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37)

54화.

이시르의 손이 르네의 이마를 스치는 순간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세딘은 잠자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전부 보고 있었다.

르네가 자신의 추악한 질투심을 눈치챌까봐 애써 보지 않는 척했지만, 안 볼 수 없었다.

단순히 질투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늘의 르네는 찬란했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뛰어들 뻔했다. 불에 뛰어드는 것이 숙명인 불나방처럼.

옆에 있는 이 영애가 아니었다면 진작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리는 그의 감정을 눈치챈 건지 뭔지, 처음부터 그의 팔목을 꼭 잡고 있었다. 그 감촉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세딘은 그 감촉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놓아주셔도 됩니다.”

“아, 앗. 시, 실례했어요. 경.”

“아닙니다.”

마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세딘이 가져다준 샴페인을 들이마셨다.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세딘은 한숨을 쉰 후 또 샴페인을 들이마시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더 마셨다간 취하실 겁니다.”

당신이 여기서 취했다간, 내가 바래다줘야 하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세딘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르네를 두고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생각해 준 게 아니라…. 세딘은 한숨을 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시르와 르네는 뭐 그렇게 나눌 말이 많은지 계속해서 대화하고 있었다.

세딘이 끼어들 자리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르네에게 폐가 될까 싶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리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그때, 그런 세딘의 눈치를 보던 마리가 물었다. 세딘은 고개를 휙, 돌려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놀란 마리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겨, 경은 황태자 전하와 가까운 사이라고 들어서….”

“맞습니다, 가까운 사이.”

“네?”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세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와 매우 가까운 사이이니 그분께 인사드리러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죠.”

“그, 그렇죠.”

뭔진 모르겠지만, 잘 말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세딘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세딘 안시라드는 정말이지- 반짝이는 사람이구나, 하는 탄성이 나오게 만드는 남자였다.

마리는 그런 그를 홀린 듯이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수줍게 그의 팔을 잡았다.

“영광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과, 또 두 사람은 마주했다.

파티 한 가운데에서, 모두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며.

“세딘?”

가장 먼저 그의 등장을 눈치챈 건 르네였다.

르네는 절대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던 세딘이 다가오자 조금 놀라 눈이 커졌다.

“…공녀님.”

“안시라드 경. 난 보이지도 않나?”

“오랜만입니다, 전하.”

세딘은 먼저 이시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르네에게도 인사했다.

그러자 마리도 그를 따라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오늘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녀님. 정말 훌륭한 파티입니다. 공작저도 너무 아름답고 웅장해서 감명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리의 목소리에는 어떤 악의도, 과장도 없었다.

르네는 잠깐이나마 그녀를 질투했던 자신을 매우 때리고 싶었다.

“고마워요, 영애. 그, 이름이-”

“마리 가르드입니다, 공녀님.”

“마리 영애. 먼 길 와 줘서 내가 더 고마워요.”

“아! 편하게 마리라 불러 주세요.”

“그럼 나도 르네라 불러 줘요.”

르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마리의 입은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아무리 마리가 사교계에는 둔감한 편이라지만, 르네의 명성을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심성이 악독하다 못해- 그 훌륭한 성녀에게도 암살자를 보냈다는, 마키어스의 공녀.

마키어스의 이름을 업고 패악질을 부리는 오만한 사람.

그게 마리가 아는 르네의 모습이었다.

등장할 때의 위엄에 마음을 빼앗겨 잊고 있긴 했지만, 마리는 기본적으로 르네를 두려워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편하게 대해도 좋아요, 마리. 그 편이 나도 편하니까.”

하지만 지금 르네의 모습은 전혀 악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르네는 특별히 상냥한 건 아니었지만, 절도 있었고 철저하게 예법을 지켰다.

멋있는 사람이다. 마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안시라드 경이 그대를 잘 에스코트해 주고 있나요?”

르네는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속은 절대로 덤덤하지 않았다.

“네! 너무… 너무 잘해 주셔서 죄송스러울 정도로….”

“죄송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옆에서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딘이 끼어들었다.

“되게 잘해 주었나 보네요.”

르네는 그런 세딘은 무시하고, 마리에게 답했다. 하긴, 세딘이 평소에 하던 걸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세딘의 다정함이야 르네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나한테만 잘해 주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조금 섭섭해지는걸.

“네! 기,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도 또 파트너가 되고 싶을 정도에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고 아주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 모습이 밉기는커녕 또 사랑스러운 면모가 있어 르네는 쓰게 웃었다. 귀여워…. 젠장…. 난 귀여운 거에 약한데….

“레이디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경, 뭐하나.”

그때 이시르가 쿡쿡, 웃더니 세딘에게 말했다.

“…감히 저 따위가 레이디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염려될 따름입니다.”

세딘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 번 정도 파트너로 동행하는 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딘은 르네가 아닌 다른 사람과 그딴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전혀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감사합니다, 영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세딘은 최선의 말을 찾아 대답했다.

“두 사람, 잘 어울리는군. 그렇지, 르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이시르가 아니었다. 이시르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르네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물었다.

이 인간이 미쳤나. 르네는 순간 이시르의 발을 밟으려다가, 마리 때문에 꾹 참았다.

“두 사람에게 그렇게 압박 주시지 마세요, 전하.”

짜증 나니까.

진짜 어울려서 더 짜증 나니까.

본인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르네는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음악이 바뀌었다. 경쾌한 음악에서 느릿한 왈츠로 변한 것이었다.

이시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르네에게 손을 건넸다.

“춤, 추지.”

“하지만 지금 세딘과 마리-”

“두 사람도, 파트너로 왔으니 춤을 춰야 하지 않겠나?”

이시르의 말에, 마리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세딘을 돌아보았다.

세딘은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르네를 응시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시선을 마주한 르네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시르는 르네의 허리를 끌어안고 파티장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이시르!”

“거래 잊지 마. 르네.”

르네는 입술을 꽉 깨물다, 세딘을 돌아보았다.

세딘도 마리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르네도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결국 그녀는 체념하고 이시르의 스텝에 맞추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우리 르네 대체 뭘 잘못 먹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자존감 낮아지고 휘둘리냐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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