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어둡지만 단출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공간. 그림자 몇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앉아 있질 못하는 이가 있었다.
마키어스 공작이었다.
“1년간 근신이라니. 폐하께서 이러실 순 없습니다.”
마키어스 공작은 불안감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램프가 들려 있어, 마치 불꽃 하나가 홀로 서성이는 것 같았다.
그런 공작에게 일침을 놓는 사람이 있었다.
“일을 그르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전하!”
공작이 이딘에게 램프를 들이댔다. 그러자, 이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딘의 모습은 황궁에서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황궁에서는, 엄청난 무게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기사나 입을 법한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은독수리 기사단의 기사, 그 자체였다.
“감히 전하께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공작.”
그런 그녀의 뒤에는 아르웬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 두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둘 다 진정하지.”
이딘은 아까의 공손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를 집어던진 채, 고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방 안에 있는 이들은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마치 이게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는 듯.
“‘그분’께서 큰 변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공녀가 아마 그 변수인 것 같군.”
그 말에, 눈 몇 쌍이 희번득하게 빛났다. 또 눈 몇 쌍은 소스라치게 놀란 듯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적자’가 그 여자란 말입니까…!”
“성녀가 대적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성녀가 대적자인 줄 알고 …하지 않았던가요. 당장 일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불안으로 분위기가 술렁이자 이딘이 끼어들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주 이상한 게 많아. 갑자기 너무 강해진 것도 그렇고….”
이딘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원래 세상이 알던 르네 마키어스는 멍청한데다가, 이시르만 쫓아다니던 무능력자였다.
하지만 오늘 보았던 회의에서 르네는 멍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지 않던가. 무려 이딘의 짜 놓은 판을 뒤집어엎으면서까지.
또 이시르에게 보이던 그 태도는 어떻던가. 이딘은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의 애정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았다.
르네 마키어스는 이시르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무엇보다 소드 마스터 급의 무위는 아무리 숨긴다 한들,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처럼 갑작스러운 ‘계시’를 받은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당장 그 공녀를 제거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공작이 흠칫 놀랐다.
이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공작?”
“….”
공작은 잠깐 말없이 뒷걸음질 쳤다.
“혹시 충성이 흔들리는 것인가?”
그러나 이내 이딘의 눈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었다.
“제 운명은 그분의 것입니다. 어찌 제 딸이라 할지라도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딘은 흡족하게 웃었다.
“훌륭한 충성이로군. 그분께도 전해 드리겠다.”
이딘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르웬은 그녀의 어깨 위에 코트를 걸쳐 주었다.
“다행히 공작의 첫째 아들은 내가 꼭두각시인 줄로만 알고 있다. 소공작과 공녀의 사이가 좋다니 그걸 이용해 보지.”
“예, 전하!”
이딘은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군. 이리 와 보게. 대주교.”
이딘의 명에 노인 하나가 일어나 그녀의 앞에 몸을 숙였다.
“…하게.”
“명 받듭니다, 전하.”
노인은 이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는 실망시키지 말게.”
이딘은 그렇게 말하고 공작 쪽에 시선을 던졌다.
싸늘하디 싸늘한 시선을.
“그분은 두 번이나 실망하고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분이 아니시니.”
***
한편, 다음날.
황제궁인 금사자궁.
어제 황제가 말한 ‘넷’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심기가 불편한 이시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황제.
혼자 태연한 세딘.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냥 도망치고 싶은 르네.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정말 이상한 조합이라고 비웃습니다.]