아….

“삼 대를 멸해 줄까.”

“…?”

르네는 그녀의 오른편에 서서 딱딱하게 읊조리는 이시르를 쳐다보았다.

원한다면 가문을 멸문시켜 주겠다. 그럴 능력은 있으니까.

“연좌제는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심해? 부족하다는 뜻인가? 친구들까지 전부 다 죽여 줄 수도 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고 딱 적당하지요, 르네?”

다 필요 없어, 다. 르네는 슬쩍 자신에게 붙는 세딘의 얼굴을 밀어냈다.

이놈의 여우. 귀엽기도 귀엽고 기특하기도 기특하긴 한데….

이렇게 대놓고 살기를 풀풀 풍기면 곤란하지.

르네는 세딘의 살기에 질식하기 직전인 기사에게 손을 휘저었다.

“너 얘 눈 돌아간 거 보이지? 얼른 가렴.”

르네는 세딘의 살기 위에 자신의 기운을 덧씌웠다. 그러자 기사를 묶었던 족쇄가 훅, 풀려났는지 기사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잽싸게 일어나 달아났다. 도망가는 것도 치졸한 꼴 봐라, 저거.

하지만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저렇게 살기를 감출 줄 모르지 않는다. 저런 평민과는 다르지.”

아닌 것 같은데. 르네는 이미 검에 가 있는 이시르의 손을 힐끗 보았다. 너도 어지간히 못 감추는 애 같은데.

“세딘.”

“네, 르네.”

“그리고 이시르.”

“…말해라.”

이놈들을 어쩌면 좋지? 르네는 반쯤 미쳐 있는 두 쌍의 눈을 보며 난감하게 서 있었다.

그때,

“공녀님.”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상 이 사태의 시발점인 기사, 딜런이었다. 르네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을 싸하게 굳혔다.

“아직도 용건이 남아 있나?”

세딘이 그녀의 뒤에서 살기를 내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르네는 세딘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구태여 또 온 이유가 있겠지. 말해.”

세딘은 예상치 못한 접촉에 확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딜런도 용기를 얻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간 무례를 저질렀던 점, 죄송하다고 사죄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례라.”

르네는 덤덤하게 흐음, 하며 숨을 내뱉었다.

“네. 그간 제가 보는 눈이 미천하여 공녀님을-”

“사죄는 받지 않을 거야.”

딜런은 물론이고 다른 두 남자도 의외라는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르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내가 힘을 보여 준 것은 너희들로부터 사죄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하, 하면…?”

딜런이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녀보다도 세 뼘은 큰 키임에도, 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져 올려다봐야만 했다.

“군림하기 위해서였지.”

“…!”

[<유혹의 군주>님이 즐거운 미소를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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