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수도의 마키어스 공작저.
이곳에 도착한 두 대의 마차가 있었다.
하나는 화려한 황실의 문장을 단 마차였고, 하나는 투박한 시라 길드의 문장만을 단 마차였다.
두 마차는 공작저의 문 앞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마차를 몰던 두 마부의 눈도 마주쳤다.
‘이거 익숙한 상황 같은데….’
두 마부는 어쩐지 익숙한 데자뷰에 몸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엔 절대로 열리지 않던 두 마차의 창문이 동시에 내려갔다.
그리고 마차의 두 주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염치도 모르는 독사 놈….’
‘은혜도 모르는 개….’
누구의 것인지 너무나 명백한 생각들이 교차하고, 창문은 동시에 다시 닫혔다.
공작저의 대문이 열리며 두 마차는 동시에 공작저 바로 앞에 도달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르네는?”
먼저 내린 건, 이시르였다. 이시르는 내리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러 온 집사에게 대뜸 질문부터 했다.
‘르네는… 이라.’
집사는 이 황태자께서 공녀를 칭하는 방식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건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호칭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황태자이다. 이시르 폰 람디샤. 철혈의 황태자. 찌르면 피가 아니라 철이 흘러나올 거라는.
‘역시나 공작님께서 옳으셨군.’
집사는 미리 공작으로부터 황태자를 잘 대접하라는 언질을 들은 상태였다.
차기 공작이 될 안테. 그런 안테가 앞으로도 쭉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황태자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본래 중립이던 마키어스이지만, 황태자가 원정대에 다녀오고 나서 판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제국의 민심이 황태자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마키어스의 유일한 딸인 르네가 황태자와 ‘공식 연인’이 되었지 않는가.
좋든 싫든 황태자와 마키어스 가는 한 배를 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관계를 적절하게 잘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황태자의 마음이었다.
‘각하께선 황태자의 마음이 공녀로부터 돌아서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 하셨다.’
본래 아군과 적군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가장 친밀한 아군일수록 한순간에 가장 위험한 적군이 되는 법.
그리고, 연인과 원수는 정말 한끝 차이이다.
특히나 약혼도 아니고 연인 사이이다. 수틀리는 순간 두 가문의 사이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황태자 전하의 마음이 계속 공녀에게 있도록 해라.’
그것이 공작의 명이었다.
그리고 집사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 명에 충실하게 따를 생각이었다.
“공녀님께서 직접 맞이하러 오시지 못한 점 죄송….”
“그걸 왜 사과하지?”
순식간에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자 집사는 당황해 고개를 들어 버렸다.
“예?”
“공녀는 레이디이다. 당연히 내가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가야지, 그녀가 나를 맞이하러 와선 안 된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시르는 매우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놈은 네가 모시는 공녀를 무슨 창부처럼 말하는군.”
“…!”
이게 아닌데. 집사는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꺼져라.”
이시르는 씹어뱉듯이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이 공작저에는 제대로 된 놈이 없는 건가.
“저, 전하.”
“꺼지라고 한 것, 못 들었나?”
“그게 아니라….”
집사는 두려움을 꾹 참고 황급히 말을 이었다.
“고, 공녀님께선 현재 공작저에 계시지 않습니다!”
“…?”
“…?”
그 말을 듣고 당황한 건 이시르만이 아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경?”
“…아닙니다.”
뒤에서 잠자코 공작저에 입성하던 세딘의 눈썹 또한 미친 듯이 위로 솟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티를 낼 순 없었다. 지금은-
“저, 경과 와서… 정말 기쁘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이 여자가 있으니까.
세딘은 지루한 감정을 억지로 숨기며 시선을 여인에게로 돌렸다.
황태자가 억지로 붙여 둔 여자. 가르드 남작가의 둘째 딸, 마리 가르드였다.
원래대로라면 황태자가 억지로 이어 주든 말든,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망설이지도 않고.
하지만 세딘은 황태자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오로지 르네를 위해.
르네가 걱정하고 있는 ‘추문’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그리고….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였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보내실 줄이야.’
저는 무슨 짓을 해도 그저, 르네께는 부족한 제자 정도뿐입니까.
그때는 울컥해서 그렇게 말해 버릴 뻔했다.
이시르와 당연하다는 듯, 파트너가 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건 화나지 않았다. 그건 비즈니스였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저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어도 되는 건… 비즈니스와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르네.’
세딘은 씁쓸하게 미소를 감추었다.
그도 알았다.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의 신분 차나, 격의 차를 생각하면 그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조차 불경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감정이 뇌를 지배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감정이 뇌를 지배한 날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나와선 안 됐었는데.’
세딘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오늘 꾸역꾸역 온 것이었다.
이 죄 없는 여인까지 달고 온 것은, 르네에게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렇게 떠나선 안 됐었다고. 제가 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다시 당신의 세딘이 되고 싶다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세딘은 사실 르네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야 했다.
가끔씩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르네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달싹이는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처음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만 같아서.
어떤 것도 욕심내지 않고,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는 그 눈이 무서워서. 나는 당신의 눈에 자리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수백만의 군사를 독대해도,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만큼 세딘은 두려웠다.
