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37)

71화.

다음 날 아침, 르네와 세딘은 황궁에 입궁했다.

정확히는, 황제와 대신들이 모여 있는 대전으로.

황족은 물론이고, 수도의 유력 귀족이란 귀족은 전부 참여한 것 같았다.

이시르와 이딘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르네는 이시르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훽.

뭐야. 지금 쟤 내 눈 피한 거 맞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어린애 삐진 것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다들 어지간히도 몸이 달았나 보군.’

득달같이 달려드는 꼴이라니. 르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인사했다.

황제도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했다. 화를 꾹 참는 눈치인 걸 보면.

“바로 달려와 줘서 고맙군, 공녀.”

“폐하께서 불러 주셨는데, 어찌 지체하겠습니까.”

르네는 예의 바른 척 대답했다.

“짐이 그대를 부른 것은 어제 일의 해명을 위해서이다.”

“해명이요?”

난 해명할 게 없는데요, 라는 듯 르네는 눈을 깜박였다.

“어제의 그 존재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할란 이야기군.

황제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건 황제만이 아니었다. 이시르를 제외하면 모두가 지금 르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금은 안심시켜 줘 볼까.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볼일은 다 보셨으니까요.”

돌아갔다는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대놓고 안심하면 안 될 텐데. 르네는 마키어스 공작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특히 당신은 아직 안심하면 안 되거든.

마키어스 공작은 그녀의 미소를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볼일이라는 건… 그대의 증명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인간 세상을 둘러보러 오셨다고 합니다.”

“왜… 왜 그런 일을…?”

이 세계의 통념상, 광룡이 아닌 정상적인 용들은 인간에게 아예 무관심하다고 했다.

인간이 돌멩이를 보고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나. 발로 차면 찼지, 그 돌을 주워서 애지중지하는 일은 드무니까.

그래서 어제의 일은 더욱 이례적이었다.

드래곤이 친히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한 인간을 비호하러 왔으니까.

심지어 본체의 모습을 보여 주고, 또 폴리모프까지 해 가면서.

사실 다른 건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인데-

-나의 궤적은 이 인간과 함께한다.

이 말이 문제였다.

몰랐는데 그게 되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나 보다.

르네는 어제 세딘이 울분을 토하며 설명한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르네라고 해서 할란이 왜 시키지도 않은 서비스란 서비스를 다 해 준 건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런 도마뱀 마음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제가 위대한 존재의 뜻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이럴 땐 모른다고 하는 게 상책이지 뭐. 진짜 모르는 것도 맞으니까.

“혹시…”

황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대는 위대한 존재의 반려인 건가?”

켁.

르네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것도 잊고 헛기침을 했다.

옆에 있던 세딘이 부득, 이를 가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여긴 치과도 없는데 이 상할라.

“절대 아닙니다. 제 약혼자는 따로 계시는 걸요.”

르네는 그렇게 말하고 이시르를 향해 예를 표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이시르의 마음에 들었던 건지, 이시르도 덤덤하게 목례했다.

이놈아, 웃음 참는 거 다 보여.

“그런가….”

황제는 여전히 찜찜하다는 듯, 얼굴 근육을 씰룩였다.

“우리를 침략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가 어찌 그분의 뜻을 알겠습니까.”

르네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 제가 다치면 화가 많이 날 거라곤 하시더라고요.”

허억.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찾지 말자.

“그렇다면 다른 주제로 가 볼까. 그대가 이영 카시유라는 이름을 빌린 연유는 무엇이지?”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는 주제가 나왔다.

“그대의 성은 마키어스가 아닌가. 마키어스의 이름으로 대회에 참여했으면 됐을 텐데. 무슨 연유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지?”

황제는 마키어스 공작을 힐끗 보았다.

“카시유 백작과 마키어스 공작 모두 짐의 충신이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 그러니 공녀는 꼭 해명하길 바란다.”

황제는 카시유 백작의 이름을 말할 때 백작 쪽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아마도 이영의 정체를 말하지 않은 것을 아직도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르네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저 또한 마키어스의 이름으로 출전하고 싶었습니다, 폐하. 어찌 제가 가문의 이름을 저버리고 싶었겠습니까.”

“입 다물지 못할까!”

그때, 마키어스 공작이 르네의 말을 가로막았다.

“공작!”

그러나 이시르가 그런 공작에게 일갈했다.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끼어드는 것이오? 황제 폐하의 앞이니, 체통을 지키시오.”

“…!”

잘한다, 이시르. 르네는 속으로 조용히 박수를 쳤다.

“공작. 더 이상 끼어들지 말게.”

이시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황제도 이 부분만은 동의했는지, 공작에게 경고했다.

“마저 말해라, 공녀.”

르네는 가련한 척, 몸을 숙였다.

“평소 아버지, 그러니까 각하께서는 제가 검을 잡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도 제가 출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르네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심지어는, 대회장 앞에 사병을 세우시면서까지요.”

“!”

“!”

사병이라는 말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단순히 르네의 출전을 막는 것은, 가문 내의 일이라 비난할 수 없다.

물론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가문 내의 일이다.

하지만 황가가 주관하는 대회에 제멋대로 사병을 풀었다?

이것은 황가에 대한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공작, 저 말이 사실인가?”

“….”

마키어스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하니 이 문제로 들고 일어설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건 이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이 일에 관련이 있었으니까.

“뿐만 아닙니다.”

그때, 잠자코 르네의 뒤에 서 있던 세딘이 앞으로 나섰다.

“이 일은 공작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내부의 협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딘의 말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세딘 안시라드.”

황제는 묘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내부라 함은, 황가 내부를 가리키는 말이겠지.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자각하고 있나?”

황제의 말에 웅성거림이 멎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 일은 단순히 공작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

“그럼 말해 보아라. 이 일을 거든 것은 누구지?”

“그것은-”

“잠시.”

그때, 세딘의 말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도왔습니다, 폐하.”

이딘이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일어서서 말했다.

“이딘, 네가….”

황제는 이딘이 먼저 선수를 치자 흥미로웠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건, 대회를 방해하기 위함이라거나, 공녀의 출전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딘은 침통하다는 듯, 슬픈 표정을 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저는 공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공작으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실종이라는 단어에, 귀족들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공작 또한 이딘의 뜻을 눈치챘는지 함께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공녀는 제 오라버니의 약혼녀. 가족이 될 사이이지 않습니까. 그런 공녀가 사라졌다는데 어찌 협력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왜 이시르나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공녀의 명예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딘은 르네에게 애정이 담긴 미소를 보냈다.

소름 끼치네.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쟤도 보통 애는 아닌 것 같다고 끼어듭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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