그녀가 세딘에게 주는 흥미와 관대함을 거둬 버릴 것만 같아서.
“…경?”
“죄송합니다, 영애. 무례를 끼쳤습니다.”
불안한 듯한 마리의 목소리에, 세딘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들어가실까요.”
“네, 경.”
마리는 여전히 좀 불안해 보였지만, 차마 세딘에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가르드 남작가.
분명 귀족 가문이고, 신분만 본다면 마리가 세딘보다 더 높은 게 맞았다. 세딘은 평민 출신 기사였고, 마리는 엄연히 귀족 가문의 영애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마리가 더 우위를 점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딘 안시라드.
그가 누구던가.
제국의 빛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제국에 둘뿐인 소드 마스터.
두 명의 황위 계승자가 그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공작위라도 수여할 기세라는 건, 제국민이라면 모두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위가 없는 건, 단순히 그가 작위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의 소동으로 인해 그가 시라 길드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길드, 상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딘은 특별히 그것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떠들라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 그 태도가 사람들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명예, 부, 권력.
그에게 없는 게 있나?
지금 제국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남자는 오로지 황태자인 이시르뿐이었다.
그런 그의 파트너가 되기에 마리 가르드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고작 얄팍한 신분 하나를 앞세워 그의 앞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도 있었지만, 마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도 알았다. 그녀가 오늘 세딘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황태자의 견제 때문이라는 것을.
황태자는 세딘을 붙잡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주어지길 원하진 않았다.
그래서 세딘의 파트너는 대단한 집안의 영애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한미한 가문의 영애일 수도 없었다.
적당히 나쁘지 않은 가문의 얌전한 귀족 영애. 그게 이시르가 원하는 세딘의 파트너였다.
그리고 마리가 그 자리에 낙점된 것이었고.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파트너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욕심이 났다. 그래도, 혹시. 파트너니까 혹시.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법처럼, 운명처럼 이 기사님이 내게 빠지진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겠지.
마리는 본인의 분수를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세딘이 그녀에게 절대로 무례하지 않은 것도 치욕스러웠다.
세딘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에게 매우 정중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절대로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이야기만 했다.
마리는 차라리 집에 가고 싶었다. 모든 게 너무 불편했다.
“마리 가르드 남작 영애와, 세딘 안시라드 경 드십니다!”
그러나, 그런 마리의 불편함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상 받았다.
“…!”
그녀에게 쏠리는 관심과 시선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마리만을 부러워했다.
평소 어중간한 위치의 마리였던지라,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두가 마리를 대놓고 부러워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마리가 부러워하던 아니카 후작 영애도 그녀를 질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영애, 마실 것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앗, 네…!”
세딘의 깍듯한 물음에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남자가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신과 왔는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될 일이다. 지금 이 순간만은 마리가 주인공이었다.
마리는 용기 내어 힐끗, 눈앞의 파트너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검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미모 또한 그 이유에 한몫했다. 아름다운 건 둘째 치고 그에게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희귀한 검은색 머리칼만 보면 분위기가 어두울 법도 한데, 이 남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완벽하게 맑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초록색 눈만은 위화감을 드러낸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얼핏 보면 곧고 꺾이지 않을 것 같은 눈동자였다. 하지만 얼핏, 스치는-
“영애.”
“네?”
“제가 영애께 실수라도?”
정중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세딘의 뜻은 명확했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 무례를 저지를까 염려했습니다.”
“무례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세딘은 끝까지 정중하지만, 또 무심한 목소리로 일관했다. 그 목소리가 마리를 더 작게 만들었다.
이 남자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남자의 무심하다 못해 가끔은 냉혹하게 느껴지는 눈에 감정이라는 것을 깃들게 할 여자가 있을까?
마리는 잠깐 생각했다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없을 것만 같았다. 없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가 좀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황태자이신 이시르 폰 람디샤 전하, 그리고 르네 마키어스 공작 영애께서 납십니다!”
하지만 마리의 작은 희망은 곧바로 산산이 부서졌다.
“대단한 미인들이군요.”
“겉모습만 보면 둘이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소이다.”
그 말이 옳았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황태자와 공녀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
너무 깎아 만든 것만 같아서,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아예 부럽지도 않았다. 그 황태자와, 공작 영애였다.
동경이면 동경이었지, 질투 같은 건 나지도 않았다.
마리도 파티장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넋을 놓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태어나면 대체 무슨 기분일까, 생각하며.
두 사람 모두 완벽해 보였지만, 특히 오늘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는 건 공녀 쪽이었다. 본래도 마키어스 공녀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미모가 크게 회자되지 않는 이유는 공녀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공녀는 몹시 우아해 보였다.
기품 있고, 또 위엄 있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에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저 공녀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던가? 황후라 해도 믿길 정도의 격 아닌가!
마리 또한 깊이 공감했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을 하고 말았다.
“오늘, 공녀님은 정말 대단해 보이시네요. 두 분 너무 잘 어울-”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리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절대로 감정이 들어설 것 같지 않던, 그녀의 파트너의 눈에.
단정할 줄만 알던 그 초록색 눈에 세상의 모든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